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나 제후 등 평신도인 영주가 대수도원장이나 주교로 선출된 자에게 반지나 주교지팡이를 수여하며 축성(祝聖) 전에 충성의 맹세를 받는 권리에 대한 논쟁. 11세기말에서 12세기초에 걸쳐 일어났지만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간의 투쟁은 실제적으로 13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자체가 봉건영주인 고위성직자는 신하가 영주로부터 봉토(封土)를 부여받고 충성의 맹세를 바치던 봉건시대의 관습에 따라 서임식을 통해 세속재산을 물려받았으나 여기서 사용된 상징물들이 다의적(多義的)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어서 물의를 빚었다. 교황 니콜라오(Nicolaus) 2세는 로마 공의회(1059년)에서 이것을 단죄하였고, 1075년 이후 1076, 1078, 1080년에 성 그레고리오(St. Gregorius) 7세(재위 : 1073- 1085)는 평신도에 의한 모든 성직서임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Heinrich) 4세 사이의 분쟁은 광범위한 정치문제를 야기시켰으며 흡사 교회와 제국간의 투쟁 양상을 띠었다. 특히 파문된 황제의 카노사(Canossa)에서의 참회(1077년)는 한때 교황의 우위를 입증하는 듯이 보였다. 영국에서는 성 안셀모(St. Anselmus)와 헨리(Henry) 1세 사이에서 이 논쟁은 첨예화되어 충성맹세와 평신도에 의해 서임된 주교에 대한 축성을 거부한 안셀모에 대하여 런던 교회회의를 통해 헨리왕은 성직자의 서임을 완전히 포기하는 대신 교회의 수입재산을 위한 충성선서만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트로예(Troyes) 공의회(1107년)에서 명확히 평신도의 성직서임이 금지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공식적 합의는 보름스(Worms) 정교조약(1122년)에서 내려졌으며, 제1차 라테란 공의회(1123년)에서 재확인되었다. 이로써 황제나 봉건영주는 서임식에서 반지와 지팡이 대신에 홀(笏)을 통해 세속재산을 하사하는 데서 주교직에 내리는 속권과 성스런 권한이 구분되었다. 그러나 고위성직자의 선거에 통치자가 반드시 입회하게 함으로써 선거에 있어서 정도는 다르지만 속인 통치자들의 영향력이 암암리에 작용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