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신경
종교학 [한] 宗敎學 [영] science of religion [독] Religionswissenschaft
종교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의 한 분야로 종교현상을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규명한다. 종교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학문으로는 신학, 종교철학, 종교사, 종교현상학, 종교사회학, 종교민속학, 종교심리학, 종교지리학 등이 있는데, 이 중 신학을 제외한 다른 모든 분야를 총칭하여 종교학이라 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다시 종교철학을 제외한 분야만을 종교학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까 종교학이란 종교를 연구대상으로 하여 종교를 이해하려는 학문이지만 특정종교를 호교론적으로 이해, 변호하려는 교의학(敎義學)이나 신학과 다르다.
종교에 대한 연구, 즉 종교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학설은 없다. 종교에 대해 비판적 분석을 시도한 그리스 철학자들에게서 그 기원을 찾으려는 사람도 있고, 그리스와 이방인들의 종교를 비교 검토하려 한 헤로도투스 같은 학자들에게서 그 기원을 찾으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에서 종교학을 처음으로 수립한 사람은 역시 뮐러(F. Max Muller)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산스크리트어와 고대종교를 연구한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종교학’이라 이름 붙여진 강의를 맡았고, 이 강의의 교재가 1873년 <종교학개론>(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이라는 서명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틸레(C.P. Tiele), 엘리아데(M. Eliade) 등에 의해 종교학은 여러 종교를 비교 연구하는 비교종교학 즉 종교현상학(phenomenology of religion)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성서학자 스미드(W.R. Smith)가 그의 저서 ≪셈족의 종교≫(1889)를 통하여 사회학적인 시각으로 종교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하면서부터 종교사회학(socialogy of religion)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쿨랑스(de Coulanges), 뒤르켕(E. Durkheim), 베버(M. Weber), 파슨즈(T. Poorsons), 레브라(G. Le Bras), 팽(E. Pin) 등에 의해 확립되고 발전한 종교사회학은 종교와 사회의 상관관계, 종교의 분포, 종교의 조직, 종교의 변화, 종교의 사회적 역할 등을 연구분야로 삼고 있다. 또 홀(G.S. Hall), 스타벅(E.D. Starbuck), 프로이드(S. Freud), 융(C.G. Jung), 제임스(W. James) 등에 의해 종교현상에 포함된 심리구성을 경험적으로 연구하는 종교심리학(psychology of religion)이 발전하였다. 이들과 아울러 발전된 종교사, 종교지리학, 종교 민속학 등도 종교의 본질을 밝히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종교철학 [한] 宗敎哲學 [영] Philosophy of religion [독] Religionsphilosophie [프] Philosophi
종교철학이란, 우선 종교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다. 종교철학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 규정은 곧 난문제들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종교철학에 대한 일반적 규정에 앞서,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들이 먼저 답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철학이 문제삼는 질문이 “종교, 도대체 그것은 무엇인가?” 또는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종교라고 하는가?”라는 질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종교철학이란, 인간의 삶에 깊이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종교’라고 하는 현상을 일반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해 보려는 학문이다.
종교철학의 특성은 첫째로, 종교현상을 ‘일반적으로’ 문제 삼는다는 데 있다. 즉 종교철학은 이러한 또는 저러한 개별적 종교를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한 개별적 종교의 타당성 내지는 그 정당성을 따로 문제 삼지 않을뿐더러, 개별적 종교들이 내세우고 있는 이러한 또는 저러한 ‘진리’(眞理)들 개별적으로 문제 삼지도 않는다. 종교철학의 특성은 둘째로, ‘이미 그리고 실제로 주어져 있는’ 종교현상을 문제 삼는다. 다시 말해서 종교철학은 우선 하나의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종교이론을 비로소 엮어내려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이상적인 종교를 구성해 내려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종교철학은 종교를 종교가 아닌 다른 것에로 환원시켜 버려서는 안 된다.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한 차원을 갖는 ‘종교적인 것’을 종교적인 것이 아닌 즉 ‘참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 등의 차원에로 환원시켜 버린다거나, 또는 종교를 인간학, 심리학, 사회학 등에로 환원시켜 버려서는 안 된다. 종교철학은, 어디까지나 이미 그리고 실제로 주어져 있는 종교현상을 일반적으로 문제 삼는다. 즉 있는 그대로의 종교현상 그리고 자기가 자기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의 종교현상을 일반적으로 문제삼는다.
1. 역사적 배경 : 넓은 의미에서의 종교철학은 종교와 더불어 생겨났다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일정한 개별적 종교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반성하면서, 그 종교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다거나 또는 그 종교를 반박하고 비판하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종교철학은 종교와 더불어 생겨났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의 그리고 본격적 의미에서의 종교철학이 학문으로 대두한 것은 지난 19세기부터의 일이다. 다시 말해서, 있는 그대로의 종교현상을 일반적으로 문제 삼으면서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해 보려는 시도로서의 종교철학은 근대의 신랄하고 근본적인 종교비판을 겪으면서 비로소 대두하게 되었다.
우리 인간은 태고적부터 종교를 신봉해 왔다. 비록 그 형태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로 다양하다 할지라도, 어느 종족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그 고유한 종교를 신봉해 왔다. 그리하여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태어나면, 그는 일정한 종교가 자기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또한 그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 종교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다른 민족과 본격적으로 접촉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 다른 종교와 깊이 접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세상에는 자기가 가진 하나의 종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즉 종교를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우연히 갖게 된 일정한 종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종교일반’(宗敎一般)을 문제 삼게 되었다.
계몽시대(啓蒙時代, 17∼18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자기 자신의 이성(理性)을 과감히 사용하라”는 계몽정신에 따라서, 사람들은 이제 삶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이성을 개입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성에 부합되지 않는 모든 ‘전통’(傳統)과 ‘권위’(權威)를 철저하게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계몽주의자들 눈에는 무엇보다도 바로 종교가 전통과 권위의 화신(化身)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계몽주의의 일차적인 비판의 화살이 향해진 곳은 바로 종교였다. 그리고 19세기에 대두한 실증주의(實證主義)는 사람들에게 종교란 쓸모없는 것이며 종교는 이제 단적으로 극복되어 버린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 주었다. 실증주의의 창시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는 인간정신이 역사적으로 세 단계를 거쳐 발전해 왔다고 하였다. 즉 첫째, 인간정신의 유아기라 할 수 있는 ‘신화적(神話的) 단계’이다. 이 단계는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은 가상적(假想的) 단계이다. 둘째, 인간정신의 청소년기라 할 수 있는 ‘철학적 단계’이다. 이 단계는 구체적인 것을 떠난 추상적(抽象的) 단계이다. 셋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정신의 성년기라 할 수 있는 ‘과학적 단계’이다. 이 단계는 실증적(實證的) 단계이며, 이 단계에 이르러 인간은 비로소 모든 것을 스스로 관찰하고 검증하여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 정신은 이제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식을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고 이러한 실증주의는 이제 종교를 신화적인 단계 즉 인간정신의 유아기에 속한 것이며, 그 시대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해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실증주의는 이제 종교가 더 이상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즉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깊이 심어 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의 철학은 이러한 시대정신을 다각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19세기 철학은 바로 ‘철학으로부터의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독일 관념론을 완성한 헤겔(G.W.F. Hegel, 1770∼1831)은 종교를 철학에로 지양해 버린다. 헤겔에 의하면, 철학의 대상은 영원한 지리 즉 신(神)이다. 그리하여 철학은 종교를 설명하면서 결국 자기 자신(철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이 자기 자신을 설명하면서 결국 종교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종교는 헤겔에 의해서 철학에 해소되고 만다. 이어서 헤겔 소장파에 속해 있던, 포이에르바하(L. Feuerbach, 1804∼1872)는 종교를 인간학(人間學)에로 환원시켜 버린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그 유개념(類槪念)으로 볼 때 무한하다. 인간은 개체로 볼 때 한정되어 있으나, 그 유개념 즉 인류라는 입장에서 볼 때 한정되어 있지 않고 무한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종교란 바로 ‘무한한 것’에 대한 의식이다. 그렇다면 이제 종교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갖는 자의식 즉 그 자체로 무한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갖는 자의식(自意識)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신에 대한 의식은 인간의 자의식이며, 신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자아인식이다.” 이와 같이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신의 문제는, 따라서 종교의 문제는 결국 단순한 인간의 문제로 환원되어 버리고 만다. 마르크스(K. Marx, 1818∼1882)는 포이에르바하의 종교이론에 열광한 나머지, 종교비판은 그 근본에 있어서 끝나버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저승의 진리가 사라져 버린 이 마당에서 이제 이승의 진리, 현실의 진리를 정립하는 것이 역사의 과제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 비판에 결론을 내리기라고 하듯이, 니체(F.W. Nietzsche, 1844∼1900)는 “신은 죽었다”고 외쳤다.
2. 종교철학의 성립 :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몇몇 철학자들은, 종교에 대한 철학적 토대를 모색하게 되었다. 즉 무엇이 종교인가? 종교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종교이게 하는 ‘종교적인 것’(das Religiose)은 무엇인가? 하고 진지하게 문제 삼게 되었다. 이러한 끈질긴 질문과 모색의 결과, 종교가 바로 종교이게 하는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거룩한 것’(das Heilige)이라는 사실에 착안하게 되었다. ‘종교적인 것’의 그 고유한 차원은 바로 ‘거룩한 것’이라고 하는 차원이라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종교의 철학적 토대로서의 ‘거룩한 것’을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은, 빈델반트(W. Windelband, 1848∼1915)이다. 그는 <종교철학 초안>(1884)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종교는 그 고유한 차원을 갖는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를 ‘종교적인 것’이 아닌 다른 것에로 즉 ‘참된 것’(眞, das Wahre), ‘선한 것’(善, das Gute), ‘아름다운 것’(美, das Schone) 등에로 환원시켜 버릴 수 없다고 하였다. 종교는 그 고유한 ‘거룩한 것’(聖, das Heilige)이라는 차원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바로 ‘종교적인 것’ 즉 ‘거룩한 것’을 문제 삼고 그것을 추구한다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적인 것’을 논리학, 윤리학, 미학 등에로 환원시켜 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종교적인 것’을 결코 철학, 인간학, 심리학, 사회학 등에로 환원시켜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빈델반트의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여, ‘거룩한 것’을 좀 더 넓게 그리고 좀 더 깊이 작업해 나간 것은 오토(R. Otto, 1869∼1937)이다. 그는 1917년 ≪거룩한 것≫(das Heilige)이라는 저서를 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거룩한 것’에 대한 기본적 작업을 전개시켰다. 그 뒤 셸러(M. Scheler, 1874∼1928), 틸리히(P. Tillich, 1886∼1965),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 벨테(B. Welte, 1906∼1983), 엘리아데(M. Eliade, 1907∼ ) 등은 그들의 특징을 살리면서도 오토의 기본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좁은 의미로 ‘종교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종교는 하나의 경험 내지는 체험(體驗)을 토대로 하고 있다. 즉 ‘종교적인 것’ 즉 ‘거룩한 것’에 대한 체험을 그 토대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 내지는 체험 없이는 종교가 성립되지 않는다. 종교란 한마디로 ‘거룩한 것’과 ‘인간’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룩한 것’을 체험한 사람은, 그 체험한 것을 일정한 형태로 표현하게 된다. 첫째로, 그것은 말[言語]로 ‘이야기’로 표현된다. 이것이 넓은 의미에 있어서 ‘신-화’(神-話)와 ‘상징’(象徵)을 형성한다. 둘째로, 그것은 ‘행위’(行爲)로 특히 집단적 행위로 표현된다. 이것이 ‘제의’(祭儀)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일정한 ‘신-화’와 ‘상징’ 그리고 일정한 ‘제의’는 또한 스스로 ‘거룩한 것’을 드러내 준다. 즉 일정한 신-화와 상징 그리고 일정한 제의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서 ‘거룩한 것’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① ‘거룩한 것’ : ‘거룩한 것’이란 오토에 의하면, ‘두렵고 떨리는 그리고 우리를 열광시키고 사로잡아 버리는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osum)이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것’은 한편으로 우리를 두렵고 떨리게 하는 그러한 신비이며, 다른 한편 우리를 열광시키고 또한 사로잡아 버리는 그러한 신비이다.
‘거룩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신비’이다. 그것은 감추어져 있다. 드러나 있지 않다. 따라서 ‘거룩한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것’ 또는 ‘저러한 것’이 아니다. ‘거룩한 것’은 이들과는 ‘다른 것’, ‘전혀 다른 것’(das ganz Andere)이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은 그것을 본격적으로 파악할 수 없고 개념화 할 수도 없다. 또한 인간은 스스로 자기편에서 그것에 접근할 수도 없다. 그러면서도 ‘거룩한 것’은 때때로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낸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면서도 또한 그에 사로잡혀 버린다. ‘거룩한 것’은 한편으로, ‘두렵고 떨리는 신비’(Mysterium tremendum)이다.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은 그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이때 이 두려움은 단순한 ‘무서움’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파고드는 그러한 두려움이다. 영혼의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그것을 뒤흔들어 놓는 그러한 두려움이다. 인간은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낀다. 자기를 드러내고 있는 ‘거룩한 것’ 그것만이 ‘모두’이며, 그것을 체험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마치 ‘무’(無)인 것처럼 느낀다. 인간은 ‘거룩한 것’ 앞에서 전적으로 압도되어, 떨며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없게 된다.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리나 ‘거룩한 것’은 다른 한편, 우리를 ‘열광시키고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신비’(Mysterium fascinosum)이다. 즉 인간은 자기를 드러내고 있는 ‘거룩한 것’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면서도, 동시에 열광하게 된다. 그 마음이 사로잡혀 버린다. 인간은 그 앞에서 자기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끼며, 한없는 행복을 맛보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제 다른 어떤 것도 따로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지금 체험하고 있는 것, 그것은 ‘모두’이며, ‘일체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한없이 거기 머무르고자 한다. 영원히 거기서 살려고 한다. 결국 인간은 그것에 사로잡혀 그 앞에서 떠날 수 없게 되고 만다.
파스칼(B. Pascal, 1623∼1662)은 이러한 양면성을 띤 종교적 체험을 ‘불’(feu)이라고 표현하였다. 모든 것을 태워 삼켜버리는 불의 위력은 우리를 두렵게 하고 그에 접근할 수 없게 만들지만, 불은 또한 그 빛나는 광채와 찬란한 빛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룩한 것’을 체험한 사람은 이제 다른 사람이 된다. 즉 ‘두렵고 떨리는 신비’ 그리고 우리를 ‘열광시키고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신비’를 체험한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이전의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된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우리는 ‘종교적 인간’(宗敎的人間)이라고 한다.
② 신-화(神-話)와 상징(象徵) : ‘거룩한 것’은 신비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볼 때,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 있지 않다. ‘거룩한 것’은, 그것이 자기를 드러낼 때에 있어서도 자기 자신을 직접 보여 주지 않고 다만 간접적으로 자기를 보여 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것’은 결코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자기와는 ‘다른 것’ 즉 ‘속된 것’(das Profane)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이 때 ‘거룩한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이러한 것’ 또는 ‘저러한 것’에로 한정되게 마련이다. 즉 일정한 형태로 제한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거룩한 것’은 그것이 드러날 때는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일정한 ‘사물’, 일정한 ‘사건’, 일정한 ‘인간’과 관련을 맺게 된다. 그리고 ‘거룩한 것’은 그들을 통해서만이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거룩한 것’을 체험하는 사람은, 그것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정한 사물, 일정한 사건, 일정한 인간을 통해서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거룩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역시, 일정한 사물, 일정한 사건, 일정한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거룩한 것’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신-화’와 ‘상징’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 즉 ‘신-화’와 ‘상징’은 그 자체로 또한 ‘거룩한 것’을 드러내 줄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통하여 ‘거룩한 것’이 드러났던 일정한 사물, 일정한 사건, 일정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바로 ‘거룩한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물, 사건과 같이 인간이 다양하기 때문에 , 그들에 대한 이야기 즉 ‘신-화’와 ‘상징’ 역시 여러 가지로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종교는 여러 가지로 다양한 모습과 형태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다양한 여러 가지 종교가 존재하도록 만들어 준다. 또한 다른 한편, ‘거룩한 것’에 대한 이야기 즉 ‘신-화’와 ‘상징’은 단순히 이러한 사물 또는 저러한 사건, 이러한 인간 또는 저러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에 그칠 수 있다. 즉 그들을 통해서 ‘거룩한 것’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서 ‘거룩한 것’을 체험하지 못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일정한 종교를 배척하게 만들고 또한 종교일반을 부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바로 이것이 세상에는 이러한 또는 저러한 종교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 아니라, 종교일반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게 하는 그 근본적 이유이다.
③ 제의(祭儀) : ‘거룩한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을 ‘신-화’와 ‘상징’에 담아서 이야기할 뿐 아니라, 그 이야기의 내용을 ‘행동’으로 특히 집단행동으로 재현하게 된다. 바로 그것을 통해서 ‘거룩한 것’이 드러났던 이러한 또는 저러한 사물, 이러한 또는 저러한 사건, 이러한 또는 저러한 인간을 다시 회상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재현하게 된다. 이러한 ‘행동’ 특히 ‘집단행동’이 ‘제의’를 형성케 한다. 그리고 ‘거룩한 것’에 대한 체험을 회상하고 재현하는 ‘행동’ 즉 ‘제의’는 또한 그 자체로 ‘거룩한 것’을 드러낼 수 있다. 그리하여 그러한 ‘행동’ 즉 ‘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거룩한 것’이 드러났던, 일정한 사물, 일정한 사건, 일정한 인간에 대한 회상, 그리고 그들에 대한 재현을 통해서, 바로 ‘거룩한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종교적 인간’이 된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거룩한 것이 드러났던 사물, 사건, 인간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회상 그리고 재현 역시 여러 가지로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또한 종교는 여러 가지로 다양한 모습과 형태를 지니게 된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또한 세상에는 다양한 여러 가지 종교가 존재하도록 만들어 준다. 또한 다른 한편, `거룩한 것’에 대한 회상, 재현은 단순히 이러한 또는 저러한 사물, 이러한 또는 저러한 사건, 이러한 또는 저러한 인간에 대한 회상과 재현에 그칠 수 있다. 즉 그들을 통해서 ‘거룩한 것’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거룩한 것’에 대한 회상과 재현에 참여하면서도 ‘거룩한 것’을 전혀 체험하지 못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인 사람들로 하여금 일정한 종교를 배척하게 만들기도 하고 또한 종교일반을 부인하게 만들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는 이러한 또는 저러한 종교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 아니라 종교일반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게 하는 이론적 근거가 된다.
3. 종교와 종교들 : 종교란 그리고 ‘종교적인 것’이란 ‘거룩한 것’에 대한 경험 내지는 체험에 득 토대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두렵고 떨리는 그리고 우리를 열광시키고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그러한 신비에 대한 체험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종교란 한 마디로 ‘거룩한 것’과 인간과의 관계이다. 그런데, 세상에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 그 근본 이유는 ‘거룩한 것’에 대한 ‘체험’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체험은 또한 다양한 구체적인 종교들을 낳게 한다. 이러한 현실은 오늘날 종교간의 대화의 문제를 대두시키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종교간의 대화의 문제는 종교에 있어서 하나의 근본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하나 하나의 종교가 그 자체로는 드러나 있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거룩한 것’을 문제 삼고 그것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통해서 ‘거룩한 것’이 드러났고 또한 체험되었던 구체적인 모습과 형태를 끝까지 고집할 때, 종교간의 대화의 길은 막히고 말 것이다. (鄭達龍)
[참고문헌] M. Eliade, Die Religionen und das Heilige, Salzburg 1954 / M. Eliade, Das Heilige und das Profane, Reinbek 1957 / F. Heiler, Erscheinungsformen und Wesen der Religion, Stuttgart 1961 / J. Hick, God has many Names, Philadelphia 1980 / G.v.d. Leeuw, Phanomenologie der Religion, 2. Aufl., Tubingen 1956 / U. Mann, Einfuhrung in die Religionsphilosophie, Darmstadt 1970 / R. Otto, Das Heilige, 35 Aufl., Mu nchen 1963 / R. Panikkar, Religionen und die Feligion, Munchen 1965 / M. Scheler, Vom Ewigen im Menschen, Gesammelte Werke, bd. 5, 4 Aufl., Bern-Munchen 1954 / W.C. Smith, Towards a World Theology, Philadelphia 1981 / N.H. Soe, Religionsphilosophie, Munchen 1967 / J. Splett, Die Rede vom Heiligen, Freiburg-Munchen 1971 / W. Trillhaas, Religionsphilosophie, Berlin-New York 1972 / J. Wach, The Comparative Study of Religions, New York-London 1958 / B. Welte, Religionsphilosophie, Freiburg-Basel-Wien 1978 / G. Widengren, Religionsphnanomenologie, Berlin 1969.
종교적 무관심 [한] 宗敎的無關心 [라] Indifferentia, Indifferentismus [영] indifference, indiffe
종교적 무관심이나 종교적 무관심주의란 일반적인 종교나 그리스도교라는 절대적 종교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를 말한다. 이것은 종교적인 중립[寬容]이나 그리스도교에 대한 무관심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태도는 환경 · 가정 · 사회의 영향에서 오는 경우도 있고, 성격이나 의지의 결함에서 생기는 때도 있다. 이는 정신적인 태만 · 허약 · 격정(激情) 등과 최후의 결정을 망설이는 심리적 회피, 철저한 신념과 용기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의혹을 수반한 이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의혹을 수반한 이론적 바탕과 원칙적인 무관심에서도 일어난다. 이 이론적 원천적인 무관심은 모든 종교의 가치를 어리석게도 부인한다든가, 종교형태를 역사적으로나 현실에 있어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인간이 종교적 인식에 의하여 확실한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데서 온다. 그리스도교는 객관적 진리의 내용이나, 실행하기 어려운 의무적 성질 등에 대하여 절대적 가치를 부인하는 ‘참’(眞)과 ‘거짓’(僞)이라는 범주를 다른 일반적인 종교에 적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러한 이론적인 종교적 무관심주의의 기초는 경험론적 교의사적인 회의론과 상대주의 속에 있는 수도 있다. 종교적 무관심주의는 교회의 교도직(敎導職)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명제에 의하여 배척되고 있다. ① 자기의 이성적 인식에 따라 진리라고 믿는 그 종교를 인정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이다. ② 인간은 임의적 종교의 신앙에 의하여 영원한 구령(救靈)의 길을 찾고 또한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③ 참다운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아니어도 영원히 구원될 수 있는 길은 어는 정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무관심주의는 원리적으로 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존재, 인간의 영혼에 대한 가치 등을 인식함으로써 자기를 하느님과 가까워지도록 하는 것이다. 무모한 격정에서 오는 무관심주의와 완고한 악의에 근거하는 무관심주의는 이미 그 원인만으로도 죄가 된다. 이에 대한 연구나 가르침, 영혼의 도덕적 기준 등은 진실한 기도를 통해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