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전체공의회. 보스포러스해협을 두고 비잔틴과 마주한 도시 칼체돈에서 451년 열렸는데 황제 마르치안(Marcian)이 소집, 500∼600명의 동방 주교들이 참석, 서방측은 각각 2명씩의 아프리카 주교 및 교항 대표만이 참가하였다. 에우티케스(Eutyches)의 이단, 즉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 Monophysitis)의 문제를 토론하고 도적(Latrocinium) 공의회의 결정(449)을 폐기하고 에우티케스를 단죄하였으며, 소위 ‘칼체돈 정의’라고 불리는 신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서방교회는 이 공의회의 교의적 결정들을 모두 승인하였으나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에게 총대주교의 명칭을 부여하고 그 교구를 로마에 다음가는 교구로 인정하는 제28조의 교회법을 거부하였다. 이는 전통이 더 깊은 동방의 다른 총대주교구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 공의회
칼빈주의 [한] ∼主義 [영] Calvinism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칼빈(1509∼1564)이 인간의 예정(predestination)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반대하여 일으킨 종교사상. 칼빈주의에 의하면, 아담이 타락한 결과, 인간에게는 이미 의지의 내적(內的) 자유가 없고 인간은 하느님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개인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미리 천국이 아니면 지옥으로 가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따라서 천국으로 예정된 선택받은 사람이 지옥으로 가는 법은 없다. 칼빈주의의 요점은 그의 저서 ≪그리스도교 요강≫에 잘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하느님은 절대무한(絶代無限)한 존재로 우주에서 하느님만이 참된 유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피조물은 하느님의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윤리적 종교적 의지의 자유를 철저히 부정하는 절대적 ‘예정설’이다. 그의 교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함을 외적(外的)으로 결부시키려는 점에 있고, 그것이 이 신앙의 유일한 구원의 전제가 된다. 따라서 전례나 성사도 구원에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선택받은 자들만의 단체이며 내부에는 사제직이나 교계(敎階)제도도 없고, 교단은 공화적(共和的)으로 조직되어 국가로부터 독립된다. 국가는 관념적으로 신정제(神政制)를 취해야 된다고 하였다.
칼빈주의는 너무 엄격했던 처음의 절대적 예정설이 완화되면서 급속히 교세가 확장되었으며 변증법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이 칼빈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설은 막스 베버(Max Weber)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노동의 쾌락과 노동의 성과를 하느님의 선택받은 증표로 보는 칼빈주의의 구원사상은 일반적으로 경제적 정신의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칼빈주의의 노동윤리, 즉 ‘세속생활의 금욕주의’라는 윤리가 자본주의의 발생기에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퓨리턴에게 인민주권(人民主權)의 사상을 불어넣음으로써 민주주의 정신을 촉진시켰다.
칼빈 [원] Calvin, Jean [관련] 칼빈주의
Calvin, Jean(1509∼1564). 마르틴 루터 이후 가장 중요한 프로테스탄트 개혁가. 신학자. 프랑스 느와용(Noyon)의 중류가정 출신으로 파리에서 신학을(1523∼1528), 그 이후에는 오를레앙(Orleans)과 부르즈(Bourges)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1527년부터 성직과 신앙문제에 회의를 갖기 시작하였으며, 1531년 그에게 신학과 법학을 공부시킨 부친이 사망하자 파리로 돌아와 인문주의 학문을 하였다. 1533년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안을 잡았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하면서 교회를 초창기 사도시대의 순수성으로 복귀시킬 사명을 느끼고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1536년 프랑스왕 프랑스와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스위스의 바젤(Basel)로 피신하였으며 여기서 본격적인 개혁가로 활동하였다. 이듬해 라틴어로 ≪그리스도교 요강(要綱)≫을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박해를 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에 언급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저서는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의 최고의 신학적 저술로 꼽히는데 그 뒤 여러 번 개작(改作)되었다. 이즈음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종용한 파렐(Guillaume Farel)과 함께 제네바로 건너갔다. 당시 제네바는 인구 1만 3,000명 가량의 도시로 시민들은 자치권을 얻기 위해 가톨릭 주교와 동맹관계에 있는 사보이 공작에 맞서 이웃 도시 베른(Bern)의 프로테스탄트들의 도움을 받아 투쟁하고 있었다. 칼빈은 시 참사회에 교회정부에 관한 적요서(摘要書) 격인 ≪Articuli de Regimine Ecclesiae≫를 제출하는 등 처음부터 소위 신정정치에 기반을 둔 엄격한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으므로 1538년 가톨릭세력과 시민들에 의해 파렐과 함께 추방되었다.
추방기간 동안 칼빈은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의 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았고(1538∼1541), 부처(Martin Butzer, 1491∼1551년)와 친교를 맺었다. 한편 ≪로마서 주석≫을 포함한 여러 주석서들을 집필하고 유명한 ≪추기경 사돌레토(Sadoleto)에게 보내는 서한≫(1539)을 썼으며, 1541년에는 라티스본(Ratisbon) 의회에서 멜란히톤(Melanchthon)과 알게 되었다. 그 해 그는 지지자들에 의해 제네바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향후 14년간 신정정치를 폈다. 복귀하던 해 11월 당국에 제출한 ≪기독교요강≫(Ecclesiastical Ordinances)은 이 신정정치의 토대가 되는 글로서 후에 칼빈주의 교회정책의 골격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칼빈의 이상적인 도시국가를 향한 투쟁이 시작되었는데 제네바 시민들의 사생활은 물론 무용이나 게임과 같은 오락까지도 법률로 금하는 엄격성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저항을 받았으나 도시의 완전한 자치권을 인정받은 1554∼1555년까지는 사형이나 추방 등을 통해 완전히 진압되었다. 칼빈의 통치기간 중 주위 국가들로부터 많은 피난민들이 제네바로 유입되었으며 외국에서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이 특히 그의 조국 프랑스에서 행하여졌다. 말년에는 중병에 시달렸으나 끝까지 설교를 계속하며 교회국가의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였다.
그는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조직가, 교회정치가, 교육자이자 모든 개혁가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가였다. 그는 신학적 통찰력과 주석학적 재능을 겸비하였으며, 자세하면서도 명쾌하고 간결한 문장을 구사하여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관한 주석들 뿐 아니라 개혁과 예정(豫定)에 관한 다수의 논문들을 제네바에서의 통치기간 중에 집필하였다. 이후 칼빈의 사상과 이념은 제네바를 중심으로 하여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 독일의 라인강 지방으로 전파되었으며 특히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은 위그노로 불렀다. 이들은 가톨릭 교도들과의 충돌로 위그노전쟁(1562∼1598)을 일으켰으며 1598년의 낭트칙령으로 위그노파의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 칼빈주의
[참고문헌] J.T.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New York 1954 / G.E. Harkness, John Calvin: The Man and His Ethics, New York 1958.
칼레 [원] Calais, Alphonse
Calais, Alphonse(1833∼1884).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성(韓國姓)은 강(姜).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한 뒤 1860년 7월 5일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의 선교사로 이듬해 4월 7일 한국에 입국, 1866년까지 5년 동안 경상도의 서부지역에서 전교활동을 벌였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로 여러 차례 위험을 넘기고 산 속에 피신해 있다가 이해 10월 페롱(Feron, 權) 신부와 함께 한국을 탈출, 중국으로 피신하였고, 이듬해부터 여러 번 한국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병인박해 때 얻은 병이 악화되어 부득이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1869년 4월 시토회 수도자가 되어 모벡(Maubec) 수도원에서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일생을 마쳤다. 주요 저술로는 ≪강신부 훈계≫(필사본)가 있다.
[참고문헌] Marie Calais, Des Missions Coreennes au Cloitre Cistercien, 1833-1884, Belgique 19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