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가톨릭 미술의 자생적 시초는 1784년의 한국 천주교회 창설 및 교인들의 천주 경배의식과 더불어 비롯되었다. 시각적 경배 대상으로서 천주상과 그 밖의 상본(像本) 그림이 사실적인 서양화법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곧 한국에서의 서양미술 수용의 시초이기도 하였다. 교인 중의 화가가 독실한 신앙심으로 교우들을 위해 그린 초기의 상본화는 이승훈(李承薰)이 1783년에 중국 북경(北京)에 가서 그 곳 천주당(天主堂)의 프랑스인 신부에게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이듬해 돌아올 때에 가져온 상본(유채화였을지도 모른다) 등을 먹붓과 전통적 채색기법으로 모사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1784년 3월(음력)에 북경에서 귀국하면서 이승훈은 각종 교리서와 상본화(像本畵), 십자고상(十字苦像), 묵주 등을 조선에서의 전교를 위해 받아 가지고 왔던 것이다.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집회장에서 그리스도의 상본이 형조(刑曹) 기관에 압수된 적이 있었다. 그 뒤 서울에서 상본을 그린 확실한 기록의 교인 화가는 1801년의 신유(辛酉)박해 때에 이승훈, 정약종(丁若鍾) 등에 뒤이어 처형당한 이희영(李喜英, 루가)이다. 여주(驪州)와 서울에서 직업화가로 생활하다가 천주교인이 된 그는 상본화를 맡아 그리며 전교에 이바지하다가 같은 해에 순교한 황사영(黃嗣永)에게 천주상[耶蘇像] 세 폭을 그려 보냈던 사실이 밝혀져 목베임을 당하였다. 이희영이 그린 천주상이 전해지지는 않으나, 한국 가톨릭 미술사의 뚜렷한 첫 화가인 그의 회화역량을 확인시키는 자유로운 작품으로는 <앉아 있는 개>(숭전대학교 박물관)가 있다. 늘씬한 서양개의 표정을 깔깔한 가는 먹붓으로 마치 연필 스케치처럼 묘사한 근대적 양풍(洋風) 그림이다. 그렇듯 그는 양풍 화법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서울에는 북경에서 구해온 서양 그림이 꽤 있었고, 이희영도 그것을 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가까운 인척이며 교우였던 김건순(金健淳)은 여주의 어느 교우집에서 성 미카엘 천사의 상본을 본 적이 있었음이 기록으로 나타난다.
한국인이 서양 화법의 특이한 실상을 처음 접한 것은 17세기의 일이었다. 중국에 갔던 정부 사신(使臣)과 그 수행원들 중에 북경의 서양인 선교사를 접촉하거나 천주당을 구경하며 서양문화의 특이한 화법과 건축양식 등을 보고 감동한 일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1630년에 명(明)나라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鄭斗源)은 이듬해 귀국할 적에 화포(火砲)와 망원경, 시계 등 서양문물을 얻어 왔고, 그때 그는 북경의 이탈리아인 신부 로드리게스(J. Rodriguez, 중국명 陸若漢)와도 접촉을 가졌다. 그 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년) 때 청(淸)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는 1644년에 북경에서 아담 샬(Adam Schall, 중국명 湯若望) 신부와 자주 만나 천주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음 해에 귀국하면서 그는 신부에게서 각종 서양문물과 함께 천주상 그림 한 폭을 선물로 받아 갖고 왔다. 그 상본이야말로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사실적인 서양그림이었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서양문화와 천주교에 관심이 있던 학자로서 북경에 갔다가 천주당의 성화와 조각상에 감명한 사람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은 1766에 북경에 갔던 홍대용(洪大容)과 1780년에 다녀온 박지원(朴趾源) 등이다. 특히 박지원은 그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천주당기’(天主堂記)와 ‘양화’(洋畵) 항목을 설정하고 북경 천주당의 벽화와 천장화에서 본 서양 화법의 경이로운 표현미와 생동감에 너무도 감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상세히 적음으로써 국내에 양화 지식을 넓이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다가 1784년에 북경에서 돌아온 이승훈을 중심으로 한국에 마침내 자주적 천주교회화가 생기며 전교와 미사에 필요한 그리스도상과 그 밖의 상본화가 한국인 화가에 의해 그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회가 탄생한 이듬해인 을사(乙巳) 박해로부터 이미 시작된 정부의 가혹한 천주교 박해로 인해 그 상본들의 역사적 전래 혹은 보존은 불가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희영의 기록 말고는 그 시기의 다른 상본 혹은 상회 제작 내막을 일절 알아볼 수가 없다.
1882년부터 구미(歐美) 여러 나라와 국교관계를 맺기 시작하며 신앙의 자유가 드디어 용인되고, 특히 1886년에 한불수호조약(韓佛修好條約)이 체결되자 천주교는 전멸상태에서 광명과 회생의 활기를 얻게 되었다. 한국 가톨릭 미술의 분명한 전개도 사실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와 처음부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그들 자신 한국에서 여러 명의 순교자를 낸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서울에서 즉각 성당과 그 부속건물을 서양의 교회건축 양식으로 짓게 되었다. 1890년과 1892년에 준공된 종현(鐘峴, 현 明洞)의 주교관(主敎館)과 약현(藥峴, 현 中林洞)성당, 그리고 1898년에 낙성된 명동성당 및 같은 무렵에 세워진 그 뒤편의 성바오로 수녀원 건물은 한국 가톨릭 건축미술의 역사적 효시일 뿐 아니라, 한국근대건축사의 견지에서도 현존하는 대표적 기념물들이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신부들은 한국에서의 성당 건축을 높은 뾰족탑과 수직적인 구조를 갖는 유럽의 고딕 양식으로 지었다. 두세(Camille-E. Doucet) 신부의 설계로 여겨지는 중림동성당은 한국에서 처음 세워진 고딕 양식의 벽돌건물이면서 부분적으로 로마네스크풍의 수법을 절충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고딕 양식의 초기 성당 건축 중에서 가장 명쾌한 구조와 아름다운 세부설계의 걸작은 명동성당이다. 여기서 프랑스의 투르(Tours)에서 만들어온 화려하고 엄숙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처음으로 장식되었는데, 곧 뒷벽의 <로사리오 15현의도(玄義圖)>, 동쪽 윗벽의 <동방박사의 경배>, 그리고 서쪽 윗벽의 <천국의 열쇠를 받아 든 성 베드로>이다. 붉은 벽돌구조의 이 대성당과 유럽식 2층 주거양식의 주교관 및 수녀원은 모두 부주교였던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가 설계 · 감독하였다. 1892년에 세워진 서울 용산 성심신학교 건물인 지금의 성심수녀원과 그 안의 작은 고딕양식 성당(1902년에 준공) 역시 그의 설계로 이루어졌다. 그 밖의 고딕풍 성당으로는 1918년에 건립된 대구(大邱)성당과 1937년에 세워진 인천(仁川) · 전주(全州)성당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가톨릭 교세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독일 베네딕토회, 미국 메리놀회, 아일랜드 골룸바노회 등이 한국에 진출해 오면서 성당 건축과 그 밖의 교회 미술에도 각기 특색을 갖는 다양성을 보게 되었다. 1927년에 함경남도 덕원(德源)에 건립된 베네딕토회 수도원 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을 곁들인 로마네스크풍의 당당하고 본격적인 설계였다. 반면, 메리놀회 신부들이 지은 성당건축은 유럽의 전통양식을 한국에서의 형태로 지방색화 하려고 들었다. 그 대표적인 본보기는 1924년경에 세워진 신의주(新義州) 성당이었다. 그것은 바실리카 양식에 한국 고유의 합각지붕을 갖는 독특한 설계였다. 오늘날 북한 지역의 그 성당들이 어떤 상태로 남아 있는지, 혹은 없어져 버렸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앞의 성당들은 말할 것도 없이 내부의 여러 성상(聖像) 그림과 그 조각 그리고 각종 성기(聖器) 공예품을 갖추게 되었으며, 그것들은 거의가 중국, 프랑스, 독일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한국 미술가가 제작한 것은 1920년대에 가서야 보게 되었다. 인천의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화가 장발(張勃)은 유채로 많은 상본화와 성화를 그린 가장 대표적인 미술가이다. 현존하는 그의 초기 그림의 하나는 그가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던 1920년에 그린 서울 대교구 소장의 <김대건 신부상>이다. 여러 증언을 토대로 그렸을 이 초상화는 자연스런 유화 작품으로 시도돼 있다. 그러나 그 뒤 그는 독일의 엄격한 보이론(Beuron) 성미술 화법에 감화를 받게 되었다. 그는 서신 연락으로 뮌헨의 그리스도교 미술협회 회원이 되어 그 협회의 월간 <그리스도교 미술>(Die Christich Kunst)을 구독하고 있었으며, 주위의 몇몇 성직자는 그에게 보이론 유학을 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장발은 동경미술학교 재학 중에 뉴욕으로 가서 1925년에 컬럼비아대학 미술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해 바티칸에서 거행된 한국 순교자 시복식(諡福式)에 형 장면(張勉)과 치명복자 친족 대표로 뉴욕에서 직행하여 참석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가 귀국하자 명동성당에서는 그에게 제단(祭壇) 뒷면을 장식하게 <14종도상(宗徒像)>을 위촉하였다. 경주(慶州) 석굴암(石窟庵)의 내벽 원형구조와 본존불(本尊佛) 배경의 10대제자(大弟子) 입상부조(立像浮彫) 배열을 가보고 참작한 장발의 그 첫 본격 상본화는 보이론 화법의 엄숙한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그 때 종도들의 순위 등을 지도한 김 요셉 보좌신부는 김 골룸바와 아녜스 성녀의 인척이었다. 그 관계로 장발은 김 신부의 개인적 요청을 받아 <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절두산순교자기념관)도 그리게 되었다. 역시 김 신부의 지도를 받은 이 성스러운 표정과 엄격한 상본 양식의 성녀 자매상은 화면 밑의 주제 설명 글자들의 장식성과 더불어 보이론풍의 전형이다. 반면, 1928~1929년에 그려진 <복자 김대건 신부상>(절두산순교자기념관)의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전신상의 한결 자연스런 표현과 밝은 색채 구사는 프랑스의 나비파(Nabis) 화가 드니(Mauris Denis)의 종교화에서 영향을 받은 수법이다. 장발의 다른 성화 기록으로는 1933~1934년의 신의주 성당 벽화 <성신강림>(聖神降臨), 1935년의 평안북도 비현(批峴)성당 <예수 성심상(聖心像)>, 1940년 무렵의 평양(平壤) 서포성모회(西浦聖母會) 수녀원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치명(致命)>, 1945년의 서울 가르멜 수녀원 제단화 <성모영보>(聖母領報)와 가르멜 성당 <성모대관>(聖母戴冠) 등이 대표적 제작이었으나, 북한 지역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에서도 6.25전쟁의 재난 등으로 거의 파괴돼 없어졌다. 다만 가르멜 수녀원에 1941년 제작된 장발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성모영보>가 보존되고 있는데, 매우 회화적 표현으로 그려져 있다. 장발 외에도 이순석(李順石)이 19세의 미술학도로 1923년에 중림동 성당을 위해 그린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가 있었다. 반신상의 그 두 상본화는 성당 안 양 벽에 걸려 있다가 6.25전쟁 때 없어졌다. 반면, 유럽에서 그려져 온 성화로 현존하는 대표적인 것은 명동성당에서 특별히 주문 제작한 대작 <순교복자 79위>와 <그리스도와 죄인>이다. 앞의 것은 1924~1925년에 벨기에에서 그려 온 탓으로 인물 표정 등이 거의 서양인상이며, 뒤의 것은 프랑스에서 가져왔다고 하는 고전적 화법의 성화이다. 그리고 광복 전까지 북한의 덕원성당에는 독일 화가가 그린 등신대의 <12종도상>이 있었다. 성상 조각으로서는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한 윤승욱(尹承旭)이 1939년에 동경에서 개최된 로마 전시를 위한 가톨릭미술 공모전에 <그리스도 입상>을 출품했던 기록과, 그 뒤 서울에서 대리석 조각의 전신상으로 <복자 김대건 신부상>을 제작했던 사실이 확인되나, 그 작품들이 전해지지는 않는다.
1945년의 민족 해방은 동시에 국토의 남북분단을 가져오고,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는 이윽고 모든 종교를 말살시켰다. 그간 북한 지역에 뿌리내려 졌던 가톨릭 성당과 수도원, 수녀원은 건물만이 남아 병원 혹은 다른 용도로 전용되었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성화와 성상 등이 온전할 리가 없다. 모두가 파괴되고 불태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은 장발 학장을 중심으로 이순석, 윤승욱, 김종영(金鍾瑛) 등이 교수진을 구성함으로써 한국 가톨릭 미술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 서울미대 교수진 가톨릭 미술가와 졸업생 중의 신진 가톨릭 화가들은 공산군 남침의 6.25전쟁을 치른 직후 1954년 10월에 종합적인 성미술전(聖美術展)을 조직하여 가톨릭 미술을 폭넓게 추구하였다.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그 전람회의 출품내용은, [그림] 장발 <십자고상>, 정창섭(丁昌燮) <삼왕내조>(三王來朝), [조각] 김종영 <마돈나>, 김세중(金世中)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 [공예] 이순석 <십자가와 촛대>, 백태원(白泰元) <성서대>(聖書臺) 등이었다. 그 뒤 1970년에는 역시 서울 미대 계열이 주축이 된 ‘서울가톨릭미술가협회’가 창립되고, 다음해부터 정기적으로 회원작품전이 개최되어 1982년에 10회전을 기록하였고 출품회원도 여러 분야로 증대하였다. 앞에 나온 작가들 외의 그간의 중요 출품자는, [그림] 박득순(朴得錞), 김원(金源), 박세원(朴世元), 나희균(羅喜均, 입체작품도 병행), 이남규(李南奎), 김태(金泰), 방혜자(方惠子), 윤명로(尹明老), [조각] 최의순(崔義淳), 최종태(崔鍾泰), [공예] 권순형(權純亨), 김교만(金敎滿), 강찬균(姜燦均), 민철홍(閔哲泓), 김희진(金喜鎭) 등이다. 대구와 부산에도 1965년과 1983년에 ‘가톨릭미술가협회’가 각각 발족하여 작품전을 갖고 있다.
1950년대 이후,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처에 새로이 건립된 성당 · 수도원 · 수녀원에서는 가톨릭 미술가들에게 벽화와 각종 성화 및 성상 조각을 의뢰하였다. 그로 인해 상당수의 실적을 보게 되었는데, 전통화법으로는 장우성(張遇聖), 장운상(張雲祥), 방오석(方五錫), 유화로는 박득순, 정창섭, 그리고 조각에서는 김세중, 최의순 최종태 등이 많은 제작을 맡았다. 한편 작품으로서 평가의 대상이 된 성당건축으로는 이희태(李喜泰)의 서울 혜화동성당(1958)과 절두산성당(1967), 김수근(金壽根)의 마산성당(1979)과 서울 불광동성당(1983), 김원(金洹)의 서울 한강성당(1980)과 성 바울로 성당(1983), 유희준(劉熙俊)의 서울 반포성당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1957년에는 벨기에 만국박람회 종교미술전에 한국 가톨릭 미술가들의 작품도 출품되었는데, 곧 장발, 장우성, 박순득 등의 성화와 김종영, 김세중, 송영수(宋榮洙), 정기은(張基殷), 차근호(車根鎬)의 성상조각이었다. (李龜烈)
[참고문헌] 柳洪烈, 增補한국천주교회사, 上 · 下, 가톨릭출판사, 1981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方五錫, 現代 韓國가톨릭 美術에 관한 硏究, 敎會史論叢,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張勃, 朝鮮 カトリツク藝術, カトリツク大辭典, 富山房, 東京 1940 / 尹一柱, 韓國現代美術史-建築, 국립현대미술관, 19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