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역서학서 [한] 漢譯西學書 [관련] 서학

명말(明末)에서 청초(淸初)에 이르는 시기[16세기말∼18세기말]에 중국에서 선교(宣敎)하던 서양 선교사들과 일부 중국학자들이 천주교의 전파와 서양문명의 소개 · 전달을 목적으로 서양의 종교 · 과학서를 한문(漢文)으로 변역하거나 직접 저술한 서적들의 통칭. 일명 ‘천주교 동전문헌’(天主敎東傳文獻), ‘동전한문서학서’(東傳漢文西學書)라고도 하며, 줄여서 ‘서학서’(西學書)라고도 한다. 최초의 한역서학서는 1584년 간행된 ≪천주성교실록≫(天主聖敎實錄)이었다. ≪천주성교실록≫은 1582년 리치(Matteo Ricci, 중국명 利瑪竇, 1552∼1610)와 함께 중국 내륙의 선교를 시작한 예수회 선교사 루지에리(Michaelo, Ruggieri, 중국명 羅明堅, 1543∼1607)의 저술이었는데, 이 ≪천주성교실록≫에 이어 1603년 리치에 의해 그 유명한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저술, 간행되었다. 리치는 1601년 북경에 입성, 중국을 개교(開敎)시킨 후 중국 선교의 기반을 다지는 한편 20여종의 한역서학서와 <만국여도>(萬國輿圖)라는 세계지도를 한역, 저술하였다. 그리고 리치의 뒤를 이어 알레니(Giulio Aleni, 중국명 艾儒略, 1582∼1649), 삼비아시(Francis Sambiasi, 중국명 畢方濟, 1582∼1649), 부글리오(Louis Buglio, 중국명 利類斯, 1606∼1682), 샬(Adam Schall von Bell, 중국명 湯苦望, 1592∼1666),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중국명 南懷仁, 1623∼1688) 등 중국선교에 뛰어든 많은 예수회 선교사들도 수많은 한역서학서를 저술하였고, 또 예수회의 뒤를 이어 중국 선교에 진출한 도미니코회(1631년 진출), 프란치스코회(1633년 진출), 아우구스티노회(1680년 진출), 파리 외방전교회(1684년 진출) 등 여러 선교단체의 선교사들도 예수회의 저술사업을 본받아 각종 한역서학서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유교전통의 중국사회에서 가장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은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와 보유론(補儒論)적 입장을 갖고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저술들이었다. 또한 서양선교사들 이외에도 ‘중국성교삼주’(中國聖敎三柱)로 불리는 서광계(徐光啓, 1562∼1633), 이지조(李之藻, 1565∼1629), 양정균(楊廷筠, 1577∼1627) 등과 풍응경(馮應京, 1555∼1626), 이천경(李天經, 1579∼1659), 왕징(王徵, 1571∼1644), 한임(韓霖, 1600∼?), 구식사(瞿式耜, 1590∼1650), 은곤(殷-, ?∼?) 등 일부 중국 학자들도 직접 한역서학서를 저술하거나 서양 선교사들의 저술작업을 도움으로써 한역서학서의 저술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해서 명말에서 청초에 이르는 시기에 간행된 한역서학서는 총 400여 종에 이르며 그 내용은 종교 · 윤리서, 과학 · 기술서 등 크게 두 가지로 대벌되는데 종교 · 윤리서들은 천주교의 교리 · 전례 · 기도문 · 성인전 및 천주교와 타종교와의 비교, 철학 · 윤리 등에 관한 것들이고, 과학 · 기술서들은 천문 · 역산 · 지리 및 과학기술에 관한 것들이다. 이러한 한역서학서는 중국에서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월남 등 한자를 사용하는 동양 여러 나라들에까지 유포되어 서양문명의 접촉과 전달의 계기가 되었고 또한 이들 나라들의 사상사적(思想史的)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실학과 천주교 창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에서의 한역서학서 도입은 주로 북경을 왕래하던 사행원(使行員)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603년 사행원 이광정(李光庭)이 리치의 세계지도를 갖고 귀국했고 1631년 정두원(鄭斗源)이 과학기기들과 ≪치력연기≫(治曆緣起), ≪천문략≫(天問略), ≪원경설≫(遠鏡說), ≪직방외기≫(職方外紀) 등의 한역서학서를 갖고 귀국한 이래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종식에서부터 1784년 북경에서 이승훈(李承薰)이 영세하기까지 148년간 167여 회에 걸쳐 사행원들이 조선과 청(淸)나라를 왕래하며 각종 과학기기와 한역서학서들을 갖고 귀국, 국내에 소개하였다. 이렇게 소개된 한역서학들은 실학자(實學者)들에게 열독되었고 점차 학문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서학(西學)의 수용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서학배척 운동도 일어나게 되는데 신후담(愼後聃), 안정복(安鼎福), 이헌경(李獻慶)등 전면적 서학을 부정하는 입장과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의 이적(理的) 측면을 부정하고 기적(器的) 측면은 수용하는 입장 등 두 가지의 서학배척론이 대두되었다. 그리고 서학수용은 다시 발전하여 1777년 정약전(政若銓), 이벽(李檗) 등과 기호남인(畿湖南人) 소장학자들이 참가한 주어사강학(走魚寺講學)에서 최초로 한역서학서를 통한 천주교 교리연구가 시작되었고 이를 계기로 정약전 · 정약종(丁若鍾) · 정약용(丁若鏞) 형제, 이벽(李檗), 이승훈 등은 천주교 신앙운동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드디어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귀국한 뒤 신앙공동체가 탄생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창설되었다. 결국 세계교회사상 유례없이 자생적으로 창설된 한국 천주교회는 한역서학서를 통한 서학의 수용과 교리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 서학

[참고문헌] 李元渟, 明淸末 西學書의 韓國思想史的 意義, 韓國天主敎會史論文集, 第1輯,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 崔韶子, 明淸時代 西學受容에 관한 硏究(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81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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