바울로 [라] Paulus [영] Paul

그리스도의 사도들 중의 한 사람. 십이 사도의 일원은 아니었으나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가장 큰 활약을 한 사도였다. 칠리치아(Cilicia)의 타르소(Tarsus)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난 그는 성장한 후 광신적인 바리사이인들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박해로 악명이 높았다(사도 8:3). 그러나 그리스도 교도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된 바울로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개종하였다(사도 22:10). 바울로가 그리스도교를 처음 전하기 시작했을 때 교회 내에서의 그의 위치는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바리사이인들은 그를 변절자라고 욕하였고 그리스도 교도들은 그의 박해에 대한 초기의 평판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나바는 특히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는데 그는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에 바울로를 데리고 가서 그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주님을 뵙고 주님의 음성을 들은 일과 또 다마스커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대담하게 전도한 일들을 낱낱이 설명해주었다(사도 9:27). 바르나바의 변호가 효과가 있어 안티오키아 교회는 키프로스, 밤필리아, 이고니온, 리스트라, 데르베 등으로 이어지는 전도 여행에 바르나바를 지도자로 바울로와 마르코를 보조자로 각각 임명하여 파견하였다(사도 13:14). 첫 번 전도 여행을 완수한 후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당시 할례를 강요라던 낡은 율법의 지지자들에게 보다 완화되고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 무렵 유대에서 몇몇 사람이 안티오키아에 내려와 교우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와 그들 사이에 격렬한 의견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교회는 바울로와 바르나바와 몇몇 신도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다른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는데(사도 15:1-2) 베드로가 이 회의를 주관하였다. 모든 견해들이 피력된 후에 마침내 바울로와 그의 동료들의 견해 즉,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유태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견해가 승리를 거둔다(사도 15:5-21). 회의를 마친 후 바울로는 두 번째 전도 여행을 떠나는데 이 여행에서 그는 프리기아, 갈라디아,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지방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모든 신도들을 격려하였으며(사도 18:23) 세 번째 전도 여행에서는 마체도니아와 그리스를 방문하였다. 이 세 차례의 전도 여행에서 바울로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으나 ‘이방인의 사도’라고 불릴 만큼 사도로서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그는 신약성서 27권 중 13권을 서간문의 형식으로 저술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그가 재판받기 전 투옥되어 있던 2년 동안에 쐬어진 것이다. 67년경 바울로는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손에 순교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현재 성 바울로 대성전에 안치되어 있다.

[참고문헌] W.M. Ramsay, St. Paul the traveller and the Roman Citizen. Grand Rapids 1949 / A. Brunot, Saint Paul and His Message, New York 1959 / J. Munck, Paul and the Salvation of Mankind, Richmond 1960 / D.M. Stanley, Christ’s Resurrection in Pauline Soteriology, Rome 1961 / S. Lyonnett, “St. Paul: Liberty and Law”, The Bridge 4,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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