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념 : 풍수지리설은 도읍(都邑) · 궁택(宮宅) · 능묘(陵墓)에 적합한 장소를 점치는 지상학(地相學)으로서, 지리가 인간생활에 미치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논하는 이론이다. 즉, 이는 국가나 가문 내지는 개인의 성쇠(盛衰)가 자신의 재질이나 노력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정기를 잘 얻느냐 못 얻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자연정기론(自然精氣論)의 일종으로서,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自然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상이다. 풍수지리설은 지리풍수설, 재래로 풍수설로도 불리고 있으며 음양(陰陽)사상, 도참(圖讖) 사상과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다.
풍수지리설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 바, 산 사람의 거소(居所)를 취급하는 양적(陽的) 풍수와 죽은 사람의 거소를 다루는 음적(陰的) 풍수로 구분된다. 이 때 음적 풍수를 보통 음택풍수(陰宅風水)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양적 풍수에는 양기(陽氣)풍수, 양택(陽宅)풍수가 있으며, 국가의 도읍(都邑)과 관련되는 국도(國都)풍수도 넓은 의미로 볼 때에는 여기에 속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양기풍수는 도읍이나 군현(郡縣) 등 취락의 터와 관련된 사상이며, 양택풍수는 개인의 주택과 관련하여 논의되는 풍수설이나, 양기풍수와 양택풍수를 별다른 구별 없이 사용하기도 한다. 풍수설은 산(山) · 수(水) · 방위(方位) · 사람 등 네 가지 요소의 결합에 의하여 성립되며, 이 결합에 근거를 두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풍수지리설에서는 구체적으로 간룡법(看龍法) · 장풍법(藏風法) · 득수법(得水法) · 정혈법(定穴法) · 좌향론(坐向論) · 형국론(形局論) 등의 형식논리를 갖고 있다. 간룡법은 산을 살피는 것인바, 풍수용어로 용(龍)은 산을 뜻한다. 간룡법에서는 조산(祖山)으로 불리는 명산(名山)으로부터 시추어진 정기(精氣)인 용맥(龍脈)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장풍법은 풍수설의 요체로서 명당(明堂) 주변의 지세(地勢)에 관한 풍수 이론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땅속에서 발생하는 생기(生氣)를 포용하고 음양의 원기(元氣)를 지닌 바람을 잡아 모아서 간수하는 문제를 논하는 이론이다. 득수법은 산과 물의 조화를 논하는 이론이다. 정혈법은 풍수설에서 얻고자 하는 장소인 혈(穴)을 정하는 데 관계되는 이론이다. 혈은 음택의 경우 시신이 직접 땅에 접하여 그 생기를 얻을 수 있는 곳이며, 양기의 경우 거주자가 실제로 삶의 대부분을 보내게 되는 곳으로 설명되고 있다. 형국론은 혈의 형체와 기세를 어떠한 물체의 형상에 대비하여 표현한 말로서, 혈과 대비되는 물체의 정기를 그 혈이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론이다. 좌향론은 혈의 위치에서 본 방위를 청룡(靑龍 · 北), 백호(白虎 · 南), 주작(朱雀 · 南), 현무(玄武 · 北)로 나누어 설명하되, 이러한 방위 중 그 혈에서 가장 적절한 방위인 좌향(坐向)을 결정하려는 이론이다. 풍수론에서는 이와 같은 형식논리를 종합하여 취락의 입지를 결정하거나 건축물과 묘소의 위치를 정하고 있으므로 양기풍수와 음택풍수는 상호 동일한 발상법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풍수지리설을 주로 연구하고 작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풍수가(風水家), 풍수(風水), 감여가(堪輿家), 지리가(地理家), 지사(地師), 음양가(陰陽家) 등으로 부른다.
2. 전래과정 : 풍수지리설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인 기원전 4∼5세기경에 구체적으로 출현하였고, 남북조(南北朝) 시대와 당대(唐代)에 이르러 종전의 소박한 인문지리적 사고방식과 음양오행사상이 결부되어 그 체계화가 가능하였다. 한국에 풍수지리설이 전래된 과정은 중국적 음양오행사상이나 천문관의 전래와 병행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즉, 풍수지리설은 삼국시대 초에 전래되었는데, 고구려 및 백제의 능묘에 사신도(四神圖)가 등장하고 있으며, 공주(公州 松山里) 무령왕릉(武寧王陵)의 장법이 음양오행사상 및 풍수지리설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도 신라 탈해왕(脫解王)이 “지리를 겸하고 알고 있었다”(兼知地理)는 구절도 중국적 풍수사상의 전래와 관계되는 사료로 해석된다. 한편, 한국사에 있어서 풍수지리설이 본격적으로 성행하게 된 시기는 신라 말기인 9세기경이었다. 당시에는 중앙 귀족에 대립하여 육두품(六頭品) 계열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호족(豪族)들의 중앙정부에 대한 이반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혼돈된 시대상과 관련하여 풍수지리설이 본격적으로 발전하였고, 도선(道詵, 827∼898)은 풍수지리설의 보급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풍수지리설은 고려왕조 초기부터도 적극 수용되고 있으며,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이를 자신의 국가통치에 활용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즉 그는 이를 이용하여 사찰의 남설을 막아보고자 하였으며, 왕도지기설(王都地氣說)을 가지고 자신의 북진정책을 합리화시켰다. 그리고 그는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자신의 통일정책에 비협조적이었던 차현(車峴) 이남의 사람들에 대한 탄압을 합리화시켰다. 또한 묘청(妙淸) 일파의 서경천도론(西京遷都論)도 풍수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주장이다. 한편 12세기경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나는 기록을 검토해보면, 고려 중엽 이후부터 풍수지리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이들을 통하여 한국의 풍수지리설도 체계화되어 갔던 것으로 파악된다. 고려왕조 이래 조선왕조 시대에 이르러서도 지리업(地理業)은 잡과(雜科)의 일종으로 과거제도 아래에서 존속되어 왔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건국 직후인 15세기경에 이르러 양기풍수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된 바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왕조에서 풍수지리설이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17세기 후반기 이후였다. 17세기는 15세기에 확립된 주자학적 학문 전통이 변질되어 가던 시기이며, 예학(禮學)이 성행하던 때였다. 예학이 특히 강조되던 문화풍토와 관련하여 부모에 대한 효(孝)와 조상에 대한 제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리고 장술(葬術)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장례(葬禮)가 강조됨에 따라 풍수지리설의 음택풍수부와 관련된 구산(求山)의 풍습이 당연시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음택풍수설의 성행은 조선왕조 전기와는 다른 특이한 현상이었다. 조상의 묘를 명당(明堂)에 쓰고자 하는 당시 이와 같은 상황은 조상에 대한 효도의 표시이며,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의미를 지닌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음택풍수설은 충효(忠孝)를 한 맥락에서 강조하던 당시, 효(孝)가 영달의 기본이었기 때문에 조상에 대한 효심을 외적으로 표현하여 유교사회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성행하게 된 측면을 간과할 수는 없다. 또한 음택풍수설은 17세기 중엽 이후 가문(家門)의식의 강화와 병행하여 가문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쓰여진 사례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음택풍수설은 구산의 본래 목적인 효심의 표현이라는 측면을 떠나서 자신과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방법으로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음택풍수설인 풍수설의 주류를 이루게 된 조선 후기의 사회에서는 주자학을 신봉하던 전근대적 지식인들도 이에 경도되어 갔다. 이는 주자학적 사유방식의 변동과 관련된 현상일 뿐만 아니라, 주자학적 지식인들이 주자학의 입장에서 볼 때 비정통적인 풍수설에 경도된 것은 일종의 자기 타락현상으로도 파악될 수 있다. 한편, 음택풍수설의 성행이 많은 사회적 병폐를 낳게 되자 이에 대한 반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들은 음택풍수설의 허구성을 예리하게 지적하여 비판해 나갔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 깊이 침투된 풍수지리설이 하루 아침에 극복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개항 이후에도 풍수설은 계속 성행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침략을 받은 직후에도 이 현상은 계속되어, 당시 소송(訴訟)의 대부분을 음택풍수와 관련된 묘송(墓訟)이 차지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일제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음택풍수에 관한 관념들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
3. 평가 : 풍수지리설은 동양의 전근대적 자연관을 반영하는 사상이며, 소박한 지리결정론적(地理決定論的) 사고방법의 일종이다. 그리고 풍수지리설은 그 전개과정에서 기복적(祈福的) 요소를 띠우게 되었다. 그러나 풍수지리설 가운데 양택풍수설, 양기풍수설 등은 오랜 생활경험의 축적을 통해 얻어진 결론으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취락의 입지나 그 주택지를 결정할 때 배산임수(背山臨水), 남사면(南斜面), 용호사성(龍虎砂城) 등의 지역을 선호하는 경향은 지구 북반구 중위도(中緯度) 지방의 취락이나 주택의 입지로서는 상당한 타당성을 가진 견해로 평가되고 있다. 반면에 음택풍수설은 죽은 이도 산 사람과 같이 존중하고자 하는 관념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이와 같은 본래의 의미가 잊혀져 갔고 기복적 의미로 전환되었다. 음택풍수설에 혼재되어 있는 이 기복적 요소는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풍수지리설을 말할 때에는 흔히 음택풍수설만을 지칭하고 있다. 이는 교회 전래 당시 한국 풍수지리설의 주류가 음택풍수설이었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박해시대 이래 풍수설 즉, 음택풍수설을 배격해 왔다. 교회는 1857년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를 통하여 미신행위를 배격한 바 있었고 그리고 이와 같은 태도는 ≪한국천주교지도서≫(韓國天主敎指導書)에서도 계속 드러나고 있다. 또한 1959년에 간행된 윤형중(尹亨重)저 ≪상해 천주교요리≫(詳解天主敎要理)에서도 풍수지리설과 관련된 미신행위를 천주십계 중 제1계명을 범하는 미신행위로 엄격히 금지한바 있었다. 이러한 금지는 음택풍수설에 포함되어 있는 기복적 요소를 배격함으로써 하느님이 인간 화복(禍福)의 주재자임을 선명히 하려는 의도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음택풍수설에서 죽은 이를 명당에 모시고자 하는 데에는 죽은 이에 대한 추모의 정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음택풍수설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기복적 성격을 상실한 채 민속(民俗)의 일종으로 시행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풍수지리설에 대한 전통적인 엄격한 배격 태도에는 수정이 가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도참설 (趙珖)
[참고문헌] 風水地理叢書, 景仁文化社, 1969 / 崔昌祚, 韓國의 風水思想, 民音社,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