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노첸시오 [라] Innocentius

Innocentius, 1세(?~417). 교황(재위 : 401~417). 이탈리아 알바노 태생. 고대 교황 중에서 가장 유능한 교황의 한 사람이며, 교황권의 확대 강화를 꾀하였다. 로마교회는 사도 베드로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이므로 모든 교회가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첫째로, 지방교회 회의에서 파면당한 성직자(聖職者)도 교황청에 상고(上告)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오크회의(403년)에서 파면당한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크리소스토모(Joannes Chrysostomus)의 상고를 수리(受理)하여 그를 옹호하였다. 둘째로, 교황에게는 새 교회직무를 창설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 데살로니카의 부주교(副主敎)를 교황 대표자로 지정하였다. 셋째로, 교리에 관한 최종결정권을 교황에게 귀속시킴으로써 이단(異端)인 노바시아누스주의를 억압하고, 또한 로마황제 호노리우스로 하여금 도나투스파(派) 금지령(404년), 마니교도 · 몬타누스주의 · 프리실리아누스파(Priscillianism) 금지령을 반포케 하였다. 또한 펠라지우스(Pelagius) 배격에 관한 카르타고회의의 결의에 허가를 내렸다. 이보다 앞서 서(西)고트왕 알라리쿠스(Alaricus)와 로마황제를 화해시키려고 수도 라벤나에서 교섭 중에 있을 때 로마는 알라리쿠스에게 공략당했는데(410년), 이것은 이교 로마에 대한 신(神)의 심판으로 간주되어, 교회는 그 후에 오히려 융성하게 되었다.

Innocentius, 3세(1160~1216). 교황(재위 : 1198~1216). 원명 Giovanni Lotario de Conti. 트라스문드 백작의 아들. 교황 글레멘스 3세의 조카. 이탈리아의 아냐니 태생. 로마, 파리, 볼로냐에서 공부하고, 글레멘스 3세의 서거로 추기경이 되었다(1190년). 교황 첼레스티노 3세의 뒤를 이어 37세의 나이로 교황이 되어 18년간 절대적 권위를 떨쳤다. 성 그레고리오 7세(재위 : 1073-1085)의 교권 절대주의사상을 이어받아 세속군주 및 국가를 억누르고 교황청의 강화를 꾀함으로써 교황 정치는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또한 교황령의 실지 회복에 힘써 루마니아지방을 교회직할로 하고, 안코나, 토스카 등지도 그 소속령으로 넣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자칭한 최초의 교황이며, 교회뿐 아니라 국가의 정치도 지배할 권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 그 이념에 입각해서 전체 유럽 여러 나라의 국정에 간섭하였다. 즉, 독일황제의 황제위를 둘러싼 분쟁 때(1198년), 황제의 선거권은 각 선거후에게 있으나, 교황은 ‘선출된 사람을 조사할 권리와 권위’(ius et auctoritas examinan야 personam electam)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적극적으로 간섭하여, 오토 4세를 도와서 그를 로마에서 대관(戴冠)케 하였다(1209년). 그러나 오토 4세가 교황과의 약속을 어기고 이탈리아령(領)을 요구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자신의 피후견인(被後見人)인 프리드리히 2세를 황제로 앉혔다(1215년). 또한 프랑스왕 필립 2세의 이혼문제에 간섭하여 이혼한 왕비 덴마크의 잉게보르크의 복연(復緣)을 강제로 실현시켰다(1200년). 또 자기가 임명한 캔터베리 대주교 랭튼(Stephen Langton)을 거부한 영국의 존 왕을 파문(1213년), 교황의 지상권을 인정케 하고 신종을 맹세케 한 다음 그 죄를 용서하였다. 교황의 권력은 스칸디나비아, 스페인, 발칸, 키프로스, 아르메니아에까지 미쳤으며, 유럽 전체에 있어서의 정치적인 여러 권력위에 교회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또한 제4차 십자군(1202-1204년)을 추진해서 콘스탄티노플을 그리스에서 탈환(1204년), 라틴제국을 건설하였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를 개최하여 발두스파(派) 및 알비파를 배격, 프란치스코회 및 도미니코회의 창립을 공인(公認), 구(舊)수도회를 개혁하였다. 이 회의에서 교회의 수령으로서 교황의 위치가 확립되어, 교무(敎務)와 정무를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정의의 왕’ 즉 멜키세덱으로 상징되는 왕인 제사(祭司)의 이념을 실현시켰으며, 중세 교황권의 전성기를 초래하였다.

Innocentius, 4세(?~1254). 교황(재위 : 1243~1254). 1200년 제노아에서 태어나 볼로냐에서 교회법 교수로 명성을 얻었다. 1227년 추기경이 되었고, 1243년 약 18개월간의 공위(空位) 기간 끝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재위는 황제와 교황 사이의 분쟁의 최정점을 기록하였다. 즉위 즉시 프리드리히 2세와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가 없자, 1245년 리용 공의회에서 황제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1254년 콘라드(Conrad) 4세의 사망 후에 비로소 교황과 제국 사이의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는 재위기간 중 루도비코 9세에 의해 영도되는 새 십자군(1248년)을 소집하여 타타르족에게 공격받는 동로마제국을 위해 몽고제국의 칸(Khan)에게 사절을 파견했으며(1245년) 그리스 정교회와 협상을 벌여 그의 생전에 동방이교(離敎)가 종식되는 듯이 보였다. 또한 누미디아(Numidia)와 이디오피아에 사제를 파견함으로써 선교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대칙서 (1252년)에서 이단심문시의 고문을 허가하기도 하였다. 그가 쓴 ≪교령집에 대한 주석≫은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

Innocentius, 10세(1574~1655). 교황(재위:1644-1655). 원명 Giovanni Battista Pamfili. 로마 태생. 교황청 요직을 역임, 추기경을 거쳐 우르바노 8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자 교황청에서 바르베리니(Barberini)가(家) 세력을 몰아냈다. 포르투갈의 독립을 반대하고, 베스트팔리아의 화약(和約)에 항의하여 교회재산의 보전에 힘썼으며, 터키인(人)의 공격에 대해 베네치아를 도왔다. 또한 대칙서(1553)를 발표하고, 얀센(C.O. Jansen)의 ≪아우구스티누스≫ 속의 5개 주제(主題)를 비난하여 프랑스 및 벨기에에서의 얀센주의 논쟁을 촉진시켰다. 1645년 중국에서의 적응주의를 금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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