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본당 [한] 陽智本堂

주보로 ‘매괴’를 모시는 이 본당은 1927년 9월 14일 박동헌(朴東憲, 마르코)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유서깊은 교우촌인 은이의 퇴락한 공소강당을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龍仁郡 內四面 南谷里) 벌터로 옮기어 16간의 목조 성당을 축성함으로써 창설되었다. 미리내본당의 공소로부터 승격된 이 본당의 박 신부는 1929년 1월 이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70명의 교우를 인솔하여 미리내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참배하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박 신부는 보수적인 기질이 짙은 이 지방에서 효과적인 전교를 위하여 남녀노소의 특성에 따라 여러 단체를 구성하여 신앙심을 길러주었다. 일요일은 소년단체, 화요일 남자청년, 수요일 소녀단체, 목요일은 여자 노인, 금요일 남자노인, 토요일 여자청년 등 6개 단체를 구성하여 신심운동을 일으켰다. 1934년 8월에는 또 지방민의 지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해성의숙(海星義塾)을 개설하여 교육에 힘쓰는 한편 큰 첨례(대축일) 때에는 재미있는 교리토론으로 은연중 교리공부가 되도록 환경을 조성하였다. 그 결과 이 본당의 신자는 나날이 증가추세를 보여 1939년에는 성당을 40평 가량 증축해야만 되었다. 이 때 박 신부는 교우들의 앞장을 서서 손수 터를 닦고 돌을 날라 담장을 쌓은 것이 후일 돌무더기 성당으로 이름난 연유이다.

1941년 7월 2일 본당신부로 프랑스인 프로망투(Fromentoux, 包萬壽) 신부가 부임하였으나 전쟁중이라 일제의 제약을 받아 사목활동이 어려웠다. 8.15광복 후 1947년 9월 6일 교우들은 이 고장과 인연이 깊은 김대건 신부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벌터에 김대건 신부의 기념경당(紀念經堂)을 건립하였다. 1948년 이완성(李完成, 요한) 신부가 3대 주임으로 부임하자 배매실[南谷一里)에 있는 일본인 다까하시(高橋) 소유이던 주택과 대지 등 귀속재산을 불하받아, 창고를 개조하여 벌터로부터 성당을 옮겨왔다.

1951년 4월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조인환(曺仁煥, 베드로) 신부는 원만한 성격에 사랑을 기조로 사목하였기 때문에 성당을 찾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 1953년 말에는 신자수가 3,039명에 달하였다. 조 신부는 숙제인 성당신축을 위하여 교우들의 성금을 모으고, 미군부대의 원조를 얻어 1955년 4월 19일 78평의 현대식 성당을 축성 봉헌하였다. 1959년 용인본당을 분할하고 명칭을 양지본당으로 바꾸었다. 그 뒤 5대 정원진(鄭元鎭, 루가) 신부를 거쳐 6대 정주성(鄭周成, 요셉) 신부가 재임하던 1962년 9월 20일에는 김대건 신부의 모친인 고(高) 우술라가 살고, 김대건 신부가 순교 전 최후의 미사를 드린 골짜기에 김신부상(金神父像)을 건립하여 제막식을 가짐으로써 이 유적지는 성역(聖域)으로 오늘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7대 주임은 손태섭(孫泰燮, 마르코) 신부, 8대는 유봉구(柳鳳九,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맡았고, 1980년부터 9대 주임으로 한봉주(韓鳳株, 클레토) 신부가 본당을 맡고 있다. 한 신부는 사목활동에 힘쓰는 한편 골배마실 김대건 성인 사적지의 성역화 작업에 젊음을 불태우고 있다. 현재 이 본당의 신자수 1,547명에 13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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