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교구신우회 [한] 平壤敎區信友會

8.15 광복 후 북한 공산당의 종교 탄압을 피해 월남한 평안남북도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모여 1949년 11월에 발족한 평신도 신심단체. 6.25전쟁 동안에도 이 회의 활동은 활발하여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부산지부를 발족케 되었다. 1955년 12월에는 서울 종로구 신문로(新門路)에 회관을 매입 운영하여 회의 주요활동인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 후원사업 및 성소(聖召) 계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1960년 3월과 1962년 1월 서울 · 부산 교구장과 평양교구서리 캐롤(Carroll, 安) 몬시뇰과의 협약에 따라 평양교구 출신 사제들이 다른 교구에서 봉직하도록 하고, 또 1970년 4월 서울 교구장 김수환(金壽煥) 추기경과의 협약에 따라 평양교구 소속 신부들이 서울대교구에 편입됨에 따라 회원들의 활동이 위축되고 회관도 처분하였다. 1977년 12월 명동성당에서 평양교구 설정 50주년 기념행사를 갖고 1981년 1월 ≪평양교구사≫를 편찬해 냈다. 현재 사무실은 서울 도봉구 창동에 소재하고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평양교구 [한] 平壤敎區

북한 침묵교회에 속하는 교구의 하나. 1927년 3월 17일 서울교구에서 지목구(知牧區)로 분리되어, 이미 1923년부터 이곳에 진출하여 선교 중이던 미국 메리놀(Maryknol) 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평안남북도 지방의 포교사업이 위임되었다. 평안도 지방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늦어, 1968년 시복된 22위 복자(福者) 중에 평양이 유정률(劉正律)과 황해도의 우세영(禹世英)의 2명이 끼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860년을 전후해서인 것 같다. 즉 황해도 출신의 김기호(金起浩), 이득보(李得甫) 등이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고, 평안도 지방에까지 들어가 전교에 힘쓴 것이 그 시초였고, 이어 그 때 입교한 정태정(鄭泰正)이 평안도 지방 전교에 힘쓴 결과, 점차 여러 곳으로 전파되어 병인박해 때 순교자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 교세가 점차 늘어나자 블랑(Blanc, 白圭三) 주교는 1883년에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를 평양에 보내 정식으로 포교활동을 폈으나, 1년 뒤에 프와넬 신부가 서울로 전임되자 다시금 목자 없는 교회가 되었다. 그러다가 10년 뒤인 1895년에야 르장드르(Le Gendre, 崔昌根) 신부가 평양외성에 기와집을 마련하고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포교활동을 재개하였고, 이어 1898년 르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2대 본당신부로 부임하면서부터 1909년에 평양 관후리(舘後里)를 비롯하여, 진남포(鎭南浦), 영유(永柔), 섭가지, 의주(義州), 신의주(新義州), 비현(批峴) 등에 연이어 교회가 신설되었다. 여기에 1923년부터 메리놀회원이 진출하여 선교활동에 힘쓰고, 1924년에는 메리놀 수녀회 수녀들마저 진출하니 교세는 날로 더해가, 1927년에는 지목구로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초대 지목(知牧)에 전 교황사절이던 번(Byrne, 方) 주교가 취임하였고, 번 주교가 메리놀 전교회의 부회장으로 전임되자 모리스(Morris, 睦) 신부가, 그 다음으로 부드(Booth, 夫) 신부가 교구장서리로 재임 중 1939년 7월 1일에 로마 교황청은 평양교구를 대목구(代牧區)로 승격시켰다. 이에 따라 오셰아(O’Shea, 吳) 신부가 그 해 10월 29일에 주교승품식을 갖고 교구장으로 정식 취임했는데, 그 동안 평양교구는 문맹퇴치를 비롯한 출판 문화사업과 각종 사회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여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942년 소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日帝)는 오세아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를 감금하고 끝내는 국외로 추방하기에 이르러, 한때 서울교구장 노기남(盧基南) 주교가 교구장 서리로 평양교구장을 겸임하였고, 1944년 4월 17일 홍용호(洪龍浩) 신부가 두 번째 방인주교로 승품되어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홍 주교는 일제 말엽과 광복 뒤 공산 치하에서 천주성업을 위해 악전고투하다가 1949년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행방불명이 되었다. 1950년 유엔군은 평양이 수복되자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가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어 교회 복구작업에 착수했으나 중공군의 남하로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나 다시금 침묵의 교회로 남게 되었다. 다만 월남한 신자들만이 통일될 앞날을 기다리며 교구장서리인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을 중심으로 한데 뭉쳐 교구 복구를 위한 기구와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敎會史의 探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天主敎平壤敎區史, 분도출판사, 1981.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평신도위원회 [한] 平信徒委員會 [라] Pontificium Consilium pro Laicis [관련] 교황청위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고조된 평신도들의 사도직 활동을 총괄하기 위해 교황청 안에 설치된 위원회. (⇒) 교황청위원회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평신도운동 [한] 平信徒運動 [관련] 가톨릭평신도사도직운동

⇒ 가톨릭평신도사도직운동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평신도사도직 [한] 平信徒使徒職 [라] apostolatus laicus [영] lay apostolate

평신도가 부여받은 사도직. “교회 창립의 목적은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 왕국을 전세계에 펴고 모든 사람을 구원에 참여케 하며, 또한 그들을 통해 전세계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일이다. 이 목적을 위한 신비체(神秘體)의 활동을 모두 사도직이라 부른다”(평신도교령 2항). 평신도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와 책임이 세상의 생활 내지 구조에 들어가 있음으로써 결정되는 사람이며(K. Rahner), 세속에 살면서 세속 일에 파묻혀 있는 것이 평신도의 특징이므로 평신도는 마치 누룩과 같이 되어 세속 안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았다. 즉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王職)에 참여하며, 모든 일, 기도, 가정생활 등을 영적(靈的) 제물로 봉헌하고 인간 성화에 힘쓰며, 일상생활 가운데 복음의 힘이 빛나도록 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현세 질서에 복음정신을 침투시켜 현세 질서를 완성하며 겸손과 인내로써 형제들을 그리스도왕에게로 인도한다.

평신도가 이 사도직 수행의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는 근거는 성세성사로 신비체의 지체가 되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한 사실에 있다. 따라서 사도직의 기본 자격은 교계(敎階)에 의하여 주어진 위임(mandatum)이 아닌 것이다. 영적 생활에 성실하여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일상생활에서 더욱 깊고 생생하게 하는 데에 평신도 사도직의 결실이 달려 있다. 평신도 사도직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이 그러하듯이 인간 구원과 현세 질서의 개선을 목표로 삼고 있다.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현세 질서에 복음정신을 침투시켜 현 질서가 하느님께 향하도록 한다. 이 사명은 신자요 시민인 평신도가 교회와 세속 안에서, 영적 질서와 현세 질서 안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이 두 질서 안에서 수행하는 사도직의 분야는 다양하다. 평신도 교령은 교회의 여러 단체들, 가정, 청소년들, 사회환경, 국가질서와 국제질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들 분야에서 평신도는 개인적으로나 단체에 가입하여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다. 개인 사도직은 교회의 자유가 심히 제한된 지역이나 소수의 가톨릭 신자가 분산되어 있는 지역에 특히 기대된다. 이런 지역이 아니라면 조직적 사도직이 바람직하다. 그 이유는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하느님께서 신자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한 몸에 결합되기를(1베드 12:12) 원하실 뿐 아니라 사도직 자체가 현실적으로 공동생활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도직 수행 단체는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발기하여 운영해 나가기도 하고 교회의 권위자가 영적 목적을 지향하는 사업 중에서 특정한 것을 선택하여 특별히 추진시키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이건 모든 사도직은 전교회의 사도직에 결합되어야 한다. 주교들과 일치하며 여러 사도직 단체 상호간에도 협력해야 한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