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교구 [한] 光州大敎區

현재 전라남도 지방을 관할하는 교구. 1937년 4월 13일 대구 대목구에서 분리되어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관할하는 지목구(知牧區)로 설정되는 동시에, 이미 이 지방에 진출하여 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에이레의 성 곰롬바노회에 위임되었다. 전라도 지방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한국 교회 창설 당시로 소급된다. 즉 한국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호남의 사도로 불리는 유항검(柳恒儉)에 의해 일찍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고, 거듭되는 박해 때마다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1911년에 대구대목구가 조선대목구에서 분할 설정되어 대구대목구에 속하게 되었고, 1937년 전라남북도 지방에 두개의 지목구가 분리 설정되어 광주지목구의 초대 지목(知牧)으로 맥폴린(Owen McPolin, 林) 신부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발발한 2차 세계대전으로, 일제(日帝)는 맥폴린 교구장이 이하 골룸바노회 신부들을 구금하였고 1942년에 교구장 대리로 일본인 와끼다 신부가 임명되었다.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와끼다 교구장은 사임하고 본국으로 귀국하여 다시금 맥폴린 신부가 지목으로 복귀하였다. 그뒤 1949년에 브레난(brennan, 安) 신부가 지목으로 임명되었으나, 6.25동란 중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살해되었으므로, 헨리(Henry) 신부가 지목이 되어 광주지목구를 다스렸다. 헨리 지목은 한 때 교구장 대리를 지냈으며, 일찍부터 전남지방에서 전교활동을 하여 많은 성과를 올린바 있었다. 지목으로 취임한 후로는 더욱 교구발전에 노력하였는데, 특히 광주지목구의 관할 지역인 제주도 전교에 힘써 괄목할 성과를 올려, 1956년 8월 21일 제주도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감목대리구로 설정하였다.

1957년 1월 21일 광주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자 동시에 헨리 신부는 그 해 5월 11일 미국 보스턴(Boston)에서 성성식(成聖式)을 갖고, 이어 미국 교회에서 많은 원조를 얻어 1962년부터는 광주에 대건신학대학(大建神學大學)을 세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교세가 나날이 늘어나게 된 광주대목구는, 1962년 3월 10일 교계제도 설정과 동시에 대교구로 승격됨과 아울러 헨리 주교도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1971년에 이르러서는 그동안 감목대리구로 교구를 준비시켜 오던 제주도를 광주대목구에서 분리 독립시켜 그 해 6월 28일에 제주지목구를 설정하는 한편, 광주 대교구의 교구장인 헨리 대주교는 광주 대교구를 한국인 주교에게 넘기고, 자신은 제주지목구의 지목으로 전임하였다. 이에 따라 광주 대교구 교구장에는 전주 교구장이던 한공렬(한공렬) 주교가 대주교로 승품되어 취임하였다. 그러나 한 대주교가 취임한지 얼마 안되어 1973년 3월 7일에 뇌일혈로 서거함으로써, 그 해 11월 7일에 수원(水原) 교구장이던 윤공회(尹恭熙) 주교가 대주교로 승품되어 광주 대교구를 관할하게 되었다.

광주 대교구의 현재 관할지역은 전라남도 일원 1만 2,180.16㎢에 이르며, 1983년 12월말의 교세는 다음과 같다. 신자수 10만 9,186명, 본당수 55개소, 공소 17개소, 한국인 신부 53명, 외국인 신부 31명, 한국인 수사 16명, 외국인 수사 7명, 한국인 수녀 157명, 외국인 수녀 20명, 남자수도단체 8개, 여자수도단체 9개, 병원 2개소, 나병수용소 2개소, 보육원 1개소, 유치원 18개소, 국민학교 1개교, 중고등학교 6개소, 직업학교 1개소, 대학교 개소, 주일학교 55개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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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톨릭대학 [한] 光州~大學 [관련] 대건신학대학

광주 대교구 관구의 신학교. 원 명칭은 대건 신학 대학이였으나 1985년 3월 1일부로 광주 가톨릭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 대건신학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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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한] 廣野 [라] desertum [영] desert

일반적으로 너른 벌판을 가리키는 광야는 구약의 백성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는 길목이었고 하느님의 백성이 탄생하는 장소였다. 거기서 야훼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야훼는 만나와 구리뱀으로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광야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곳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개선하는 곳이기도 하다. 세례자 요한의 시기에는, 광야가 내림할 메시아를 고대하며 회개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백성처럼 광야에서 여러가지 시험을 당했으나 그들과는 달리 그것을 모두 이겨내고 성부께 충실하였다(마태 4:1-11). 그의 지상 생활 중에 예수는 군중을 피하기 위하여 광야로 갔고 한적한 기도의 장소로서 광야를 택하였다. 그러나 광야의 상징을 직접 표현하는 것은 이러한 행위에 있지 않고 일찍이 광야에서 있었을 놀라운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현된다는데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광야라 할 수 있다. 그 분 안에서 우리는 시련을 이겨내고 하느님과 친교를 가진다. 이처럼 광야라는 장소와 광야의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광야의 상징은 교회의 처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까지 광야에서 살고 있다. 시련을 이겨낸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살과 피를 먹으며 성사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또 수도자들은 광야에 은둔하여 기도하고 수덕에 전심함으로써 광야는 오늘날의 수도원 발생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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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주의 [한] 狂信主義 [영] fanaticism

자기의 신념을 지나치게 믿어 이성과 관용을 잃은 태도나 주장을 광신주의라 부른다. 이는 종교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는 대부분 어느 특정한 주의나 주장에 심취하여 그것이 내세우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나치게 열의를 가질 때 나타나며, 그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모든 사람에게 분노와 적개심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교에서 광신주의적 요소는 2세기경의 몬타누스파, 3세기경의 도나투스파, 중세 발두스파와 카타리파, 16세기의 위그노운동, 17세기의 얀센파등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광신주의는 대체로 제도화된 교회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경우가 많은데 성령론, 종말론, 순결, 청빈 등 어느 특정 교리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간 구원의 보편적인 종교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광적인 몸짓과 자세를 노출하기도 하고,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치거나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경련을 일으키기도 하고, 큰 소리로 마구 떠들어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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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학교 [한] 光星學校

경기도 화성군 왕심리 왕림본당 구내에서 있었고, 한국 천주교가 설립한 가장 오래된 학교. 이 곳은 기해박해(1833년)를 피해온 교우들이 옹기를 구우며 삶을 꾸려 가던 곳으로 병인박해(1866년) 때에는 2명의 교우가 순교한 바있는 독실한 신자들의 교우촌이다. 이 곳에 학교가 들어선 때는 1892년 5월 1일 우리나라의 본당으로서는 두 번째 본당인 왕림본당이 설정된 4년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알릭스(J. Alix, 韓若瑟) 신부가 이곳에 한문서당을 설립하면서 이 학교의 역사는 시작된다. 이듬해인 1893년 4월 1일 한문서당은 삼덕학교(三德學校)란 교명을 내걸고 1개반 60여명의 학생을 모아 정식 학교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6.25동란으로 여러 차례 폐교를 당하면서도 교우주민들의 끈질긴 집념과 노력에 힘입어 학교명을 신명의숙, 왕림학원, 개량서당, 봉담고등공민학교, 광성국민학교 등으로 바꾸면서 존속해 왔다. 1949년 국민학교의 인가를 받은 후부터 1980년 2월 28일 재정난으로 폐교할 때까지 배출한 학생수는 총 1,30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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