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지역에 있는 ‘침묵의 교회’로 서울 대교구 관할구역 일부와, 평양(平壤)교구, 함흥(咸興)교구, 덕원(德源)면속구 등이 이에 속한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부터 광복되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이북에는 소련군이 일본군 무장 해제의 명목으로 진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진주하자마자 곧 북한의 공산화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의 조직이 급조된 것이었기 때문에 대중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으며, 민족주의 세력이 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 신앙인들도 그들의 공산화정책에 장애물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조직적이고 무자비한 종교 탄압정책을 구상하게 되었다. 북한에서 진행된 공산화의 첫 시도는 토지개혁이었다. 이 조치로 인하여 모든 종교단체는 그들이 소유하던 재산을 대부분 상실당함으로써 종교 활동의 경제적 기초가 무너졌다. 1946년 3월에 실시된 이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 무상분배의 원칙 아래 5정보 이상의 종교단체 소유지를 모두 압수하였는데, 그 숫자는 그들이 공식 발표한 것만도 1만 4,404정보에 달하였다.
이러한 종교단체에 대한 압박에서 가톨릭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두드러진 예로는 덕원의 분도수도원을 들 수 있다. 분도수도원은 이 토지 개혁조치로 건물과 대지를 제외한 모든 토지를 몰수당하였다. 생계마저 위협을 받게 된 수도원측은 소련군 측에 항의해 보았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한편 주민통제가 강화되면서 모든 주민은 그들이 신분증명서에 6세 때부터의 종교를 밝혀야 했으며, 종교인은 직장과 관청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공직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또한 도입한 밀정제도 때문에 신도들은 일상생활에서 감시를 받았다. 북한 당국자들은 특히 사상교양 사업으로 학교와 공장에서 유물론을 가르치며 반종교적인 선전을 일삼았으며 미사와 주일학교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주일 상오를 택하여 회의와 강습회 등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신자들이 주일미사에 참례하여 파공지키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주일마다 상오 5시부터 동원하여 30리밖에 가서 사방 1평씩의 땅을 파고, 다 팠다는 증명서를 내무서원에게서 받아와야 하는 등의 악의적인 행동이 자행된 곳도 있었다.
광복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현황은 신자수가 약 19만명, 그 중에서 북한의 신자수는 최소한 5만명으로 추산되었다. 전국의 8개 교구 중 북한에는 평양교구(평안남북도 관할), 함흥교구(함경남북도 관할), 덕원교구(덕원수도원 관할) 등 3개 교구가 있었다. 그리고 서울교구가 관할하던 황해도 교회의 대부분과 춘천(春川)교구의 관할지 일부도 38도선 이북에 위치하게 되었다. 당시 평양교구는 한국인 주교와 신부들이, 함흥과 덕원교구는 독일 분도회 선교사들이 맡아보고 있었는데, 함흥교구장은 덕원수도원의 대원장이 겸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광복 후 약 3∼4년간의 소련군 주둔기가 끝나고 북한 공산정권이 정식으로 들어서자 드디어 종교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정책이 노골화되었다.
북한정권이 자행한 종교탄압 중 가장 대표적인 예는 덕원수도원에 대한 것이었다. 덕원수도원은 당시 북한에서 가장 큰 수도원으로서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를 비롯하여 한국인 신부, 수사, 수녀, 잡역부 등 모두 100여명이 살고 있었고, 빵 공장, 포도주 양조장 및 인쇄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신학교도 그 안에 있을 정도로 거대한 현대적 시설물을 갖추고 있었다.
북한 공산집단은 덕원수도원을 몰수하기 위하여 경리부정, 불온인쇄물 배포 등의 죄목으로 수도원 관계자들을 체포, 수사, 강제연행을 하는 등 탄압정책을 쓰다가 드디어는 덕원수도원을 강제 수용(收用)하여 버렸다. 이 때 체포되어 간 사람은 대원장 사우어(Sauer, 辛)주교, 원장 로트(Roth, 洪) 신부, 부원장 실라이허(Schleicher, 安) 신부, 신학교 철학교수 클링사이즈(Klingseis, 吉) 신부, 수사 전원, 한국인 신부 등 99명이었으며 이들 중 신주교를 비롯한 상당수가 북한의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공산정권은 이 무렵 원산, 고산, 고원, 영흥, 흥남, 함흥 등지에서 약 67명에 달하는 신부, 수사, 수녀들을 잡아들였는데 이 가운데는 원산수녀원, 신고산수녀원, 함흥수녀원에서 체포된 외국인 수녀 20명도 포함되었다. 원산수녀원은 병원으로 전용되고 해성학교(海星學校)는 소련군 자녀들을 가르치는 교육장으로 쓰여졌다.
또한 평양교구장 홍용호(洪龍浩) 주교는 덕원수도원의 강제수용을 항의하였다. 즉 ① 한국에서 40여년간 농업 · 교육 · 과학 · 문화 등에 허다히 공허한 선교사들을 불법 체포한 사실, ② 교회를 폐쇄한 것은 확실히 종교박해로서 북한정권의 헌법에도 위배된다는 사실, ③ 교회와 개인은 엄연히 구별되는 것인데 일개인의 범죄로 교회를 폐쇄하는 것은 부당하며 ④ 체포자 전원을 무조건 석방하고 교회를 개방할 것 등 내용을 담은 항의문을 내무상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러나 홍 주교는 이 때문에 정치보위부위원들에게 납치당한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
1950년에 들어서자 북한 공산정권은 한편으로 남침준비를 서두르며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를 한층 더 강화하였다. 5월 15일에는 서포에 있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수녀원을 몰수하여 그 곳 수녀들을 강제로 영유분원(永柔分院)에 옮겼으며, 남침하기 직전부터는 평안남북도에서 나머지 신부들을 모두 잡아들여 이북에는 이제 한 명의 신부도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총원 14명). 황해도와 강원도의 신부들도 6.25를 전후하여 12명 전원이 체포되었고 함경남북도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체포된 한국인 주교와 신부는 모두가 옥사 아니면 피살 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북한에 남아 있던 신부들이 이와 같이 모두 체포되니 북한의 천주교 신자들은 1949년에서 시작하여 불과 1년만에 신부를 모두 잃은 고아신세가 되었다. 한편 덕원수도원을 필두로 원사, 고원 등지에서 붙잡힌 외국인 신부, 수사, 수녀들은 4년이란 긴 세월의 강제수용소 생활과 ‘죽음의 행진’으로 그간 25명이 희생되었고, 나머지 42명(총 67명)의 생존자만이 본국으로 송환되었을 뿐이었다.
북한 공산사회가 세계에도 유례가 없는 폐쇄사회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나 이 때문에 휴전 이후 오늘날까지의 그 곳 종교 상황에 대해서도 거의 밝혀진 것은 없다. 따라서 북한의 교회에 대하여 확실한 정보가 없어서 월남 귀순자의 제보가 중요한 정보원이 되고 있다. 이들 제보자들에 의하면, 종교행위가 아주 지하로 들어간 것은 대략 1954-1958년으로 본다. 이에 따라 종교에 대한 완전 말살정책도 1950년 중반까지 모두 끝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전쟁말기부터 1955년까지에 이른바 ‘후퇴시기 반동 행위자’ 색출이라는 구실로 종교인들을 핍박하였다. 마치 패전의 원인이 종교인들의 반전운동에 있었던 것처럼 조작하고 후퇴 때 피난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모두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가정에서 또 먼 친척 중에 과거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 혐의만으로도 무고한 사람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인민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렇듯 북한 공산당은 휴전을 전후하여 1955년까지 북한전역에서 종교를 완전히 말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종교를 믿지 않은 사람도 종교인과의 지면관계 사실만으로 죽음을 당한 사람이 있었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북한 공산정권은 이른바 ‘중앙집중지도사업’이라는 것을 벌여 전체주민의 성분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여기에서 또 한 번 종교인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지하종교’가 성행하자 그것이 발각되어 희생되는 종교인들이 날로 속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기인 이 시기에 와서도 가톨릭 교인들은 은밀하게 기도를 올리고 개인적으로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종교자유를 위한 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선천(宣川)에서의 이른바 ‘김 신부 사건’, 원산 철도공장에서의 이른바 ‘십자가 사건’ 등을 들 수가 있는데 이 밖에도 운산군(雲山郡)을 비롯하여 가톨릭 교인이 관련되어 일어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김 신부 사건’은 선천군 내에서 비밀 가톨릭 단체들이 점조직으로 구성되어 선교활동을 하던 중 1959년에 농민들의 현물세 삭감운동에 가담하였다는 단서가 잡혀 책임자인 김 신부는 희생되었으나 그 조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던 지하종교 활동사건이다. 김 신부는 몽유병자를 가장하고 그 곳 주민을 선도하고 있던 중 정체가 발각되어 결국은 공산당에게 잡혀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십자가사건’에는 1960년경 원산 철도공장에서 한 젊은 노동자가 욕실에서 옷을 벗다가 십자가를 떨어뜨려 공산당국에 의하여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가톨릭 신자조직을 누설하게 되어 교인 70여명이 체포되어 처형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를 계기로 공산당국의 이른바 ‘반종교투쟁’은 더한층 강화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종교는 북한 사회에서 문제시되지도 않게끔 되고 따라서 더 이상 박해를 가할 필요성조차 없어졌다고 귀순자들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1974년 11원 2일자 북한 공산당 기관지 <로동신문>을 비롯하여 그후의 각종 출판물 등은 ‘잡귀신, 신사상추방운동’을 더욱 강화하자고 하고 있으며, 1975년 1월 15일 ‘농업자대회’에서 행한 김일성의 연설은, 농촌지역에서 ‘잡사상’이 특히 만연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아직도 북한 주민들 사이에 종교사상이 계속 뿌리깊게 남아있고, 표면상 박해할 필요까지는 없을지 모르나 그들로서는 더욱 더 집요하게 이의 근절을 꾀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보여진다. 또 그들은 1972년에 만든 신헌법의 이른바 ‘종교자유’ 조항에다 구헌법에 없던 ‘반종교선전의 자유’란 구절을 삽입했는데 이것 역시 북한에서 아직도 종교가 완전히 말살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종교말살 이후의 이른바 종교적 잔재마저도 소멸시키고야 말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1972년 7월 4일 ‘남북조절위원회’가 설치되자 북한 공산 당국은 ‘기독교연맹’, ‘불교도연맹’, ‘천도교중앙본부’와 같은 광복 직후에 조직시킨 단체들을 다시 내세워 그들에게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천주교는 이들 단체 중 ‘기독교연맹’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졌으나 현재 북한에는 단한명의 성직자도 남아 있지 아니하다. 또한 1974면 8원2일에는 소위 ‘북조선기독교연맹’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신청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W.C.C.에서 북한기독교의 실태조사를 가입 조건으로 제시하자 그들은 가입신청을 철회하였다.
한편 1983년에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선교부가 탄생되었고 이 기관이 중심이 되어 북한선교를 위한 여러 방안들이 모색되고 있다. 현재 북한의 평양 교구장으로는 서울 대교구의 김수환 추기경이 겸임하고 있으며, 덕원면속구와 함흥교구의 책임자로는 이동호 아빠스가 임명되어 북한 교회의 부활에 대비하고 있다. (⇒) 침묵의 교회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