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 [한] 三一運動

1919년 기미년(己未年) 3월 1일을 기해 일제(日帝)에 항거하여 전국에서 거족적으로 일어난 민족독립운동. 기미(己未) 독립운동이라고도 한다. ① 배경 :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으로 조선침략의 발판을 마련한 일제는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대해 무자비하고도 철저한 탄압을 가하며 1910년 한일합방을 강행, 조선을 강점하였다. 한일합방 이후 의병운동의 잔존세력과 일부 애국계몽운동 세력들은 만주(滿洲)를 중심으로 무장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한편 국내에서는 나머지 애국계몽운동 세력들, 즉 민족주의적 지식인종교인학생들에 의해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항일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소위 안악사건, 105인 사건 등을 조작, 이를 무력으로 탄압하고 아울러 1910년 회사령(會社令)을 선포하여 민족자본의 성장을 막았고, 1918년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한 수 토지를 수탈, 농민을 일인(日人) 지주의 소작농으로 전락시켰으며, 농업자본가와 독립운동의 연결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 노동시간의 연장, 일인 노동자와의 임금차별 등을 적용하여 전 민중을 수탈하였다. 이러한 합방 후 10년 동안의 무력통치와 수탈정책으로 지식인, 농민, 노동자, 민족자본가 등 사회 각층은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게 되어 정치의식, 사회의식, 역사의식이 급격히 신장되었고, 여기에 1차 세계대전 종결 후의 민족자결주의라는 국제적 선전구호를 이용한 민족주의적 지식인종교인학생들이 항일독립운동의 봉화를 올림으로써 3.1운동은 일어나게 되었다.

② 발전과정 : 1919년 1월 고종(高宗)이 승하하였다. 일제의 무력통치와 수탈정책 아래 신음하던 민중들 사이에서는 일인들에 의해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어 한층 항일의식이 높아지고 있었는데 이때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 600여명이 2월 8일 도쿄 간다꾸(神田區)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고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이 체포되자 도쿄의 유학생들은 전원 귀국할 것을 제의, 속속들이 귀국하여 2.8독립선언사건을 국내에 알렸다. 이 사건은 3.1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에 접한 국내의 인사들은 지식인, 종교인, 민족자본가, 중소지주층 등 사회 각층을 대변하는 민족대표 33인을 정하고 전국적으로 조직을 갖춘 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비무장, 무저항을 원칙으로 시위를 전개하였다. 민족대표의 독립선언과 시위에 이어 이 운동은 도시노동자, 학생, 상인층에 의해 전국 주요 도시에 파급되어 3월 2일 서울에서 400여명의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고, 3월 22일 남대문에서는 ‘노동자대회’라는 깃발을 든 800여명의 노동자들이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으며 이후 각 도시에서는 끊임없이 시위가 전개되었다. 주요도시에서의 시위는 다시 농촌으로 확산되어 직접적 수탈을 당했던 농민들에 의해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1년간이나 계속되었다.

③ 결과 :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포와 시위에서 시작되어 전국 주요도시로, 전국 주요도시에서 다시 전국 농촌으로 확산되어 1년간 지속된 3.1운동은 일제의 무력 탄압으로 종식되었다. 민족대표 33인은 최고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일제의 회유책으로 형기만료 전에 모두 석방되었지만 시위에 참가했던 민중들의 피해는 대단히 컸다. 약 200만명의 민중이 시위에 참가하여 7,500여명이 피살되고 4만 6,000여명이 검거되었으며 1만 6,00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또한 715호의 민가가 불타고 45개소의 교회와 학교가 파손되었다. 이에 대해 일제의 피해는 피살자 8명, 부상자 158명, 경찰서, 헌병대, 면사무소 등 278개소의 관공서가 파손되었을 뿐이다. 무저항 비무장의 시위 민중에 대한 정규 일본군의 무차별 사격, 잔혹한 고문 등은 식민지통치사상 그 유례가 없는 것이었고 특히 1,000여명의 주민을 교회 안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질러 학살한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일제의 만행이었다.

④ 의의 : 3.1운동은 민족독립을 성취시키진 못하였으나 민족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 첫째 3.1운동의 결과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이는 군주주의(君主主義)를 부정한 우리 나라 최초의 공화주의(共和主義) 정부였고, 또 3.1운동 이후 민족독립운동이 민중이 주인이 되는 국민주의(國民主義) 운동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3.1운동은 근대 민족주의운동의 시발이었다. 둘째 3.1운동은 비무장, 무저항을 원칙으로 해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만주지역에서의 무장독립운동을 유발시킨 계기가 되었다. 또한 독립운동론에 있어서도 만주와 연해주를 기점으로 항일전을 펴자는 독립전쟁론, 외교적 수단으로 독립을 얻자는 외교독립론 등 크게 두 가지 방법을 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3.1운동을 계기로 다수 민중들의 의식이 크게 각성되었고 이것은 3.1운동 이후 민족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넷째 3.1운동은 당시 피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쳐 중국의 5.4운동이 일어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또 인도의 독립운동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⑤ 3.1운동과 천주교 : 일제치하의 조선천주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독립운동을 단죄하였다. 그 당시 프랑스 주교에 의해 다스려지던 조선교회는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했고, 따라서 3.1운동에도 교회의 공식적인 참여는 나타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1908년 천주교인 전명운(田明雲)과 개신교인 장인환(張仁煥)이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친일파 외교고문 스티븐슨을 사살했고, 1909년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이 하얼삔에서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오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는 등 많은 천주교인들이 개인자격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3.1운동 때에도 이와 같이 많은 천주교인들이 시위에 앞장을 섰는데 용산예수성심학교 및 대구의 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이 학교당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시위에 참가하여 학교가 잠시 폐쇄되었고, 서품식이 연기되기도 하였다. 또한 안성, 강화, 해주, 수원, 대구, 안악 등 전국 각지의 본당에서 천주교인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특히 간도(間島)지방에서는 천주교인들의 주도로 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방우룡(方雨龍)의 지도 아래 의민단(義民團)과 같은 천주교신자로 구성된 무장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어 상해 임시 정부에서 안명근(安明根, 안드레아)이 파견되었다. 공식기록으로 보면 3.1운동으로 투옥된 천주교인은 53명에 불과했지만, 천주교인들은 3.1운동이 종식된 후에도 각종 기도회, 신사참배 반대운동, 민중계몽운동 등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많은 천주교인들이 개인자격으로 3.1운동을 비롯한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성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치하의 천주교회의 일부지도층에서는 정교분리의 원칙 아래 민족독립운동을 백안시 한 것은 역사상 큰 오점이었다.

[참고문헌] 姜萬吉, 韓國現代史, 創作과 批評社, 1984 / 崔奭祐, 韓國敎誨史의 探究,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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