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德源) 성 분도수도원(聖芬道修道院)의 실라이허(Schleicher, 安) 신부가 사도(使徒)들의 서간과 묵시편을 한글로 번역하여 1941년 덕원수도원에서 간행한 책. 1935년에 개최된 한국 주교회의에서는 성서의 국역(國譯) 간행을 결정하여 그 작업을 덕원 성분도수도원에 위임하였고, 성분도수도원에서는 실라이허 신부에게 위임하여 4년 만에 완료하였다. 당시 신약성서 중에서 4개의 복음서(福音書) 즉 ≪사사성경≫(四史聖經)은 1910년에, 사도행전 즉 ≪종도행전≫(宗徒行傳)은 1922년에 번역되어 있었다. 719편에 달하는 이 책의 원본은 라틴어 불가타(Vulgata) 원본과 그레시아 원본을 함께 사용하였고, 각 서간마다 서언(序言)을 첨부하였다. 바울로 사도의 서간편(書簡篇)에는 로마서(書)를 비롯한 14편, 가톨릭 서간편에는 야고보서(書)를 비롯한 7편의 서간과 서언이 수록되어 있다. 서언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설라이허 신부 외에 번역작업에 절대적인 도움을 준 이가 김용학(金龍學)이었고, 최병권(崔炳權) 신부가 번역원고의 대조 및 정정하는 일을, 수도원장 로트(Roth, 洪泰華) 신부가 교열하는 일을 도왔다.≪≫
신용산본당 [한] 新龍山本堂
서울교구 소속본당. 주보는 성모성심. 현 명칭은 삼각지본당이아 1946년 3월 중림동(약현)본당을 모본당으로 하여 분리 발족되었다. 그러나 1948년 3월에야 초대 본당주임으로 이계광(李啓光, 요한) 신부가 부임했고, 1950년 3월 2대 주임 구천우(具天祐, 안토니오) 신부가 부임했으나, 몇 달 후 6.25전쟁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 때부터 3년간 이 본당은 신부가 없는 성당으로 있으면서 홍계명 총회장을 중심으로 성전을 지켰다. 1953년 3대 봉희만(奉喜萬, 안토니오) 신부가 부임. 1954년 9월 4대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 재건을 위한 노력이 많았다. 1957년에 부임한 5대 김창린(필립보) 신부는 성가수녀회 분원을 마련, 두 수녀를 맞아들일 수 있게 되었으며, 이 무렵의 신자수는 1,500명을 헤아렸다. 1968년 7대 황인국(마태오) 신부가 부임, 1970년 4월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뇌조리에 본당토지 4만평을 마련, 1970년 12월에는 교세 확장으로 인해 산하 이촌동과 한강로 일부를 한강본당으로 분리하였다. 1971년에는 현 한강로 1가의 대지(472평)에 새 성당을 신축, 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 대주교의 집전으로 축성 미사를 봉헌하였다. 1972년에는 본당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이 마련되었다. 현재 11대 홍성만(洪性萬, 미카엘) 신부가 본당주임으로 있으며, 신자수는 2,209명(1983년 현재)이다.
신용협동조합 [한] 信用協同組合 [영] credit union
종교나 직장, 지역 등 상호유대를 가신 개인 또는 단체 간의 협동조직을 기반으로 자금의 조성과 이용을 통해 서로의 복리를 도모하는 비영리 금융기관인 신용협동조합은 1850년 독일에서 처음으로 도시와 농촌에 조합이 창설된 후, 이탈리아 등 세계 각국으로 보급되어 갔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 5월 1일 부산의 중앙본당 신자들과 메리놀병원 직원들로 구성된 성가(聖家) 신용협동조합이 그 효시가 되었다. 이 조합은 메리 가브리엘라(Mary Gabriella Mulherin) 수녀의 정성어린 노력에 의해 탄생된 것으로 가브리엘라 수녀는 ‘한국 신용협동조합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그 2개월 후인 6월 26일에는 서울에서 또 천주교회 신자들을 회원으로 하는 가톨릭중앙조합이 창립되어 신용협동조합 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불신 풍조와 4.19, 5.16 격동 속의 불안한 정세는 잠시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1964년 4월 55개의 조합이 모여 한국 신용협동조합연합회를 결성, 5월에는 국제기구에도 가입하였다. 그리고 1979년엔 조합원 70만명에 자금 1,000억 원을 돌파하는 발전을 보였다. 1972년 갈망하던 신용협동조합법(법률 2338호)이 시행된 다음, 출자 · 대출한도 · 이자율 · 예탁금 · 상환준비금 등의 규정에 따라 법적 보장을 받게 됨으로써 우리나라 신용협동조합은 튼튼한 토착화(土着化)에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한편 1972년 이후 새마을운동을 신용협동조합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순수한 민간의 자발적 연대성에 의해 발전되어야 할 신용협동조합 운동에 이질적 작용이 되고 있다는 소리가 높다.
[참고문헌] 信協運動 20年史, 信用協同組合聯合會, 19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