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경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604 혹은 605)에 의해 창설된 옛날 영국의 중요한 수도대교구(首都大敎區). 그레고리오 대교황에 의해 파견된 그는 교황이 지목한 런던 대신에 국왕 에델버트(Ethelbert)가 이미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가장 강력하고 개화된 앵글로색슨 왕국의 수도를 남부영국의 수도 대교구좌로 선택하였다. 캔터베리는 그 자체가 로마식 도시로서 교계조직이나 건축 등이 로마의 축소판이었다. 캔터베리교구는 동부 켄트와 그 주변부로 구성되어 항상 작았지만 그 관구는 웨일즈를 따라 험버(Humber) 지역에 이르는 전 남부를 포괄하게 되었다.
653년까지 캔터베리는 아우구스티노와 이탈리아인 동료들인 라우렌시오(Laurentius), 멜리토(Mellitus), 유스토(Justus), 호노리오(Honorius) 등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첫 앵글로색슨 대주교로는 프리토나스(Frithonas, 재위 : 655∼664)였고, 테오도르(Theodore, 668∼690) 대주교에 의해 영국교회의 중심지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802∼803년에 걸쳐 수도 대교구좌로서의 캔터베리의 수위성(首位性)이 교황과 관구공의회에 의해 인정되었다. 9세기 노르만 침입으로 첫순교자인 대주교 성 알페즈(St. Alphege)를 낳았다. 노르만 정복 이후 란프란크(Lanfranc, 1010?∼1089)와 같은 대주교의 지도로 국왕들과의 긴밀한 연결 속에서 수도원 및 교회개혁을 단행하여 다른 수도원들의 귀감이 되었다. 안셀모(Anselmus, 약 1033∼1109) 대주교는, 월리엄 2세 및 헨리 1세와 서임권을 둘러싼 논쟁을 벌였으며 클래렌던 헌법에 대한 성 베케트(St. Thomas Becket, 118?∼1170)와 헨리 2세 사이의 논쟁은 결국 전자의 순교를 초래, 캔터베리의 중심적 위치를 확인시켰으며 베케트의 묘소로의 순례여행은 중세에 큰 인기를 끌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한 랭턴(Stephen Langton)의 임명으로 종결된 선거(1205∼1207년)는 영국 교회사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다. 그 이후 성 에드문드(St. Edmund of Abingdon), 보니파시오(Bonifatius of Savoy), 킬와르드비(Robert Kilwardby), 페컴(John Peckham), 로베르토(Robert of Winchelsea) 등의 훌륭한 주교들이 출현하여 라테란(1212년), 1, 2차 리용(1245, 1274년) 등의 개혁 공의회에서의 헌장발표에 크게 기여하였다. 14∼15세기 주로 귀족 출신이었던 대주교들이 교회에 대한 왕권 강화에 힘쓰는 반면에 정치에 간여, 왕의 주요한 반동적 충고자였던 시몬(Simon of Sudbury, 재위 : 1375∼1381) 대주교는 농민봉기 때 폭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16세기 헨리 8세와 가타리나(Catherine of Aragon)의 결혼이 교황에 의해 지지받은 뒤 왕의 앞잡이였던 대주교 크랜머(Thomas Cranmer, 재위 : 1533∼1556)는 교황의 허가를 무효로 선언,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고 국왕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라는 이단적 교리를 세웠으며 이에 따라 모든 수도원과 성당이 폐쇄되고 교구의 장원은 국왕에게 넘겨졌다. 그 뒤 메리 튜더(Mary Tudor, 재위 : 1553∼1558)의 즉위로 로마가톨릭이 부활되고 추기경 폴(Reginald Pole)이 대주교이자 교황대사로 임명되었으나(1556∼1558) 이들의 죽음으로 가톨릭으로의 복귀 희망은 영원히 사라졌다. 엘리자베드 1세(1558∼1603)는 수위헌장과 기도방식 통일법령을 부활시켰으며 캔터베리는 영국 성공회의 사령탑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