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임금의 특지(特旨)를 받아 중죄인을 다스리던 관청. 줄여서 금부(禁府)라고 하며, 왕부(王府) 또는 금오(金吾)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라는 명칭으로 설치된 후 순위부(巡衛府),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 등의 명칭을 거쳐 1414년(太宗 14년) ‘의금부’라는 명칭으로 정착되었고 연산군(燕山君) 때 잠시 밀위청(密威廳)으로 개칭되었다가 중종(中宗) 때 환원되었다. 의금부의 관원으로는 우두머리인 종1품(從一品)의 판사(判事) 외에 정2품(正二品)의 지사(知事), 종2품(從二品)의 동지사(同知事), 종4품(從四品)의 경력(經歷), 종6품(從六品)의 도사(都事), 나장(羅將) 등이 있었다. 직무로는 왕족의 범죄, 국사범, 반역모반죄 등의 중죄와 사헌부(司憲府)에서 논핵(論劾)한 특수범죄 및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범한 죄 등으로 다스렸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면지도급 천주교인을 국사범, 반역모반 죄인으로 엄하게 다스렸다. 의금부에서 추국(推鞫)을 받은 천주교인으로는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의 이승훈(李承薰) · 이가환(李家煥) · 이기양(李基讓) · 강이천(姜彛天) · 황사영(黃嗣永) 등과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의 유진길(劉進吉) · 정하상(丁夏祥) · 조신철(趙信喆) 및 앵베르 주교(Imbert, 范世亨) · 모방(Maubant, 羅) 신부 · 샤스탕(Chastan, 鄭) 신부 그리고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의 남종삼(南鍾三) · 홍봉주(洪鳳周) 등이 있는데, 의금부에서 추국한 것을 기록해 놓은 추국안(推鞫案)에는 이들에 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의금부는 의금사(義禁司)로 개칭되었다.
응송 [한] 應誦 [라] responsorium
성무일도(聖務日禱)에 있어 독서나 성경소구에 대한 응답의 노래, 그 목적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마음속에 새기면서 기도와 관상(觀想)으로 전환시키고, 그것의 시적인 미(美)로써 즐거운 다양성을 주는 데 있다.
을해박해 [한] 乙亥迫害
1815년[乙亥年]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일어난 박해.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종결된 후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반포되었다. 이 척사윤음은 천주교 탄압의 법적 근거가 되어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교우들은 경상도와 강원도의 산골로 숨어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며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14년 전국에 기근이 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우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의 탐욕과 지방관의 자의(恣意)로 중앙의 지시도 없이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먼저 경상도에서는 1815년 부활 축일에 청송의 노래산(老萊山)에서 고성운(高聖云) · 고성대(高聖大) 형제 등 35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경주진영(慶州鎭營)으로 압송되었고, 이 중 19명은 배교, 2명은 옥사하여 14명이 다시 대구감영(大邱監營)으로 이송되었다. 같은 시기 진보(眞寶)의 머루산에서는 김시우(金時佑)를 포함한 33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안동진영(安東鎭營)에서 20명이 배교하고 나머지 13명이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영양(英陽)에서는 김종한(金宗漢), 김희성(金稀成) 등 6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구감영에는 33명의 교우가 갇히게 되어 경상감사 이존수(李存秀)는 조정에 제를 올려 이들의 처형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처형은 1년 6개월 후에야 결정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35명의 교우 중에 26명이 옥사, 병사하고 1916년 12월 16일(음 11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을 때는 고성운, 고성대, 김종한, 김희성, 김화춘, 최성열(崔性悅), 이시임(李時任) 등 7명의 교우들만 남아 있었다. 한편 강원도에서는 1815년초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원주감영(原州監營)에 갇혔으나 대개는 배교하교 석방되거나 유배되었고 김강이(金綱伊)만이 12월 5일(음 11월 5일) 옥사하였다. 을해박해는 이것으로 형식상 종결되었다. 그러나 경상도와 강원도에 새로 형성된 많은 교우촌들이 파괴되었고, 100여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30여명의 교우가 순교했을 뿐 아니라, 비록 체포되지 않았을지라도 많은 교우들이 재산을 약탈당하고 쫓겨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어 이 지역에서 교회는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 [한] 乙巳秋曹摘發事件
을사년(1785년) 봄 추조(秋曹), 즉 형조(刑曹)의 금리(禁吏)들이 명례방(明禮坊, 지금의 明洞)에서 모임을 갖던 천주교인들을 적발 체포한 사건. 1785년 봄 이승훈(李承薰), 이벽(李檗), 정약전(丁若銓) · 정약종(丁若鍾) · 정약용(丁若鏞) 형제, 권일신(權日身) 부자(父子) 등이 명례방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종교적 모임을 갖고 이승훈이 천주교 교리에 관해 강론을 하고 있을 때 형조의 관리들이 우연히 이를 적발, 모임에 참가한 이들을 체포하고 천주교 서적과 성화상(聖畵像)들을 압수하였다. 이때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체포된 이들이 모두 사대부(士大夫)이므로 중인 출신의 집주인 김범우만을 가두고 나머지 사람들을 훈방했으나 권일신은 그의 아들과 이윤하(李閏夏), 이총억(李寵億), 정섭(鄭涉) 등과 함께 형조로 가서 김범우의 석방과 성화상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화진은 이들을 돌려보내고 김범우를 간단히 문초한 다음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유배시켰다. 이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이 사건이 유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짐으로써 이해 3월(음) 태학생(太學生) 이용서(李龍舒), 정숙(鄭淑) 등은 척사위정의 통문(通文)을 돌려 이 사건과 관계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뿐 아니라 친구 친척에게까지 천주교를 물리치라고 강요했고, 안정복(安鼎福)은 직접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반향으로 인해 이벽, 이승훈 등은 배교하게 되고, 김범우는 유배생활 1년 만에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여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을묘실포사건 [한] 乙卯失捕事件 [관련] 을묘박해
1795년(乙卯年) 6월 27일(음 5월 11일) 포청에서 최인길(崔仁吉), 윤유일(尹有一), 지황(池璜) 등을 체포하여 그 이튿날로 장사(杖死) 시킴으로써 일어난 사건. ‘타살삼한사’(打殺三漢事), ‘포청삼적경폐사’(捕廳三賊徑斃事), “포장사”(捕杖事)라고도 불린다. 이 사건은 포청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무의 거처를 알아내려고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을 고문하던 중 이들이 장사함으로써 발단되었다. 포청에서는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알아내지 못한 채 이들 세 사람이 장사하자 시체를 강물에 던져 버리고 사건을 은폐했으나 2개월 뒤인 7월 6일(음) 이 사실을 안 대사헌 권유(權裕)가 상소(上疏)를 올려 세 사람을 일찍 죽게 하여 주문모 신부를 놓친 포장의 죄를 물었다. 이어 며칠 뒤에는 부사직(副司直) 박장설(朴長卨)이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이승훈(李承薰)을 사학의 교주로 고발하고 주문모 신부를 놓친 책임을 이들 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들은 주문모 신부의 일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들을 고발한 박장설이 유배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건은 점점 확대되어 천주교 배척과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을 탄핵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게 되자 이로 인해 이가환은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정약용은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되고 이승훈은 예산(禮山)으로 유배되었다. 이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이 사건은 을묘박해의 발생 원인이 되어 비밀리에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이 전국에 내려지면서 지방에서는 박해가 가열되기 시작하였다. (⇒) 을묘박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