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北京)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李檗) 등에 세례를 주고 명례방(明禮坊) 김범우(金範禹) 집에서 집회를 가짐으로써 성직자를 모시지 못한 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그 후 이벽 · 이승훈 등 교회 중심인물들은 1786년에 성직조직에 관한 교리를 이해하고 교회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아래 가성직단을 조직하였다. 가성직단은 그 후 2년 동안 성무를 집행하면서 교회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곧 이와 같은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어긋난 비합법적인 교계제라는 이론(異論)이 제기되어, 이에 대한 지도와 재결을 북경 주교에게 문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북경주교는 평신도는 성세성사를 집전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혀, 가성직제도의 불가함을 알려 왔다. 이에 정식으로 교회예식에 맞는 성사 받기를 원한 조선 교회에서는 1790년 여름 신부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윤유일(尹有一)을 통해 북경주교에게 전달하였다. 이 같은 요청을 받은 구베아(Gouvea) 주교는 곧 신부를 보내줄 것을 약속하는 한편, 이 같은 사실을 교황 비오 6세에 전하였으므로 1792년에는 로마 교황청에서도 조선 교회의 탄생을 알게 되었다.
1791년 2월, 북경주교는 조선 교회와의 약속에 따라 마카오에서 자라난 레메디오스(dos Remedios) 신부를 보냈으나, 이 때 조선 교회에서는 조상제사 문제로 박해가 일어났으므로 약속대로 변문(邊門)에 그를 맞으러 갈 수가 없어서, 신부 영입은 허사가 되고 레메디오스 신부는 북경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조선 교회에서는 1793년에 다시금 윤유일, 지황(池璜)을 북경에 보내 주교를 만나보게 하였다. 조선 교회의 이 같은 거듭된 요청을 받고, 주교는 학문과 인품을 갖춘 조선 사람과 비슷한 풍모를 지닌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주문모 신부는 그 해 12월 말 국경을 넘어 무사히 서울에 잠입할 수 있었으므로 조선 교회는 비로소 목자를 갖게 되었다. 향후 7년간 그는 숨어서 힘쓰니, 조선 교회는 날로 발전해갔으나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주문모 신부마저 잡혀 순교하였으므로 조선 교회는 다시 목자 없는 교회가 되었다.
수많은 지도자와 신자를 잃은 조선 교회는 빈사상태에서 서서히 회복되어 1811년부터 권기인(權, 요한), 신태보(申太甫), 이여진 등 평신도 지도자들은 교회 재건을 위해 다시금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즉 1811년에 권기인 등은 북경주교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성직자를 다시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동시, 따로 교황에게도 조선 교회의 당면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따뜻한 동정 있기를 간청하는 서한을 보냈었다. 그러나 조선 교회의 이 같은 노력과 소원은 결실을 맺지 못한 채 1816년경부터는 정하상(丁夏祥)으로 성직자 영입운동이 이어진다. 정하상은 전후 15년 동안 9차례나 북경을 드나들면서 북경주교에게 직접 성직자 파견을 호소하였고, 별다른 효과가 없음을 보자 유진길(劉進吉) 등과 상의하여 천주교회의 수위권자(首位權者)인 교황에게 직접 청원키 위해 1825년 유진길이 한문으로 쓴 청원서를 발송하게 되었다. 이 서한에서 그들은 성직자의 파견만이 아니라 조선 교회에 대한 영속적인 대책을 강구해 줄 것을 아울러 요청하였다.
조선 교회의 이상과 같은 끊임없는 성직자 파견 요청에도 불구하고, 북경 교회가 성직자를 파견 못한 원인은, 때마침 북경 교회도 박해를 받아 성직자 부족으로 조선 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할 만한 여력이 없었는데 있었고, 한편 로마 교황청은 조선 교회로부터 여러 번의 간절한 청원을 접했으면서도, 프랑스대혁명의 여파와 포르투갈 보호권에 기인하는 포교상의 관할권 문제 등의 해결이 늦어져 조선 교회를 위한 조속한 대책을 강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1831년에 이르러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교회의 이같은 간절한 소망을 이해하고, 조선 교회를 독립된 교구로 설정하여, 그 포교사업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맡기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초대 교구장에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를 임명하고, 그의 조선 입국에 앞서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먼저 입국케 하였고, 곧 이어 1836년 모방(Maubant) 신부가 입국하고 1837년에 샤스탕(Chastan) 신부와 앵베르(Imbert) 주교가 연달아 입국함으로써 조선 교회는 창설 52년만에 비로소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어, 교회 창설이래 끊임없이 추진되어온 성직자 영입운동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참고문헌]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Paris 1874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