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교감략≫
감독 [한] 監督 [라] episcopus [영] bishop [관련] 주교
사도시대 이후 교회에 봉사하는 최고의 성직계급의 명칭. 지금의 주교에 해당한다. 신약성서에는 ‘감독’ 또는 ‘감독자’로 나온다. 성직계급을 뜻하는 말로 감독이란 표현은 사목서간(司牧書簡)에서 사용되었다. 2세기 중엽부터 교회는 감독을 사도들의 권위를 이어받은 직계 후계자로 생각했고, 사도적 신앙을 이어받은 교회의 주요한 보호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95년 경 처음으로 글레멘스 서한에 나타나는데, 이 서한은 로마 신자들이 고린토 신자들에게 그들의 감독을 파면시킨 데 대하여 항변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글레멘스는 마을과 도시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때 사도들은 “그들의 첫 개종자들을 성령으로 시험한 후에 장차 믿을 사람들의 감독과 장로(presbyter)[지금의 사제]로 임명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성서에 예시되어 있었다. 사도들은 감독직을 위해서 다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그들이 죽은 뒤에 다른 ‘시험을 통과한 남자들’이 이 직책, 즉 ‘성찬을 분배하는 의식’의 직책을 계승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글레멘스의 서한에 의하면, 감독의 임무는 성찬의식을 주관하는 일이었으며, 그 의식을 집전할 때 ‘장로’의 보조를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로마제국의 박해 위험이 점차 증대되어 가고 있었다는 관점에서 볼 때, 감독은 성사의식을 위한 모임이 관헌에게 발각되거나 위협을 받지 않도록 가능한 한 공동체를 보호할 책임을 진 것으로 보인다. 교회에서의 감독직의 발전은 사도들이 죽은 뒤를 대비하여 권위 있는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데서 이루어진 것 같다. 감독은 사도들로부터 임명을 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감독은 사도들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불 수 있다. (⇒) 주교
[참고문헌] E. Vacandard, vie de St. Bernard, Paris 1895.
갈매못
순교지. 충청남도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忠淸南道 保寧郡 鰲川面 永保里)에 소재하고 있다. 대전에서 청양, 대천을 거쳐 오천면 사무소를 지나 바다를 낀 도로를 따라 3㎞쯤 가면 이 지점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병인박해 때(1866년) 조선교구 5대 교구장인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 오메트르(Aumaitre, 吳), 위앵(Huin, 閔) 신부, 다블뤼 주교의 복사인 황석두(黃錫斗, 루가), 배론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張周基, 요셉) 등 5명이 군문효수(軍門梟首)를 당하였다. 1845년 입국한 다블뤼 주교는 베르뇌(Berneux) 주교의 순교로 1866년 3월 7일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가 4일째인 11일 황석두와 함께 내포(內浦) 지방에서 붙잡혔다. 다블뤼 주교의 체포소식을 들은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도 더 많은 교우들이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수하였다. 서울로 압송하였다가 국혼이 가까운 기간이었으므로 서울에서 죄수의 처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보령수영(保寧水營)의 갈매못에서 처형키로 되었다. 갈매못으로 향하는 죽음의 대행진을 따라 순교하기로 결심한 장주기도 이들의 행렬에 일원으로 참가, 성 금요일인 3월 30일 순교하였다. 유해는 3일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되었다가 6월초 교우들에 의해 홍산(鴻山) 서들골로 옮겨졌고, 뒷날 다시 명동성당으로 옮겨졌다. 1975년 9월 대천본당 주임 정용택(鄭鏞澤, 요한) 신부가 당시의 순교 위치를 확인하고, 이곳에 순교복자비를 세웠다.
갈릴레이사건 [한] ~事件 [영] Galilei case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이며 천문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에 관한 사건, 갈릴레이는 1609년 갈리레이식 망원경을 발명, 천체를 관측한 결과를 가지고 프톨레마이오스적인 천동설(天動說)을 부정하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였다. 이에 신학자들은 성서를 근거로 하여(여호 10:12, 집회 1:4), 갈릴레이를 비난하였다. 검사성성(檢邪聖省)은 사정을 상세히 조사한 뒤 1616년 교령을 발표, 코페르니쿠스의 ≪천체궤도의 운행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aelestium), 포스카리니(Foscarini)의 ≪욥기주해서≫, 디다쿠스 아 스투니카(Didacus a Stunica)의 ≪욥기주해서≫ 등 3권을 금서 처분하고 갈릴레이에게는 침묵의 의무를 지키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설을 가설(假說)로서만 가르칠 것을 약속하였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도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결정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632년 갈릴레이는 프톨레마이오스설과 코페르니쿠스설을 비교한 ≪2개의 주요체계에 대한 대화≫(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를 발표, 노골적으로 코페르니쿠스설을 옹호하였다. 갈릴레이는 다시 소환되어, 검사성성에서 22일 동안 구류처분을 받고 갇히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설을 증명된 사실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갈릴레이는 풀려났다. 위의 책은 금서 처분되었다가 1835년 코페르니쿠스 문헌과 함께 해제되었다. 1642년 갈릴레이가 피렌체에서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 사건은 끝났지만, 그 파문은 컸다. 즉 이 사건을 통해 과학적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했던 중세 가톨릭의 소극적인 모습이 확인되었다. 이로 인해 종교는 과학과 대립하거나 적대적인 것으로 오인되기도 하였다.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통해 보완적인 역할을 강조하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물론 사건 당시 관여했던 로베르 벨라르미노 같은 이는 “태양이 고정되어 있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이 증명되기만 한다면 “이러한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되어지는 성서는 다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여 과학의 성과에 대한 적극적 수용의 자세를 보이긴 했지만, 일반적인 분위기에 묻혀 발현되지 못하였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갈릴레이의 명예는 정식으로 회복되었다.
갈릴래아 [라] Galilaea
팔레스티나 북부에 있던 고대의 지역명으로 요르단강 서쪽의 비옥한 평야와 그 외의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약 2,400㎢ 이다. 어린 시절 예수가 자라던 마을이 이곳 갈릴래아 지방의 남쪽에 있고, 사도들의 대부분도 이 갈릴래아 출신이었다(마태 4:18, 사도 1:11). 예수의 주요 전도무대였고, 많은 기적들도 이곳 갈릴래아에서 행해졌다(마태 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