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라철학 [한] ~哲學 [라] Scholastica [영] Scholasticism [독] Scholastik [프] Scolastique

1. 문화적 배경 : 5~7세기에 걸친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인한 만족(蠻族)들의 침입과 정복은 문화적으로 커다란 공백기를 가져왔다. 서(西) 로마제국의 멸망 후 북방 민족들의 교화사업은 그리스도 교회의 손에 맡겨졌다. 특히 프랑크(Frank)족의 샤를르마뉴(Charlemagne, 742-814) 대제(大帝)에 비롯되는 계몽기(9세기)부터이다. 대제는 서방을 통일하고 서기 800년에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제왕의 관(冠)을 받았다. 그는 그의 광대한 제국을 문화적으로 재건함에 있어 수도자와 수도원들과의 협력에 힘입은 바 크다.

샤를르 대제는 교수들을 자기 판도내의 프랑크인들 중에서 얻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타지방, 특히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초빙하였다. 교육기관으로서는 왕실의 궁중 소속학교(scholae palatinaes) 그리고 주교좌소속학교(shcolae episcopales) 등이 있었으며 교수들은 모두가 성직자들이었다. 프랑크왕실의 궁중소속학교는 문과 양성을, 수도원과 주교좌소속학교는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일반인들에게도 교육을 실시하였다. 대제의 교육정책의 하나는 사본(寫本)을 많이 만들고 도서관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었다.

샤를르마뉴 대제 사후 제국은 다시 분할되어 약화되었으나, 스콜라철학이 주류가 된 중세철학(中世哲學)의 초기의 큰 논제는 보편(普遍)개념의 문제였다. 그리고 학제는 7인문학과(septem artes liberales) 제도였다. 이 7인문학과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문법(grammatica), 수사학(rethorica), 변증논리학(dialectica)의 3과(trivium)와 산술(mathematica), 기하(geometria), 천문학(astronomia), 음악(musica)의 4과(quadrivium)이었다. 자연과학(scienticae naturales)은 의학과 역사였으며, 다음에 철학(philosophia)이었다. 철학은 본래 인문학(人文學)에 속하는 것이며 12세기에 독립적 학문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다음엔 신학(theologia)이다. 신학은 계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나 많은 철학적 문제들도 논하였다. 중세의 교수방법은 주로 강의(lectio)와 토론(disputatio)이 그 기본 형식이었다. 강의는 교수가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것이었으며 교본(敎本)은 주로 어떤 명제집(命題集)이나 대가의 저서들이었다. 신학에서는 그 당시 주로 롬바르도(Petrus Lombardus, ?~1160)의 명제집을 사용하였고, 철학에서는 보에시오(Boetius)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사용하였다. 토론은,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 있었으며 찬반이 자유로운 토론이었다.

이와 같은 수업형태에서 스콜라적 저작형식이 발생하였다. 즉 숱한 강의에서는 수많은 주해서(註解書)들이 생겨났고, 또 주해서에서는 총집(總集) 혹은 대전(大全, summa)들로 발전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토마스 아퀴나스(Tomas Aquinas)의 ≪신학 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ae)이다. 이렇게 학문은 대체적으로 탐구되었으며 발전하여 갔다. 토론에서는 문제집이 생겨났다. 그것은 토론문제집(quaestiones disputatae)과 자유문제집(quaestiones quolibetales) 두 가지로 나타났다. 전자는 정기적 토론(disputatio ordinaria)이었으며 대개 연 1회 14일간 계속되는 것이었다. 이 토론에서는 일정한 주제를 가졌는데, 예컨대 진리론(de veritate). 능력론(de potentia), 악론(惡論, de malo) 등이다. 후자는 연 2회로 성탄절 전과 부활절 전에 이루어진 토론집이다. 이때는 주제가 일정치 않고 자유로워 무엇에 대한 문제이든(quaestiones quolibetales) 제한되지 않았다. 이런 토론은 찬(pro) · 반(contra)의 연속형식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하였다. 그밖에도 중세에는 한 문제를 주제로 한 소작품(opuscula)들도 있었다. 그리고 학문탐구의 방법은 경험 위주의 귀납적이기보다는 연역적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사변적으로 강력한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철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2. 일반적 성격 : 철학과 신학이 아직 구별되지 않고 혼합되어 논란되던 교부시기철학을 이어받은 스콜라철학은 점차로 학문의 진보에 따라, 신학과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긴 했지만, 신학에서 분리되어 철학 고유의 문제와 방법 등을 갖춘 독립과목으로 나타나게 된다. 스콜라철학이 주류가 된 중세철학은 그리스철학이나 그 명맥과 문제를 이어받아 서구화 되어간다. 그것은 처음에는 수가 적은 그리스 철학서를 통하여 주로 플라톤주의의 서적들과 접촉함으로써 초기에는, 예컨대 안셀모(Anselmus)에서와 같이 플라톤철학의 영향을 받은 셈이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를 계기로 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에 와서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런 문제사적(問題史的)인 관점에서 훑어본다면 그리스에서 발달한 자연(psusis)의 근원(arche)을 찾는 문제가 자연에서 인간으로 지식과 마음(psuche)을 거쳐서, 이데아(idea)와 실체(ousia)로 진전되어 드디어는 누스(nous)인 신(神, theos)에 도달하게 된다. 이 ‘신의 인식’을 꾀한 이가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노스(Plotinos, 204~269)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430)라면, 스콜라철학 시기에 들어와서는 그 ‘신의 존재 증명’에 관심이 쏠렸다고 하겠다. 플라톤주의의 영향하에 이를 시도한 것이 안셀모의 존재론적(혹은 본체론적) 증명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포섭하고 목적론적인 견지를 가미하여 종합적으로 신의 존재증명을 해놓은 이가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겠다.

3. 시기의 구분 : 중세철학사의 시대구분에 있어서 스콜라철학의 시기는 대개 3기로 나눈다. 9세기에서 12세기까지를 스콜라철학 초기, 또는 전기, 13세기에서 14세기 전반까지를 스콜라철학의 융성기(隆盛期) 혹은 중기,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에 이르는 동안을 스콜라철학 후기 또는 쇠태기(衰態期)라고 칭한다.

이상 각 시기에 나타난 철학자들을 열거한다면, 초기에는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 사라진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 810?~880?), 그의 주저로는 ≪자연의 구분에 관하여≫(De divisione naturae)를 들 수 있다. 다음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안셀모(1033~1109)인데, 그의 주저로는 ≪독어록≫(獨語錄, Monologion), ≪대어록≫(對語錄, Proslogion)을 비롯하여 ≪진리론≫(De veritate),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이 있다. 융성기에는 ‘보편적 박사'(Doctor universalis)의 존칭을 받은 이는 알베르투스 마뉴스(1206~1280)로, 그의 주저는 ≪피조물대전≫(Summa de creaturis)과 미완성작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이다. 이에 사사(師事)하여 나중에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의 칭호를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가 있는데 그의 많은 저술 중 저명한 주저로는 ≪이교도(異敎徒)에 대한 대전≫(Summa contra gentiles)과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의 대작이 있고, 이밖에 초기에 쓴 소논문, <유(有)와 본질에 관하여>(De ente et essentia)와 <진리에 관하여>(De veritate), <능력에 관하여>(De potentia) 등은 ≪정기토론 문제집≫(Quaetiones disputatae)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또 ≪자유토론 문제집≫(Quaetiones quodlibetales)이 있다. 그리고 ‘치천사’(Doctor Seraphicus)의 칭호를 받은 보나벤투라(S. Bonaventura, 1221-1274)로 그의 주저로는 ≪신(神)에 이르는 정신의 여정기(旅程記)≫(Itinerarium mentis ad Deum)를 들 수 있다. 다음엔 ‘정치(精緻)한 박사’(Doctor subtilis)의 칭호를 받은 둔스 스코투스(Johannes Duns Scotus, 1266-1308)가 있다. 그의 주저로는 ≪제일원리론≫(Tractatus de promo principio)이 꼽힌다. 그리고 후기에 접어들어서는 유명론자(唯名論者)로서 두각을 드러낸 오캄(Gulielmus Ockham, 약1300-1349)이 있다. 그의 주저로는 ≪7자유론집≫(Quolibeta septem), ≪논리학 총집≫(Summa totius logicae)을 들 수 있다.

4. 주제의 진전 : 중세철학의 주류가 된 스콜라철학에서 논의가 된 주요 제목 즉 주제(主題)는 역시 한마디로 ‘신앙과 지식’, ‘이성(理性)과 신앙’ 또는 ‘종교와 철학’ 혹은 ‘철학과 신학’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이 관계가 스콜라철학 초기에서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혼연(渾然)한 것으로 나오다가 융성기에 가서는 서로 부각되면서도 서로 보완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가 후기에 가서는 양자가 서로 대립 분리되어 ‘이중의 진리’(二重眞理)라는 설까지 나오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에리우제나는 철학을 신앙의 본질에 대한 성찰로 생각한 까닭에, 그에게 있어서는 신학함과 철학함이 본래 하나이고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참다운 종교는 참다운 철학이고, 또한 거꾸로 참다운 철학은 참다운 종교라는 것이 확실하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안셀모에 가서는 신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이성이 설 자리를 나름대로 인정하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믿기 위하여 이해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해는 신앙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에 있어서는 이성의 개입을 반대하는 자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우선 처음부터 굳은 신앙에 기초를 둔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믿는 바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나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는 첫째 이성에 의해서 논의하기에 앞서 우선 먼저 신앙하는 바를 믿는다는 것, 다음 둘째는 믿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이다. 그러니 신앙을 선행시키지 않은 것은 오만인 것이고, 반대로 이성에 호소하지 않는 것은 태만인 것이다. 그러니 이 어느 쪽 결점도 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에 가면 철학과 신학은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자기의 영역을 차지한다. 그는 이성과 신앙의 영역을 엄밀히 구별한다. 이성에 속하는 영역은 철학이고 신의 계시에 관한 신앙에 속하는 것은 신학이다. 따라서 철학적인 탐구는 이성에만 의거할 것이다. 그러나 이성에 의한 철학적 진리와 신앙을 통한 종교적 진리도 다 진리인 이상 궁극에 가서는 양자가 일치함에 이를 것이다. 우리의 이성으로써 추구해 갈 바는 삼위일체와 같은 계시의 내용이 아니고 신의 존재와 같이 논증(論證) 가능한 것뿐이다. 이같이 논증할 수 있는 것에 관해서는 믿는다기보다도 밝히 이해하는 편이 낫다고 하였다. 그런데 시제이 드 브라방(Siger de Brabant, 1235?~1282?)을 선두로 하는 라틴 아베로에스파에서는 아베로에스(Averroes, 1126~1198)에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이성에 따르는 것이었다. 이들에 의하면, 한편에서는 우주가 영원하고, 시간이 무시무종하다고 생각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앙에 의해서 우주나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도 승인되었다. 우리의 영혼에 관해서도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단 하나의 능동적(能動的) 지성만이 불사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동시에, 또 한편 신앙에 의하면 개인적인 영혼이 불멸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이와 같이 동일한 문제에 관해서 아주 상반되는 견해를 둘 다 함께 승인하려고 하는 데서 이중의 진리를 운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제이 드 브라방 자신을 단일하게 해석해 줄 수 있는 신앙을 따른다고 하였다.

5. 한국에의 전래 : 서울에 있는 가톨릭대학 신학부의 연혁을 보면, 충북 제천 ‘배론’에 ‘성요셉 신학교’를 창설한 것이 1855년, 강원도 원주군 ‘범골’에 신학교를 재건한 것이 1855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 1번지로 이전하여 ‘예수 성심 신학교’로 개칭하고 중등과 3년, 철학과 2년, 신학과 3년을 둔 것이 1887년 3월이라고 하였으니, 추측컨대 철학과 2년 과정에서는 중세철학과 아울러 스콜라철학이 강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1985년 8.15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에서도 중세철학의 강좌가 설치되었고, 이에 출강한 성직자는 정규만(丁奎萬) 신부와 황민성(黃旼性) 신부였다. (金奎榮)

[참고문헌] Frederick Copleston, A history of Philosophy, vol 2, 3, London 1959, 1960; Medieval Philosophy, New York 1961 / Cornelio Fabro, Storia della filosofia, I, Roma 1959 / Etienne Gilson, L’esprit de la philosophie medievale, Paris 1932(李孝祥 역, 中世哲學, 서울 東亞出版社, 1968) / La philosophie au moyen age, Paris 1952 / History of Christian Philosophy in the Middle Ages, New York 1954 / C1. Baeumker, Die Christliche Philosophie des Mittelaeters, vol. 3, 1923 / P. Vignaux, La pensee au moyen age, vol. 1, 1948 / M. Grabmann, Geschichte der Scholastischen Methode, vol. 2, 1909 / 鄭義采 · 金奎榮 共著, 中世哲學社, 志學社, 서울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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