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변화 [한] 實體變化 [라] transsubstantiatio [영] transubstantiation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빵의 온전한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도주의 온전한 실체가 그리스도의 피로 그 실존 양식이 변화되는 현상.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스콜라 학파의 유(有)의 개념을 성체론에 적용시킨 것으로 트리엔트 공의회(1551년)에서 교의로 선포된 것인데, 오늘날 이를 새롭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역사상 성체의 변화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랑프랑(Lanfranc of Bec, 1005~1089)을 비롯한 11세기의 일부 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 성과가 베렝가리오의 맹약(Jusjurandum Berengarius)에 반영되었고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에 의해 승인되었다(D. 430).

실체변화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12세기 중엽 롤랑(Roland Bandinelii)이었으나 베드로(Petrus Cantor)의 견해가 유력하여 13세기 중엽까지 영향을 미쳤다. 아직 전통적 의미의 질료와 형상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당시에 베드로는 본질적인 특성은 변화되지 않고 우유(偶有)의 바탕으로 남는다고 하였다. 고전적 실체변화 교리에 도달한 또 하나의 사고노선은 알란(Alan of Lille)에서 비롯하여 윌리암(William of Auxerre)을 거쳐 알렉산데르(Alexander of Hales)에 의해 계승되었다. 알란은 실체를 본질전체로 이해하고 실체변화에서 실체는 변화하는데 우유(accidentia)의 존재는 기적에 의해 설명되거나 부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데르는 형상과 질료로 구성된 실체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우유는 변화되지 않는 채 남는다고 하였다. 즉 실체변화는 적극적인 행위로서 이 행위에 의하여 하나의 현실적인 존재가 소멸됨이 없이 다른 현실적인 존재로 전체 실체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위클립에 반대하여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주장되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채택되었다.

트리엔트의 정의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견해가 갈린다. 공의회는 상징주의나 영성주의에 반대하여 ‘실존의 사실’을 옹호했을 뿐 ‘변화의 방식’은 긍정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해석과(E. Shillebeeckx), 이 해석에 반대하면서 공의회는 루터의 실체공존론(Consubstantiatio) 즉 빵의 실체가 그대로 있고 빵과 더불어 빵 안에 그리스도의 몸도 실체적으로 현존한다는 교리에 반대하여 변화방법까지도 직접 긍정하였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 논의의 실익은 공의회가 직접 긍정하지 않은 사항은 새롭게 이해할 여지가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를 취하면서도, 스콜라학적 자연철학에 바탕을 둔 변화방법에 대한 설명은 그 바탕이 쇠퇴일로에 있는 오늘날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전자의 견해에 찬동하는 학자들도 많다.

변화방법을 실체변화로 설명하는 것이 현대 자연과학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는, 크기나 색체 등 우유는 실체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했는데, 변화 후 빵의 실체는 없으면서 빵의 크기나 색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실체변화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무기체의 영역에서 취한 기본개념인데 스콜라철학이 이를 차용하여 구성한 것이므로 비인격적인 인상을 준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성체의 변화를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히 네덜란드 출신 신학자들의 공헌이 크다. 그들의 입장은 다양하나 한결 같이 실존사실을 전제로 한다. 스미드(L. Smith)는 현상학적인 접근방법을 택하고 실레벡(E. Schillebeeckx)은 존재론과 노선을 같이 하나, 그들은 모두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의미변화(transsignificatio) 또는 목적변화(transfinalizatio)의 개념을 선택하는 데에 일치한다.

성체성사를 설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을 가르칠 뿐 현실적인 변화의 과정을 해석하는 지침을 주지는 않는다. 오늘날 신학자들이 실체변화를 새롭게 이해하는 관점은 다음과 같다. 즉 빵의 실체와 의미와 목적은 동일하다. 그러나 한 사물의 의미는 그 재료를 손상함이 없이 변화될 수 있다. 한 채의 집은 재료들의 정돈으로 이루어져 그 본성과 목적을 지니나, 허물어져 그 재료들이 교량 건설에 이용되면 본성과 본질의 변화가 일어나 의미가 달라진다. 집은 사는 곳이나 교량은 낮은 곳을 건너가는 수단이다. 그러나 재료의 손실은 없다. 이와 유사한 측면으로 생각해보면, 빵과 포도주를 들고 축성했을 때 의미가 변한다. 지상의 음식과 음료만을 의미하던 것이 이제는 예수의 현존을 의미한다. 우리가 보는 것의 목적도 변한다. 자연적 육체의 생명에 봉사하는 지상 음식의 목적이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기르는 목적으로 변한다. 이는 빵 안에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나 있음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Engelbert Gutwenger, Transubstantiation, Sacramentum Mundi, Burns & Oates, 1968 / 김영환, 성체 안의 그리스도 현존과 봉헌, 司牧, 65號.

이 글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