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인내는 현재의 재난이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인내는 다른 모든 덕을 성취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으로 현재의 악(惡, evil)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하느님의 뜻대로, 슬퍼하고 불평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참고 견디는 덕행이다. 특히 용덕(勇德)의 한 형태로 간주된다. 인간이 자연적인 선(善)과 덕(德)을 얻기 위해서 현재의 곤란을 참게 하는 인내는 성취되어지는 덕이다. 이에 비해 성화은총(聖化恩寵)은, 성화되고 하느님과 일치하고픈 열망에서 고난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견디게 하는, 초자연적인 인내를 불러일으킨다. 이 초자연적 인내는 참된 기쁨을 준다. 성인(聖人)들은 인내로 인해 가장 높은 정도의 기쁨을 맛보았다.
인내는 성서에 사용된 두 측면의 인내를 근거로 한다. 즉 ‘자기 억제’([그] makrothnmia)와 ‘적극적으로 참고 견딤’([그] upomone)이다. 전자는 자제하여 화를 내지 않는 것으로, 자비와 연민과 관계되며 하느님과 인간과의 양자에 해당된다. 하느님은 “분노에 더디시며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출애 34:6)으로 인간이 회개하기를 오래 참아 주시는 분이시다(시편 78:38-39, 103:8, 지혜 11:23, 12:8-10, 로마 2:4-5, 1베드 1:6). 또한 전자의 인내는, ‘성령의 열매’(갈라 5:22)로 믿음을 정화시키고(1베드 1:6) 희망을 길러주며(로마 8:25, 15:4) 완덕으로 이끄는(야고 1:4) 것으로 특히 하느님의 일꾼으로 일하는 이들에게 인내를 권고하였다(1디모 6:11, 2디모 2:24, 3:10).
이에 비해 후자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이 강조되어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진다. 구약에서 야훼는 ‘이스라엘의 희망’(예레 14:8, 17:13)이라 불려졌고 신약에서 그리스도는 고통을 견디는 인내만이 인간의 삶을 열매맺게 할 것이라 하였다(루가 8:15). 그래서 성 베드로는 부당한 고통도 견디라고 권고했고(1베드 2:19-30), 성 바울로는 고통 속에서 오히려 기뻐하였다(로마 5:3, 1고린 4:12, 2고린 1:6). 현세에서 신자들의 삶은, 위대하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복된 희망의 날(디도 2:14)을 기다리는 인내의 삶이어야 한다. 끝까지 참는 자만이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10:22).
인내는 보편적이고 겸손하며 초자연적이라는 세 특성을 갖는다. 즉 인내는 어떤 이유에서 생겨나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모든 종류의 악을 견딘다. 인내는 부당함을 불평하거나 관심과 동정을 구하지 않을 때 겸손하다. 인내는 애덕으로 성취돌 때 초자연적이다. 한편 인내에 반대되는 것은 ‘무감각증’과 ‘참지 못함’이다. 전자는 감정의 부족을 말하며 자신과 타인의 고토에 냉담하게 만든다. 후자는 덕의 성취에 필수불가결한 곤란을 참는 것을 거절하여, 외적으로는 분노와 불평, 좌절 등으로 나타나며 내적으로는 시련에 대한 반감과 지나친 자기 방어로 나타난다. 이 두 악덕(惡德)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하게 하여 커다란 기쁨과 행복의 전주곡이 되는 고난과 슬픔을 회피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인내는, 내적 불평 없이 곤란을 견디는 것, 곤란을 덕의 진보로 사용하는 것, 하느님 사랑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열망하여 영신적 기쁨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것 등의 세 단계를 거쳐 나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