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데르 [라] Alexander [관련] 문예부흥기교황

Alexander, 3세(1105∼1181). 교황(재위 : 1159~1181). 본명은 Orlando Bandinelli. 이탈리아의 시에나(Siena) 출신으로 교회법학자였다. 볼로냐(Bologna)대학 교수, 부제추기경(1150년), 사제추기경(1151년), 교황 비서국장(1153년), 교황사절 등을 거쳐 교황으로 선출되어 하드리아노(Hadrianus) 4세를 계승하였다. 재위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Friedrich, 赤髮帝)가 교황 선거에서 소수파였던 옥타비아노(Octavianus)를 후원하여 빅토리오(Victorius) 4세로 즉위시키자 17년간의 이교(離敎)시기를 맞게 되었으며 교황은 대부분 프랑스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이 이교는 1177년 베네치아 화약으로 종결되었다. 또한 망명한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 베케트(Thomas Becket)를 보호해 준 사건으로 영국왕 헨리(Henry) 2세와 외교적 분쟁이 야기되었으나 이것도 무사히 종결되었다.

그는 속세의 통치자들에 대하여 교황으로서의 수위권을 주장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그레고리오(Gregorius) 8세로부터 인노첸시오(Innocentius) 3세에 이르는 시기의 교황권의 신장(伸張)과 강화라는 전체적 분위기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나, 교회 내에서의 교황권을 수호하는 데에서는 매우 단호하였다. 위의 사건들은 왕국 내에서의 교회의 적법한 권리에 대하여 교회법학자로서의 매우 조심스러운 관심과 왕권의 발달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그의 깊은 안목을 보여 준다.

재위 기간 중의 이러한 일련의 위기들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교회 발전에 뚜렷한 여러 업적을 남겼는데, 1179년에는 제 3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고 이를 주재하였으며 십자군 원정의 찬조금을 모으기 위해 <십자군대칙서>(Bulla Cruciata)를 발표하였다. 또한 학자로서는 <그라시아노 법령>(Decretum Gratiani)에 대한 주석과 신학적 저작인 ≪Sententiae Rolandi≫로 유명하다.

Alexander, 6세(1431?∼1503). 교황(재위 : 1492∼1503). ⇒ 문예부흥기교황

Alexander, 7세(1599∼1667). 교황(재위 : 1655∼1667). 원명은 Fabio Chigi. 오랜 명문인 이탈리아 시에나(Siena)의 키지(Chigi)가(家) 출신. 시에나대학에서 9년간 수학 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1626년), 교황청의 사절로 일하면서 교황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쾰른에서 교황대사로 13년간 근무하고 뮌스터(Munster) 평화회담 때는 교황사절로 참가하였으며, 교황청 성성장관을 거쳐 인노첸시오(Innocentius) 10세 서거 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열심한 교황이었던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王家)를 약화시키려는 부르봉왕가의 야심찬 루이 14세 때문에 정치적 곤란을 겪기도 하였으나 ‘5개항’을 단죄한 선왕의 입장을 계승하여 얀센의 이단을 단죄하고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의 개종을 포함하여 선교활동을 장려하였으며 이를 위해 포교성성(布敎聖省)에 보다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예술의 수호자로서 베르니니(Bernini)의 대주랑(大柱廊)의 건설에 기여하였으며, 학문을 장려하여 사학자들을 위해 교황청 고문서실의 열람을 가능하게 하였다. 자비로운 교황이었던 그는 1656년 흑사병이 로마를 강타하자 빈자(貧者)들을 힘써 돕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1656년 중국 의례금지를 완화함으로써 예수회의 적응주의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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