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손을 펴시오”
-손을 뻗어라-
1. 말씀읽기: 루카 6,6-11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 (마태 12,9-14 ; 마르 3,1-6)
6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 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2.말씀연구
오그라든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편협하게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마음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남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너그럽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나 또한 그렇게 봐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 이 불편한 사람들. 그들의 바람이 있다면 낫는 것 보다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시선을 받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늘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저 몸이 조금 불편한 것뿐인데. 폭소클럽에서 “바퀴달린 사나이”가 휠체어를 타고 나와서 당당하게 사람들을 웃기는 것을 봤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다리가 짧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그들이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판단 받았습니다. 몸이 불편한 것도 서러운데 그런 시선까지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치유해 주십니다. 오늘도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6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 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만나십니다. 왜 오그라들었을까요? 너무 잡으려고만 해서 오그라들었을까요? 아니면 너무 많이 퍼 주기만 하니 좀 움켜잡으라고 오그라들었을까요? 정상적인 몸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그는 손이 오그라들어서 괴로워하면서 살았습니다. “병신”이라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고, “죄인”이라는 소리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리들은 결국 그를 공동체에서 소외시키고 그는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손이 오그라든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상황에서 오그라든 손을 가진 사나이가 치유를 청하든가, 아니면 청하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증오에 찬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떤 트집이라도 잡아 비난할 구실을 찾아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회당의 가르침에서는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만 안식일의 치료가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위험이 없을 경우에는 치료는 물론 간호를 해서도 안됐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자신들의 아픔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신들이 그렇게 어려움에 처했다면 과연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에 관계된 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나의 일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성당에서 아이가 놀다가 팔이 부러졌습니다. 아버지는 미사 중에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황급히 갔습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팔이 부러졌으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단다. 그러니 내일 병원에 가자!”라고 말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자식이 그랬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십니다. 분명 고쳐 주시려 하심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도 나오라고 하십니다. 나를 고쳐 주시기 위해…, “예”하고 일어나 주님께로 가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자신이 병자임을 알고 있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병자임을 알지 못합니다. 마음이 오그라들었기에 그렇게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오그라든 나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내 오그라든 마음을 펴 주시려고……,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예수님의 관심사는 “안식일에 일을 해야 되냐? 말아야 되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의 목숨을 구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고집을 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해야 마땅합니다.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사랑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도 나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던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시기에 그런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동물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릅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생명을 바라보지만, 그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사물로서 바라봅니다. 다친 너구리를 발견한 사람들의 태도를 생각해 봅시다.
“야! 저거 몸에 좋으니 잡아 먹자….”
“불쌍하다. 동물 병원에 데려다 줘야겠어. 어미 같은데 새끼들이 불쌍해….”
성지순례를 가서 참 좋은 풍경을 보았습니다. 아이 둘이 있었는데 빵을 남겨서 항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개나 고양이에게 주었습니다. 남을 생각해 줄 줄 아는 마음이 너무도 예뻤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을 고발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십니다.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손을 뻗어라” 그러자 그의 손이 다른 손과 같이 성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위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하지만 고지식한 율법주의로 눈이 먼 그들은 그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취한 행동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없애 버릴까?”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없애버릴까를 고민하는 사람들. 옳은 일을 옳은 일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이 너무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도 불쌍한 사람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신이 치유 받았다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자신의 아이가 치유 받았다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그런데 남의 고통은 관심이 없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 그래서 삐뚤어지게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불쌍한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의 하나가 나 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모습.
3. 나눔 및 묵상
1.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비교하면서 어떤 것이 더 크게 다가오는지 이야기 해보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입장을 이야기해 봅시다.
2. 주일을 지킨다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봅시다. 주일 미사에 참여함으로써 주일의 의무를 올바로 지키고 있는 것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