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투쟁 [한] 階級鬪爭 [영] class struggle [독] klassen-kampf [관련] 계급의식

계급투쟁은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인간의 행동을 휘몰아칠 목적으로 제창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변증적적 이론을 역사에 응용해서 ‘일체의 모든 사회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공산당 선언의 서두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 견해는 물질적인 힘으로 역사가 전개되어 간다는 것이며, 인간의 정신적 내면적인 요구를 완전히 무시한 유물사관(唯物史觀)의 사상이다. 공산주의는 계급투쟁을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로 유도하는 계급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 곧 공산주의의 계급과 계급투쟁에 대한 이론의 핵심이며 또한 이론의 실질인 것이다. 실제로 공산주의는 인간을 귀속돼 있는 계급적 상태에 의해 형성된다고 가정하는 동시에 계급투쟁을 기본적인 정치적 실체로 가정하고 있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말하는 계급이란 빈부의 차 즉 재산이 많다 적다든가 하는 수입의 다소에 의해 구별되는 것도 아니며, 수입원으로서의 임금 · 이윤 · 지대(地代)에 따라서 임금 노동자, 자본가, 지주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생산의 체제 안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생산수단에 대한 그 관계가, 사회적 노동 조직 안에서의 역할이 사람들과 다른 큰 집단을 계급이라고 말한다. 생산의 전체에 대해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느냐에 따라서 구별된 것이 계급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생산에 있어 지휘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자본가이며, 지휘되는 입장에 있는 자가 노동자라는 말이다. 즉 지휘하는 자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고 지휘되는 자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음으로써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와 노동자의 존재가 있다 하더라도 그 계급에 있어서의 공통 자각이 없으면 서로 대립하는 일이 없으므로 계급의식이 수반되어야 투쟁적인 계급의 개념이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계급이란 생산수단을 갖고 있느냐 아니냐, 그리고 그와 같은 의식을 갖고 있느냐 어떠냐에 의하여 구별된 인간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변증법적 이론은 별 도리 없이 양극적인 생각을 하게 마련이기에 마르크스는 사회의 계급을 두 계급 즉 자본가(부르좌)와 노동자(프롤레타리아)의 두 계급으로 환원하게 마련이었다.

마르크스는 부르좌(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노동자)와의 두 계급 사이의 필연적 투쟁을 잉여가치설(剩餘價値設)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임금 노동에 입각하여 법률 위에서는 자유로우나 생산 수단을 갖지 않는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서 생활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 자본가는 공장이나 기계, 원료 등의 생산 수단을 갖고 있기에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서 임금을 지불하고 이익을 올린다. 자본가는 상품의 대량 생산에 의해 경쟁을 심히 하고, 많은 큰 부분을 프롤레타리아에게로 전화케 한다. 여기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단지 노동자의 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화할 뿐 아니라 노동력도 역시 상품으로 전화하는 것이며 그것이 잉여 가치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은 모든 물건의 가치가 그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노동량 즉 노동 비용에 의하여 정해진다는 노동가치설(勞動價値設)을 도입하는 것에 의하여 성립된다. 노동자는 그 노동에 의해 자기 생활에 필요한 이상의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자본가나 지주에게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노동자에 의하여 생산된 부(富)의 잉여가치가 자본가의 소유로 빼앗긴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을 부채질하기 위해서 ≪자본론≫(資本論)의 제1권에서 잉여가치를 논급하고, 자본가가 임금 노동자로부터 무상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그 착취가 심하면 심할수록 자본가는 많은 잉여가치를 빼내며 따라서 보다 많은 이윤을 획득하게끔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본가에 대한 증오심과 적대감을 높이고 계급투쟁을 격렬하게 전개 시키기 위해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참을 수 없는 부정의 희생이 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과연 가치가 노동량 내지 노동 비용에 의해서만 정해지는 것일까. 물건의 가치라는 것은 노동으로부터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재화의 수요 공급의 관계 즉 그 유용성과 희소성(稀少性)에 의해서 정해진다. 노동이 만드는 것은 생산물의 가치 결코 그 자체는 아니다. 노동가치설은 상품이 반드시 그 가치대로 곧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으로 교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자본론≫ 제3권에서 마르크스는 수급 관계에 의해 정해지는 바 평균 이윤율에 의하여 가치와도 일치하지 않는 가치가 성립되는 것을 인정하고, 현실의 가격이 가치 곧 상품에 포함되는 사회적 필요 노동량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주장하여 노동가치설의 모순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이 노동가치설의 동요는 당연히 이 이론에 의거한 잉여가치설까지도 동요시키고 더욱이 착취론(搾取論)까지도 불명확한 것으로 한다.

착취라는 것은 노동자가 그 노동에 의해서 제공하는 가치보다도 임금으로 받는 가치가 적다는 것일진대 노동자의 노동이라는 것이 그가 받고 있는 임금보다도 많은 가치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 증명이 노동가치설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마르크스 스스로도 말하듯이 “그 물건이 무용(無用)하다면 그 안에 포함되고 있는 노동도 역시 무용한 것이며, 노동에 시간이 얼마 걸렸든 간에 그 물건은 하등의 가치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의 문제는 노동의 양(量)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의 유용(有用) 즉 필요에 있다.”

계급투쟁은 어쨌든 착취론을 기조로 해서 성립되고 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좌지 전체와 아울러 정부 전체에 대하여 투쟁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계급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레닌의 주장이다.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정치투쟁으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 정치투쟁이란 정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며 공산당 선언에서는 “모든 종래의 사회 조직을 강력히 뒤엎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의 박멸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계급이 존속하는 한 계급투쟁이 꼭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의 역사가 반드시 종말을 볼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의견에서 끌어 낸 것을 포함한 계급투쟁에 대한 견해와 아울러 다른 견해들이 사회 계급들 사이의 화해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 자체가 지니는 그 성격 때문에 화해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도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도 필연적이며 불가피한 것이긴 하나 인간은 단지 수동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여 모든 노동자가 굳게 일치 단결해서 부르좌 사회의 타도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은 잉여가치에 그 기초를 두고 자본가의 발전과 그에 수반한 노동자의 필연적 빈곤화를 가정해서 성립되고 있다. 그런데 21세기를 바라보고 있는 오늘날 과연 그러한가.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자본주의의 여러 국가에서는 노동자의 제반 조건이 점점 좋아지고 있는 현상을 마르크스는 지하에서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가 “노동의 보수는 각 자의 임무와 생산성, 기업의 상황과 공동선(共同善)을 고려해서 본인과 그 가족들에게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정시적 생활을 품위있게 영위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정도의 것이라야 한다”(사목헌장 67). “자본주, 고용주, 지배인, 노동자 등 각자의 직무에 따라 업무상 필요한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적절히 규정된 방법에 의하여 모든 이가 기업 운영에 적극 참여하도록 촉진해야 하고, 노동자들을 진실로 대표하여 경제 생활의 올바른 질서를 수립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자유로이 조직할 권리와 아무런 보복의 위험 없이 조합 활동에 참여할 권리는 기본 인권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돼야 할 것이다”(사목헌장 68). “개인의 권리와 각 민족의 특성을 존중하면서 정의와 평등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적 내지 사회적 차별 대우와 결부돼 가끔 증대해 가는 현재의 경제적 불평등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제거하도록 계속 노력해야 하겠다”(사목헌장 66)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과연 그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교회는 더욱더 노동자의 세계에 대해서 사목적 배려를 끊임없이 하고 계급투쟁이 아니라 정의 복음으로 사랑과 화해에의 일치 운동을 조정할 메시아적 사명을 완수하여야 할 것이다. (⇒) 계급의식 (梁漢模)

[참고문헌] N. 베르자예프 原著, 鄭容燮 譯, 그리스도와 階級鬪爭, 大韓基督敎書會, 서울 1977 / 金南洙 譯,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서울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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