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사제. 교회학자. 축일은 1월 28일이다.
1. 생애 :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 나폴리에 가까운 로카세카(Roccasecca) 성에서 1224년말이나 1225년초에 태어났고 부친은 아퀴노의 백작이었다. 다섯 살 때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 학생으로 그의 학문을 시작하였다. 1239년 14세에 나폴리대학으로 옮겨, 1244년에는 나폴리의 도미니코 탁발수도원에 입회하였다. 1245년에 파리로 가서 1248년까지 있었고, 같은 해에 알베르토(Albertus Magnus)를 따라 쾰른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때에 그는 스승 알베르토의 영향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자기 철학이나 신학적 도구로 받아들였다. 1252년부터 파리에서 성서와 롬베르투스의 명제집(命題集)을 강의하였고, 1254년에 교수 자격인 박사학위를 받고 1259년까지 파리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 뒤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1268년까지 교황청 부속연구소에서 후에 교황이 될 분들에게 신학을 강의하였다. 1268년 다시 파리로 돌아가서 1272년까지 강의하면서 아베로이스파 학자들과 논쟁을 하였고, 이어 나폴리로 돌아와서 도미니코회 총회 신학원을 설립하려 했으나 복자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이 소집한 리용 공의회에 참석하러가던 중 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있는 포사누오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1274년 3월 7일에 선종하였다.
그의 생애는 연구와 저술과 교수생활로 일관하면서 진리 연구와 옹호를 위해 일생을 바쳤고, 깊은 영성에 충만한 삶이었다. 토마스가 죽고 난 뒤 그의 가르침은 파리나 옥스퍼드에서 한때 단죄되었으나 뒤에 다시 복권되었고, 1323년에 성인품에 올랐으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정통성의 시금석처럼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그 뒤 20세기 토미즘(Thomism)이 부흥되기까지 거의 무시된 상태로 있었다.
2. 사상 :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먼저 피조물의 자율성을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견해가 신학안에서의 인간 이성의 위치,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전능, 즉 은총과의 관계, 정치 사회에 관한 그의 사상을 결정하고 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에게서 독립적이기 때문에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자율적이다. 창조주의 활동은 피조물의 활동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피조물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피조물들이 자율적으로 존재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활동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유로운 것은 하느님의 활동에도 불구하고도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활동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 하느님의 능력은 자유가 없는 피조물들의 행동은 인과적(因果的)으로 다른 피조물들에 의해 결정되게 하고, 자유를 가진 피조물들의 행동은 타자에 의해 인과적으로 결정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행동들은 결국 하느님에 의해 일어나는 피조물들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자유란 하느님과의 어떤 거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원인들의 방해를 받지 않는 하느님 능력이 드러남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토마스가 하느님에 대해 가진 사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주안에 있는 모든 것을 현실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창조주이시다. 하느님은 당신 피조물의 어느 유(類)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피조물을 서로 대조적인 두 개의 것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떠한 피조물도 하느님에 필적될 수가 없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피조물에 원인이 있고, 또 어떤 것들은 하느님에게 원인을 돌리는 식으로 서로 대조시킬 수가 없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도구로서 행동한다.
하느님의 존재를 인지(認知)한다는 것은 곧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구별들을 함께 초월하는 것을 인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은 ‘우연적 존재들’과 따로 구별되어 있는 ‘필연적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들의 절대적 근원으로서 ‘필연적 존재’이다. 우연적 존재들은 소멸될 수 있고, (질료적) 가능성이 (형상에 의해) 현실화된 것이다. 우연적 존재들이 쉽게 파괴될 수 있는 것은 이 존재들의 질료성(質料性) 때문이다. 어떤 능동자가 우연적 사물들의 형상(形相)을 다른 것으로 바꿈으로써 파괴될 수 있는 것이다. 질료(質料)는 형상적(形相的 또는 可知的, 現實的)이 아닌 유형적 사물들 안에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이것이 곧 개체화의 원리이고, 이 원리에 의해 동일한 형상 또는 동일한 가지성(可知性, intelligibility)을 가진 다수의 개체적 사물들이 있게 된다. 개체 사물들은 이들이 가진 물질성 때문에 그 자체로 우리에게 가지적인(intelligible)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개체 사물도 한 단어의 의미가 될 수 없다. 우리는 개체적 사물들을 감각 지각으로만 안다.
천사들은 질료와 형상의 합성이 아닌 존재들로서 질료를 현실화 하지 않는 자존적 형상들(subsistentforms)이다. 이런 존재들은 개체도 없고 멸하지도 않으며, 그 자체로 가지적이지만 우리들에겐 가지적이 못 된다. 이는 우리의 인식양식이 피조물을 통해서만 작용하고, 또 상상(imagination) 안에서 물질적 상징들의 의미만을 이해하도록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양식으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물질적 사물들의 형상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인식활동은 개체 사물들의 형상들을 지성의 대상인 가지성에로 끌어올리는 일이고, 정신이란 이러한 형상들이 가지적으로 또는 지향적으로(intentionally) 존재하는 곳이다. 이러한 작용을 토마스는 추상(抽象, abstraction)이라고 한다. 추상이란 물질 안에 잠겨 있던 개체적 형상들이 상징들(symbols)의 의미(meanings)가 되게 하는 활동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들을 이용하여 진리를 파악하고, 선언으로 표현된 판단을 내린다.
피조물들 중에 큰 부분(즉 천사의 세계)이 우리의 이해를 넘어간다고 하면 하느님은 더욱 더 우리에겐 알 수 없는 분이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 우리는 아무 생각도 없다. 토마스가 신 존재 증명에서 논증하고자 하는 바는 경험 세계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불가피하게 존재(esse)에 관한 어떤 형태의 근본적 문제에로 우리를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즉 왜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곧 우리가 하느님에 관하여 무엇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란 말을 사용하게 하고 의미를 주는 피조물들이 가진 근본적 문제성을 안다는 것과 같다. 하느님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분이 있는 모든 것의 원인이시라는 것이다(이것은 대답이고 동시에 문제이다). 이 밖에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은 이러저러한 분이 ‘될 수 없다’는 것뿐이다.
하느님 안에는 질료와 형상의 구별도 없고, 하느님은 개체도 아니며 어떤 유에 속하지도 않으신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이란 천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존재 안 할 수도 있다. 천사들의 존재들이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있는 것이고 하느님은 그들을 창조 안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천사들의 본질(essence)도 그 존재에 비하면 가능적인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에겐 본질과 존재의 구별이 없다. 이러한 구별은 단지 피조물의 세계에만 있는 것이다. 하느님에겐 순순한 현실태만 있고 어떠한 가능태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아퀴나스가 말하는 창조주 하느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범주(範疇)의 범위 밖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바로 존재 자체이시라고 한다면, 피조물은 존재 자체에 의해 존재를 받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 아니라 존재를 말하고, 이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이 아닌 성체(聖體)의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n) 이론을 말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빵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존재로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어느 한 장소에나 정한 시간 안에 존재하실 수 없다. 만물을 지탱하시는 하느님은 어느 장소에 있는 어느 것에나 현재로 계신다. 그리고 하느님이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그것을 말하거나 생각하는 때는 어느 때나 진실이 될 것이다. 이렇게 영원성이란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한 것으로 끝이 없는 지속을 뜻하는 게 아니다. 하느님의 삶에는 전후관계란 없다. 그분은 먼저 하나를 행하거나 알고, 다음에 다른 것을 행하거나 아는 일이 없다. 물론 그분이 행하고 아는 대상들은 시간 안에 서로 연속될 수 있다. 하느님의 전능이란 당신이 뜻하는 바를 무엇이든 발생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예컨대 시작도 끝도 없이 시간 안에 우주를 창조하는 일 등). 그러나 사각원이나 과거를 변경시키는 일 등은 하느님의 권능에서 제외된다. 하느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악을 행 할 수가 없으시다. 악이란 존재의 부재 혹은 결핍이고 한 사물의 구체적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기대되는 것의 결여(缺如)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토마스는 하느님의 절대적 초월성(바로 이 이유 때문에 역시 내재적임)을 주장하고 나서, 그러면 어떻게 우리 언어가 그분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토마스는 은유적 언어(metaphorical language)[예컨대 “주님은 나의 목자시다”와 같은 말]와 자구적(字句的) 사용(literal usage)[예컨대 “하느님은 선하시다”와 같은 말)을 구별한다. 은유적 표현은 부정적 표현과 비교될 수 있으나 자구적 사용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구적 표현에는 유비적(類比的) 말(analogical term)을 인정한다. 유비적 언어란 체계적으로는 모호한 것이 지만 일의적(univocal) 언어도 아니고, 다의적(equivocal) 언어도 아니다. 내가 “친구를 사랑한다”, “좋은 과실을 사랑한다”, “나의 조국을 사랑한다”라고 할 때에 ‘사랑’이란 의미는 서로 구별되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들이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선하다’라는 말을 할 때에도 ‘선하다’라는 말이 항상 사용되고 있던 그 문맥의 의미와 관련을 맺으면 그 의미를 하느님의 신비에까지 늘려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 선성의 의미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유비(類比, analogy)란 언어 사용의 이론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유비적으로 어떤 말을 사용할 때에 그 말이 뜻하고 있는 바를 모두 알고 있는 것같이, 또는 그 말로써 하느님에 대한 술어로 간단히 언급할 수 있는 것같이 그렇게 그 말을 다루지 말라는 경고이다.
토마스는 인간에 대해 영과 육의 이원론을 배척한다. 물질적 사물에서는 실체적 형상이 그 사물의 존재 원리로서 그 사물을 ‘있게’ 하고 ‘행동’하게 하고, 그 사물이 ‘무엇이 되게’ 한다. 반면 질료는 가변성의 원리로서 존재자에 대해 가능적인 것이고, 지금 그 사물이 무엇이 아닌 상태이다. 생명체에 있어서는 그 생명(혹은 혼)이 그 생명체의 형상이고, 그 생명체의 살아 있는 그것이 곧 그 생명체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죽은 고양이는 이미 고양이가 아니며, 더욱이 고양이 혼이 없는 육체만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실체이다. 어느 동물이고 그 모든 생명활동은 그 동물 혼의 활동이고, 비이성적 동물들에게는 그 동물 혼의 육체적 활동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어떤 활동들(예컨대 사고하는 것, 선택하는 것 등)은 그 자체로 보면 육체 안에 있는 과정이 아닌 인간 영혼의 활동들이다. 물론 이런 행동들이 상상이나 감각 등 육체적 행동들의 도움 없이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그 자체로 보면 육체 안의 과정은 아니다.
이렇게 인간의 영혼은 육체로 하여금 인간 육체의 작용을 하는 인간 육체를 만드는 일 그 이상의 일을 가지고 있으며, 육체를 초월하고 그러한 활동들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 이유 때문에 육체가 존재하기를 그치고 시체가 되더라도 영혼은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러면 인간 육체에 혼을 불어넣는 일 없이 홀로 있는 영혼은 무엇과 같을까에 대해서 아퀴나스는 설명이 궁해진다. 그러나 그는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그 자체로 인간이 아니며, 부활이라는 계시 교리가 없다면 인간에게 있어 죽은 자의 소생이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비이성적인 것들은 그들을 존재하게 하고 그들의 본성을 결정한 자연적 원인들 때문에 자기들의 목적과 자기 자신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본성적으로 가진 형상뿐만 아니라 정신 안에 지향적으로 가진 형상들에 의해서도 행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고등동물들과 같이) 어떻게 자기 목적들에 도달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무슨 목적들을 지향할 것인가도 선택할 수 있다. 정치적이고 이성적 동물인 인간 본성은 자기가 목적으로 하는 어떤 선(善)들이 자기의 완성을 위해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인간은 가끔 더 큰 선들을 희생하고 더 하급의 선들을 우리 마음이나 정신 안에 간직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는 경우 인간은 결국 자기 완성이나 행복에 이르는데 실패한다.
윤리덕(倫理德)들(정의, 용기, 감정의 절제 등)은 인간이 참으로 인간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성향(性向)들로서 교육으로 습득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덕행들은 선행에 대한 실천적이고 지적인 덕행인 분별력(prudentia)에 의존한다. 이 분별력은 역시 습득된 덕으로 무엇을 행하여야 하고, 어떤 목적으로 지향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게 해 주는 성향이다. 덕행론(德行論)에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고 있지만, 정치적 동물로서 사회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인간은 또한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는 면에서는 그와 다르다. 이러한 하느님의 생명은 이 세상에서는 은총으로, 저 세상에서는 영광 속에 누리게 되어 있다.
은총이란 일차적으로 우리가 소유한 본성이다. 우리로 하여금 성삼위이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는 인간의 정치적 본성과 다르지 않으나 이 본성을 더욱 깊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상응한 윤리덕들이 있는 것과 같이 은총을 받은 우리 본성에 상응한 덕들이 있다. 전자는 교육으로 습득된 것이지만, 후자는 습득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infused) 덕들로서 신덕(信德) · 망덕(望德) · 애덕(愛德)이다. 신덕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성적으로 원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성령이신 사랑을 함께 나누는 망덕과 애덕의 전제가 된다. 죄로 인한 타락 때문에 인간은 죄를 극복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며 충만한 인간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이는 어떠한 사회적 덕들도 지속적으로 합당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덕 없이는 애덕도 없다. 주요 저서로는 ≪신학대전≫(神學大典, Summa Theologiae), ≪대이교도 대전≫(對異敎徒大典, Summa Contra Gentiles), ≪명제론집주해≫(命題論集註解, Scriptum super Libros Sententiarum), ≪영혼에 대하여≫(De Anima) 등이 있다. (⇒) 토미즘 (朴石熙)
[참고문헌] M.D. Chenu, Introductions a l’etude de saint Thomas d’Aquin, 1950 / F.C. Copleston, Aquinas, 1955, (강성위 역, 토마스 아퀴나스, 바오로서원, 1968) / E. Gilson, The Christian Philosophy of St. Thomas Aquinas, 1957 / A.C. Kenny, Aquinas; (ed.), Aquinas: A Collection of Critical Essays, 1969 / J.A. Weisheipl, Friar Thomas D’Aquino, 1975 / G.K. Chesterton, Saint Thomas Aquinas, 1933, (박갑성 역, 성 토마스論, 196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