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릴로 [라] Cyrillus [관련] 메토디오

① 알렉산드리아의 ∼(C. Alexandrinus, ?∼444). 성인. 교부(敎父). 교회학자. 412년 삼촌 테오필루스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으며 그리스도론의 올바른 정립을 위하여 전생애를 투신하였다. 특히 네스토리우스의 오류를 지적한 에페소 공의회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치릴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하여 그 곳에서 성장, 교육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집트의 이시도로는 그가 잠시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지만 역사적 신빙성은 없다. 403년 삼촌인 테오필루스를 따라 콘스탄티노플에 가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단죄한 케르치아(Quercia) 시노드에 참석하기도 했으며 417년까지는 테오필루스의 노선을 따라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반대하였다. 그는 또한 정열적 인물로 유대의 노바시아니즘을 거스려 활약했고 당시의 집정관 오레스테스(Orestes)와 마찰하여 위협과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후반기 생애는 그리스도론의 정립을 위해 몸 바치는 시기이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인양성(神人兩性) 문제로 고심하던 중 그 나름대로 조화를 꾀하여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칭할 때 ‘천주의 모친’(Theotokos)이나 ‘인간의 모친’(Anthropotokos)이란 칭호를 피하고 중용을 취하여 ‘그리스도의 모친’(Christotokos)이라 부르기를 주장하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신학논쟁이 되었으며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위격(位格)을 신격(神格)과 인격(人格)의 둘로 보았기에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 될 수 없다는 논증을 펼쳤다.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단죄되었고, 이 논쟁은 치릴로의 승리로 끝났다. 이 교의문제는 또한 황제의 개입 등 정치성과도 많이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은 네스토리우스의 주장과 같이 공존(共存), 내재(內在) 등 외면적 관계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일치, 즉 본체적 내지 위격적 일치(unio hypostatica)로서 교회의 정통교리를 확립시키는 획기적인 공헌이었다. 축일은 6월 27일이다.

② 예루살렘의 ∼(C. Hierosolymitanus, 315?∼397). 성인. 주교(349∼387). 교회학자. 315년경 예루살렘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소년기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349년 막시모(Maximus)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의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체사레아의 주교인 아리안파의 아카치오(Accacius)로부터 서품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오랫동안 아리안파 또는 반(半)아리안파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후기학자들의 증언과 치릴로 자신의 저술과 생활로 해명되고 풀리게 되었다. 사실 그는 오히려 아리안파인 아카치오와는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반대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세 번씩이나(357년, 360년, 367∼378)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387년 3월 18일이 사망일로 추정되어 이날을 축일로 정하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는 ≪예비자교리≫가 가장 유명하다. 이 작품은 예비자들과 새 영세자들을 위한 일종의 신앙과 생활의 지침서로 교의 및 전례적으로 중요한 문헌이다. 그는 또한 니체아 공의회의 신앙고백인 성부나 성자의 본체적 일치 또는 동체성(consubstantialtus)을 고백하여 아리안파의 양자설(養子說)을 배척했으며 성부와 성자와의 일치를 성신께 연결시켜 성삼교리의 설정에 큰 공헌을 하였다.

③ 데살로니카의 ∼(C. Thessaloniae, 827∼869). 성인. 축일 2월 14일. 역시 성인인 형 메토디오(Methodius, 816?∼885)와 함께 슬라브족 포교의 사도. 형제 모두 그리스 데살로니카의 명문에 태어나 치릴로는 로마에서 별세하였다. 치릴로의 원명은 콘스탄티노(Constantinus). 콘스탄티노플에서 학업을 마친 후 철학 · 신학을 가르쳤다. 863년 이후 형 메토디오와 함께 동방교회로부터 파견되어 모라비아지방의 슬라브족 전도에 종사, ‘슬라브인의 사도’라 불렸다. 이들 형제는 슬라브적인 것을 예배에 채택함으로써 두드러지게 전도효과를 올렸다. 치릴로는 슬라브 교회용어의 기초가 된 구(舊)슬라브어 알파베트, 즉 글라골(Glagol) 문자를 고안, 슬라브문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867년 동서교회 분열로 인해 슬라브 세계가 양분(兩分), 불가리아는 비잔틴에, 모라비아는 로마에 귀속하게 되었을 때, 형제는 로마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그들은 크리미아 반도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글레멘스의 유물(遺物)을 로마로 가지고 가서 후대를 받았다. 그러나 치릴로는 얼마 후 로마의 수도원에서 병몰(病沒)하였다. 메토디오는 그로부터 16년간 치릴로의 유업(遺業)을 계속하는 한편, 그 자신을 하드리아노 2세에 의해 시르미움(Sirmium, 현재 유고슬라비아의 Sremska Motrovica)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870년 바바리아의 주교들에 의해, 그들의 권한 침해를 이유로 체포, 3년간 수도원 내에 감금당하였다. 882년에서 885년 사이에 그는 동로마황제 바실리우스 1세 및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시오(Photius)의 초청을 받고 콘스탄티노플에 다녀왔다. (⇒) 메토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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