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 선(善)은 동양에서는 추상적이고, 독립된 개념은 없고 주로 윤리적인 평가개념으로 사람과 관계되는 말에 붙어서 쓰인다. 우선 착하다는 뜻으로 ‘선야'(善也)이고 길하다는 뜻으로 ‘길야'(吉也)이며 많다는 뜻으로 ‘다야'(多也)이고 좋다는 뜻으로 ‘호야'(好也), 옳게 여긴다는 뜻으로 ‘선지'(善之)이다. 이러한 뜻으로 선남선녀(善男善女), 선행(善行), 선정(善政), 선심(善心) 등으로 쓰인다. 권선징악이란 말에서 선과 악을 명사적으로 쓰기는 하지만 여기서 선은 불교에서 선심있는 사람에게 보시를 청할 때 쓰이는 말로서 구체적으로 사람을 가리키며, 징악의 악도 악인의 뜻으로 쓰인다.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말에서와 같이 선과 악이 순수 추상적인 개념으로 쓰이는 것은 종교를 통하여 서구의 철학적 개념이 도입되면서부터이다.
서구 철학에서는 한 존재의 존재목적 달성에 이로운 것을 말하며 그것은 물질일 수도 있고 윤리적인 질서일 수도 있다.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하여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모든 행동이 지향하는 목표가 되는 것으로 정의된다(니코마쿠스 윤리 I, 1-1094a). 토마스 아퀴나스는 깨닫기에 좋은 것[眞], 느끼기에 좋은 것[美], 행하기에 좋은
것[善]으로 나누어, 첫째를 형이상학적 선이라 하고, 둘째를 심미적 선이라 하고, 셋째를 윤리선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결국 서로 존재에서 융합된다고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윤리적 선은 인간의 행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므로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한다. 과연 인간의지는 행동을 유발하고 인간행동은 목적을 겨냥한다. 그러니 선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향하는 목적과 동일시된다. 한마디로 선은 모두가 좋다고 여기고 지향하는 목적이다(Bonum est quod omnia appetunt). 그런데 좋다고 여기는 것은 사실에서는 생활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실용성에서 생각한 선과 이념적으로 생각한 선으로 구별하여 실용적 선은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과(Bonum utile)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쾌락선(快樂善)으로 나누고 실용성과는 상관없이 원리원칙과 합일되는 선 자체를 구별하여 왔다.
2. 개념적 논쟁 : 중세 스콜라철학은 선을 초월적인 개념으로 취급하여 유(有)의 개념과 동일시하였다. 즉 모든 것은 그것이 있다는 점에서 다 같다(unum). 그러니 무엇이든 있다는 것을 포착한 것은 틀릴 수 없는 참이다(verum). 그리고 참인 것 치고 나쁜 것 일 수 없다. 그러니 있는 것은 우선 선이다(bonum). 그리고 모든 사물은 그것이 어떻게 있느냐에 따라 선의 정도가 결정된다. 그런데 ‘있는 것은 선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의 명제는 다분히 형이상학적이다. 있는 것이 내게나 사람에게 좋게 생각되어야 선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야기된다. 이 문제를 놓고 플라톤을 바탕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적 신플라톤학파인 아우구스티노학파와 프란치스코학파는 선은 좋게 여기는 의지에 그 선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에서 또 한 가지 문제가 되던 것은 선에 대한 설명에서 논리적으로 나오는 악에 대한 설명이었다. 다시 말하면 선의 기초가 형이상학적으로 ‘유’에 기초를 두었다면 악은 자동적으로 그 결여상태를 말한다는 것으로 악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각 사람이 악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으며, 악의 원인을 인간이 자유를 잘못 행사한 것에서 비롯된다고 했는데 그것도 실제 체험에 비추어 썩 맞는 설명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합리주의적 윤리에서 선의 객관적 가치를 없애 버리고 ‘지성적 사랑'(amor intellectualis)이란 개념으로 대치시킨 계기가 되었다. 지성적 사랑이란 사물의 본체를 완전히 인식하면 그 인식은 곧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되며 그 일치는 우리에게 즐거움과 행복감을 준다는 범신론적 해석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감각적으로 좋은 것은 선도 악도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음악은 감상적인 기분에 있는 사람에게는 좋지만 심적 고통에 몹시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나쁘며 귀머거리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합리주의는 반합리주의적인 행동가치의 철학이란 반동을 일으켜 결국 진(眞)과 선의 개념을 분리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선은 뭐니뭐니해도 좋은 것이라야 하는데 감각적이든 윤리적이든 행동의 지침이 되는 것이 선이라는 것이고, 모든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결국 가치라는 것이다. 가치, 곧 선이라는 도식은 칸트에 있어서는 의무수행에서 결정된다. 칸트에 의하면 ‘선량한 의지’외에 달리는 선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 선량한 의지는 실제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옳게 원한 것이라야 된다는 것이다. 옳게 원하는 것은 원해야 할 것을 원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세기를 통하여 선에 대한 토론은 그치지 않았고 철학자마다 의견을 달리하다가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상황윤리(狀況倫理)에서는 선에 대한 개념자체를 아예 없애 버리고 말았다.
3. 선의 체험 : 문제는 선의 기준을 객관성에 두느냐, 아니면 주관성에 두느냐 하는 오래 묵은 쟁점에 맴돌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가 발굴한 선의 분석은 ‘선이란 올바르게 있음이고 올바르게 있어야 함이다’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니까 존재적인 측면과 당위적인 측면, 이렇게 양면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양면성을 가진 선은 눈에 보이거나 감각으로 들어오거나 하지 않는다. 선은 오직 온 인격을 열고 좋은 것에 순종할 때 체험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 순종하는 체험은 선에로의 초대에 대한 응답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체험이 구체화될 때에는 윤리적인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진리인식에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이 일치하는 것과 같이 선의 체험에서도 체험자의 인격 안에 영신적인 조화가 일어나게 된다. 진리가 인간지성에 의하여 깨달아짐으로써 진리의 진가가 나타나듯이 선도 선을 체험하는 자의 인격화가 됨으로써 선의 매력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선은 행하여짐으로써 그 진가가 발휘된다. 선이 실천되는 것과는 관계없이 순수 객관적으로 생각되어 오로지 인식의 대상이기만 하다면, 사람의 오해와는 관계없이 차갑게 존재하는 진리와 다름없다. 그러나 선은 그것이 체험되고 실현될 때에 선의 진가가 나타나기 때문에 선도 진리와 마찬가지로 실천과 관계없이 존재할 수 있겠으나 역시 그것이 실행되면서 인격과 더불어 윤리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선의 전개에는 역사가 있다.
선을 인격적인 체험 안에서 이해하자면 혹은 완성 또는 행복으로 볼 수도 있고, 또는 사랑의 헌신으로 볼 수도 있다. 하여간 인간의 자유가 인간완성을 위하여 만개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선은 따먹으려는 인간염원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인간이 받아들이는 또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응답을 재촉한다. 선은 좋기 때문이다. 선은 인간이 거룩한 분위기에 빨려 들어가는 영역이다. (白敏寬)
[참고문헌] A.C. Ewing, Definition of Good, 1947 / E. Weil, Philosophie Morale, 1961 / J. Pieper, Reality and the Good, 19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