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랑진본당 [한] 三浪津本堂

주보로 ‘성녀 소화 데레사’를 모시는 이 본당은 경남 밀양군 삼랑진읍 송지리(密陽郡三浪津邑松旨里) 매봉산 기슭에 지도적인 신자들이 교회대지 1,500평을 사들여 임시 성당겸 사제관을 지어 1930년 초대 주임 권영조(權永兆, 마르코) 신부를 맞음으로써 창설되었다. 당시의 신자수는 약 300명. 1932년 프랑스인 박(朴)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야간학교를 세우고 전교에 힘쓰던 중 병환으로 귀국하고 1935년 3대 주임으로 프랑스인 페네(C. Peynet, 裵) 신부가 부임하여 1937년까지 전교하였다.

그런데 그 뒤를 안드레아(한국명 柳興模) 신부가 이어 재임하던 중, 1939년 본당을 밀양읍으로 이전하고, 삼랑진 교회의 건물과 대지는, 대구교구청에서 모두 매각 처분함으로써 이 본당은 한때 근거지마저 잃게 되었다. 그 까닭은 본당 내부의 불화가 심했던 탓으로 전해지고 있다.

8.15광복 후 교인들은 전에 팔았던 교회 건물과 대지가 모두 일본인 소유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을 불하받아 본당을 부흥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일이 수월찮아 시일이 걸리던 중 6.225전쟁이 터져 또 정체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지도적인 신자들과 청년회의 열의로 본당 부활운동이 다시 일어나 1951년 성당건축기성회를 조직하고 1952년 초가2동을 사들여 우선 공소강당을 만들었다. 그 뒤 1956년 부산진 감목대리에게 간절히 탄원한 결과 당시 밀양본당 정수길 신부와 상의한 후 구호물자로, 숙원이던 본래의 본당 대지와 건물을 되사들이게 하였다.

1957년 2월 유선이 신부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삼랑진본당은 마침내 감격적인 부활을 보았다. 그러나 1958년 11월 최재선 주교의 순시를 받은 뒤, 12월에 유신부가 세상을 떠나자 기구한 운명의 이 본당은 또 밀양교회의 공소로 되었다. 그리고 1962년 7월 정수길 신부를 주임으로 맞으면서 본당으로 또 재출발하였다. 그와 함께 9월 26일에는 흙벽돌 움막을 지어 음성 나환자 정착촌인 ‘루카원’을 개설하였다. 1965년 12월 한영일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여 전임 신부 때부터 노인회와의 말썽을 풀어나가면서 교구와 협의하여 수십년래의 숙원이던 현대식의 웅장한 성당을 지어 1968년 11월 10일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이 본당은 현재 이찬우(李讚雨, 요셉) 신부가 주임을 맡고 있으며 신자수 809명에 1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그 동안 이 본당을 맡아온 주임신부는 초대 권영조(權永兆, 마르코) 신부를 비롯하여 1957년 다시 본당으로 부활한 뒤, 유선이(柳善伊, 요셉), 정수길(鄭水吉, 요셉), 한영일(韓永日, 니고나오), 이상호(李尙護, 라이문도), 정행만(鄭行萬, 프란시스코), 안달원(安達遠, 베드로), 이돈우(李敦雨, 레오), 길레르모(Guillermo, 요셉), 손덕만(孫德萬, 토마스), 양덕배(楊德培, 요한), 송기인(宋基寅, 베드로) 신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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