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옹진군 옹진읍 온천리(溫泉里)에 이 본당은 자리잡고 있다. 1899년 10월 신천(信川)의 청계동(淸溪洞)본당의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가 옹진 본영(本營, 현재 北面 花山里)에 첫 공소를 열었다. 옹진지방은 청계동본당에 이어 장연(長淵)본당, 그리고 해주(海州)본당으로 그 관할 본당이 바뀌었다. 1939년 7월 해주본당 관할의 화산리(花山里)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고, 강원도 평강(平康)본당의 김피득(金彼得, 베드로)신부가 초대 사제로 부임하였다. 김 신부는 얼마 후 옹진읍내 중심지인 온천리에 성당과 신부댁을 마련하고 본당을 이전하였다. 1942년 김 신부가 강원도 이천(伊川)본당으로 전임된 후 옹진본당은 신부를 배정받지 못해 다시 해주본당 신부의 겸임관할을 받다가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8.15 광복과 함께 옹진읍 40리 북방에 38도선이 그어짐에 따라 옹진본당은 남한땅에 속하게 되고, 그 해에 신부가 공석중이던 옹진본당의 사제로 서울 주교관에 근무하던 방영석(方永錫, 요셉) 신부가 파견되었다. 방 신부는 1947년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서울 성모병원에 입원하게 되자(그해 12월에 사망), 1947년 5월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부드(W. Booth, 夫), 치셤(D. Chisholm, 池) 두 선교사가 본당신부로 파견되어 전교하다가, 1948년 5월 부드 신부는 평택(平澤)본당 신부로 가고, 치셤 신부는 서울 주교관으로 전출하고, 후임으로 4대 유봉구(柳鳳九, 아우구스티노)신부가 부임하여 1950년 5월까지 재임하였다. 유 신부의 주요 일과의 하나는 전교활동 외에, 옹진 경찰서로 가서 월남하다 잡힌 교우들을 천주교 신자임을 확인해서 신원보증을 해주어 석방시키는 일이었다. 5대 이계광(李啓光, 요한) 신부는 부임한지 2개월도 안되어 6.25전쟁을 겪게 되었다. 6월 25일(일요일) 아침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데 성당 마당에 적의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이 신부는 성체를 급히 처리한 후 피난길에 올라 40리 떨어진 사곶리[沙串里]공소로 가서 그곳 도선장(渡船場)을 떠나는 후퇴 경찰관들이 탄 목선에 몇몇 신자들과 함께 편승하여 무사히 인천에 상륙하였다. 그 뒤 옹진읍은 1953년 7월 한국전쟁의 휴전 때 휴전선 이북에 속하게 되어 옹진본당도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