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토회 [한] ∼會 [라] Ordo St. Benedicti [영] Benedictine Order(O.S.B.)

성 베네딕토(St. Benedictus, 480-546?)의 수도회칙(修道會則)을 준수하는 수도회 연합체(聯合體, Confederate)를 이르는 말.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베네딕토회들은 어느 한 지역에 있는 베네딕토회와 종속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 베네딕토의 수도회칙을 모두 똑같이 준수하면서도 운영은 독자적으로 하고 있다. 다만 수족(修族, Congregation)이라는 연합형태가 있어, 오틸리엔(the Congregation of Sankt Ottilien)의 베네딕토회와 같이 보통 베네딕토회의 앞에 수족의 이름을 표시함으로써 전세계에 산재(散在)해 있는 많은 베네딕토회를 구별하고 있다. 분도회(芬道會)라고도 한다.

일정한 장소에 정주(定住)하면서 공동체생환을 통한 철저한 수도생황이 가장 우선적인 베네딕토회의 목적이지만 지역교회(地域敎會) 필요성에 따라 교육, 학문, 포교활동 등 다양한 활동에 종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에 종사할 경우 반드시 대수도원(abbatial)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기 때문에 대수도원의 공동체를 이탈하여 혼자 생활하면서 활동해야 할 때에는 일시적 혹은 임시적으로만 활동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베네딕토회 수도원 안에서의 학교운영이나 신학, 철학, 과학 등의 연구활동 및 예술활동 등의 문화활동은 세계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6세기경 성 베네딕토가 이탈리아의 수비아코(subiaco), 몬테카시노(Monte Cassino), 테라시나(Terracina) 등지에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베네딕토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 후 수도회 출신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이 베네딕토회 수도사(修道士)들로 구성된 선교사들을 596년 영국으로 파견함으로써 영국 내에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또 다시 1세기가 지난 뒤에는 영국에서 유럽의 독일지역으로 선교단(宣敎團)이 파견됨으로써 유럽 전지역에 베네딕토 수도회가 확산될 수 있었다.

중세 때 교회의 세속화(世俗化)로 약화된 수도정신이 아리앙의 베네딕토(Benedictus of Ariane)에 의해 앙양되었고 10세기경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을 비롯한 교회 내의 개혁운동으로 전례없던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중세적 사회질서의 붕괴와 함께 베네딕토회도 새로운 개혁의 요구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098년에는 시토회가, 1664년에는 시토회로부터 다시 개혁시토회인 트라피스트회가 출현하게 되었다. 한편 15-16세기부터 이탈리아에서 새롭게 정비된 베네딕토회가 다시 유럽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수도회의 정신도 새로이 앙양되었다.

또, 이 시기 이후에 베네딕토회의 많은 수족들이 발족되었는데, 그 중 1909년 한국에 진출한 성 오틸리엔의 베네딕토회도 선교를 목적으로 독일에서 발족되었다. 이 수족은 1884년 베네딕토회의 회원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안에서는 수도자(intus monachsus), 밖에서는 선교사(foris apostolus), 그래서 포교 베네딕토회로도 불리는 이 수도회는 이러한 창설의 기본정신에 따라 다른 선교회처럼 일정한 지역을 맡아서 교구와 본당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하는 교구내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교운영. 예술활동 등을 통해 문화적으로 교구전체의 사목을 돕는 데 있었다. 그러나 창설 즉시 진출한 동아프리카(현재 탄자니아)에서는 부득이 교구중심의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한국에서는 교육사업을 통한 기본적인 선교방침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교황청 연감에 의하면 1983년 현재 전세계에 21개 베네딕토회 수족에 9,492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이중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토회에 속하는 회원은 1,038명으로 베네딕토회 수족 중 세 번째로 큰 수족이다.

한국 진출 : 성 오틸리엔의 베네딕토회는 당시의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서 1909년 2월 사우어(Sauer, 辛) 신부 등 2명의 수사신부가 내한하여 서울 백동(柏洞, 현 惠化洞)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함경남도 덕원(德源)을 거쳐 경상북도 왜관(倭館)에 정착할 때까지 많은 어려움과 수난을 당하였다.

① 서울시대(1909-1920년) : 사범학교 설립과 운영계획으로 뮈텔 주교가 초청한 본 수도회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서울 백동 낙산(駱山) 아래 10헥타르(약 3만평)의 땅을 매입하여 수도원의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하였고 1911년 3층 벽돌로 된 거대한 수도원을 완공시켰다. 이미 1909년 말 정식 수도원(Prioratus)으로 승격되었다. 이와 아울러 1910년에는 내한 목적대로 숭공학교(崇工學校)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1911년엔 숭신학교(崇信學校)를 세워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1913년 수도원은 대수도원으로 승격하였으나 숭신학교는 폐교하게 되었다. 지원자가 없다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범교육을 독점하려는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몇몇 수사들이 중국으로 동원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직업교육을 실시하여 목공 · 철공 · 열차 · 원예 등 7개 작업장에서 유능한 직공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이 수도회는 수도생활뿐 아니라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포교수도회로서 본당사목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의 반대로 이를 서울에서 실현시키지 못하고 함경남북도와 간도(間島) 지방을 관할하는 원산교구(元山敎區)가 설정됨으로써 이 지역의 포교를 위촉받아 원산교구가 설정되던 1920년부터 철수하지 시작하여 숭공학교를 폐교하고, 1927년 서울의 수도원도 함경남도 덕원으로 모두 이전하였다.

② 덕원시대(1920-1949년) :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에서는 아프리카 포교지가 붕괴된 뒤 자연 한국 포교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20년 8월 5일 교황청에서도 한국의 원산교구 위임을 허락하자 곧 1921년 5월 1일 사우어 신부는 주교로 성성되었다. 교구사목은 원래 이 회의 선교정책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서울의 베네딕토 회원들은 이 제의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2년 원산교구 통계에 의하면, 관할 내에 독일인 신부 14명, 수사 12명(3명은 한국인) 뿐이었고, 전 교구신자는 7,500명이며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인수받은 본당은 5개인데 원산(元山)과 내평(內坪) 본당이 북한지역에 있었고, 간도지방에 삼원봉(三元峰), 용정(龍井), 팔도구(八道溝) 본당이 있었다. 1926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1927년 덕원의 새 수도원을 완공하여 그 해 11월부터 수도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 덕원신학교를 건립하였다. 이리하여 덕원수도원은 원산 포교지에 있어서 수도생활과 문화적인 중심이 되어 1940년 1월 12일 덕원면속구가 될 때까지 수도원 생활뿐만 아니라 원산교구 내에 있어서의 본당사목활동, 신학교 운영 등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야만 했다. 이에 투칭(Tutzing)의 포교 베네딕토회 수녀들이 1925년 11월 원산으로 내한하여 본당 사목활동을 도울 뿐만 아니라 빈민학교와 여자들을 위한 야학교인 해성학교(海星學校), 유치원, 시약소 등을 개설하여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40편 덕원면속구의 설정과 더불어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칭되었는데 이때 12개의 본당과 89개의 공소, 1만 1,004명의 신자와 34명의 신부(베네딕토 회원 29명, 한국인 교구신부 5명>, 수녀 33명(투칭 소속 유럽인 15명, 한국인 수녀 18명)의 교세를 갖게 되었다. 이 밖에 덕원수도원에서는 출판시설을 갖추어 교리문답, 성가집, 미사경본, 바오로 서한 등의 책자들을 발간하였다. 일제(日帝)의 탄압 속에서도 이처럼 발전한 수도회는 1945년 8월 15일 소련군이 주둔하고, 1946년 토지개혁이 실시된 뒤 탄압을 받기 시작하여 결국 1949년 5월 9일에 수도원의 모든, 장상을 비롯한 신부, 수사들은 체포되어 독일인 신부 6명과 한국인 신부 5명이 1950년 10월 처형되었고, 사우어 대수도원장 주교를 비롯한 18명의 신부, 수사, 수녀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954년 1월 42명의 신부, 수사, 신부들이 생환되어 2년간의 휴양을 마치고 다시 한국에서의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③ 왜관시대(1952-현재) : 1951년 미국을 방문중이던 상트 오틸리엔의 크리소스토모(Chrysostomus) 총원장(Erzabt)은 당시 미국에 체류중인 스위스 출신의 전 연길교구 선교사 비테를리(T. Bitterli, 李) 신부에게 한국에 다시 진출하여 월남한 덕원과 연길교구의 신학생들과 수사들을 모아 새로운 수도회를 건설하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그를 한국 베네딕토회의 장상(Superior maior)으로 임명하였다. 비테를리 신부는 일본을 거쳐 1952년 1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때 남쪽으로 피신한 20여명의 한국인 베네딕토회원들은 대구 주교관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비테를리 신부는 대구교구장 최덕홍(崔德弘) 주교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해 6월 왜관과 낙산에서 본당사목을 시작하였다. 1953년 이 왜관지역은 감목대리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비테를리 신부가 감목대리로 임명되었다. 1955년 왜관에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고 그간 덕원과 연길교구 소속의 옛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함에 따라 수도원 식구가 크게 증가되고, 분당수도 증가되어 나아갔다. 1956년 왜관의 새 수도원은 로마로부터 정식 수도원(Prioratus)으로 인정되었고, 같은 해 대구교구장 서정길(徐正吉) 주교로부터 이미 1953년에 위임받은 3개 군 외에 또 3개의 군에서 사목할 권한을 위임받았다. 1955년 왜관의 순심(純心) 중 · 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마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교육에도 진력하였다. 또한 덕원과 연길에서의 출판사업의 사명과 전통을 이어받아 왜관에서도 분도출판사를 설립하고 기도서, 전례서 등을 출판, 한국 교회의 문서전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그리고 철공소, 목공소와 같은 작업장을 건설. 특히 현대식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이것은 왜관수도원의 자급자족에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농장경영의 현대화를 통해 지역사회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965년 왜관에 세워진 피정의 집은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서 한국교회에 큰 자극을 주어 그 후 많은 피정의 집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베네딕토회에서는 그 후 부산과 서울에도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는데 서울 피정의 집은 동시에 신학원 구실을 하였다. 본당사목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1956년 6개 군에 8개의 본당에 불과하던 것이 1964년까지 12년간에 또 10개 본당이 증설되었다. 본당의 증설과 더불어 교회건축도 크게 발전하였는데 베네딕토회원들은 종래의 프랑스 선교사들처럼 단순한 벽돌건물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된 교회와 사제관을 현대식으로 건축함으로써 교회건축 발전에도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본당과 신자수가 급속히 늘어날 뿐더러 수도원 가족도 크게 늘어나 왜관수도원은 명실 공히 대수도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그 결과 1964년 2월 17일 대수도원(Abbatial)으로 승격되었고, 동시에 오도 하스(Odo Haas) 신부가 초대 대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왜관대수도원은 완전히 자립적인 수도원이 되었고, 한국에서 확고한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1967년에는 부산 오륜동에 한국인 베네딕토회원 중심의 새 수도원이 탄생하였고(1969년 Priorat가 됨), 1971년 4월 왜관수도원의 대원장직이 이동호(李東鎬) 신부에게 이양됨으로써 베네딕토회는 한국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또한 덕원교구에서 활약하던 투칭의 포교 베네딕토회 수녀들과 연길교구에서 활약하던 스위스의 올리베타노 수녀들도 다시 한국에 진출하여 각기 대구와 부산에 수도원 공동체를 신설함으로써 베네딕토회 여자수도회도 남한에서 완전히 그 기반을 굳혔다.

왜관 베네딕토회 수도원은 1983년 말 현재 회원 130여명, 한국인 수사신부 29명, 외국인 수사신부 17명, 한국인 수사 48명, 외국인 수사 4명 등이다.

[참고문헌] Schicksal in Korea, St. Ottilien OBY, 1954 / HWAN GAB 60 JAHRE(還甲), Munsterschwarzach 1973 / Der Funfarmige Leuchter. II., Eos Verlag Erzabtei St. Ottilien, 1971 / 崔奭祐, 韓國芬道會의 初期 修道生活과 敎育事業, 史學硏究, 36, 韓國史學會,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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