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한] 宗敎改革 [라] Reformatio [영] Reformation [독] Reformation

1. 어원적 의미 :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가 속화되었을 때에는 개혁의 외침과 쇄신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교회혁신 운동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이다. 이 사건 자체는 교회 쇄신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1,500여년 동안 전승, 보존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근본적으로 파괴하였고 하나의 그리스도교 세계를 여러 갈래의 분파로 분열시켰다. 그런데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교회 안에서의 개혁(Reform)과 교회 밖에서의 개혁(Reformation)으로 구분된다. 교회 안에서의 개혁은 가톨릭 종교개혁으로서 가톨릭 교회 쇄신(Catholic Reform) 또는 반동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라고 일컬어지고 있고, 교회 밖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서 단순히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고 불리고 있다. 따라서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는 개신교의 탄생을 초래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개혁에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이에 따른 유럽 대륙에서의 종교개혁, 즉 츠빈글리의 종교개혁,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 칼빈의 종교개혁, 그리고 영국의 종교개혁 등이 있다.

2. 역사적 원인 : 정치적으로 볼 때에 중세 말기에 이르러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 서부 유럽 국가들은 중앙집권 체제의 군주제로 발전하여 각 국가는 그리스도교 제국의 전체 이익보다는 자국(自國)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었다. 반대로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지방 분권화의 정치상황에 놓여 있어 황제는 자신의 직책을 수행하는 데에 지방 제후들에 의해 제한을 받았다. 여기서 중앙집권 체제는 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고자 하는 국교회 사상을 초래하여 교권이 약화되는 원인이 되었고 지방분권은 그리스도교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다.

경제 및 사회적으로 볼 때에 도시와 지방의 빈부 차이가 심하였다. 도시인의 배금사상은 인간 구원도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여 이는 대사부(大赦符) 판매의 길을 쉽게 열어 주었다. 한편 지방에서는 일부의 귀족과 몰락한 기사, 농민들이 가난과 불만 속에서 어떠한 혁명을 기대하고 있었다. 지성적 배경에서는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5∼16세기에 영국, 스페인, 프랑스에 번진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북부 유럽에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또는 성서적 인문주의로 발전하면서 교회개혁을 촉구하였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생활에 있어서 초대 교회의 제도와 규율을 다시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사도시대의 교회로의 복귀를 확신하는 데에 길을 마련하였다.

신학적인 면에서 볼 때에 대사, 구원, 미사성제, 성사, 교회, 교황의 수위권 등 핵심적 신학문제들이 교회 당국에 의해서 확실하게 정의되지 못하여 신학의 불확실성 시대를 초래하였고, 이는 루터의 신학적 공격과 논쟁을 일으키게 하였다. 또한 14세기의 유럽은 정치적 동요, 전염병, 농민 반란 등의 사회적 불안 속에 있었다. 이는 불행에 허덕이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세속적 관심을 제거하고 영혼이 신과 직접 대면하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켰다. 개인의 종교적 체험과 신심을 강조하는 신비주의는 교회의 성사 신학을 비판하므로 반(反)성직자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실천적 신비주의는 ‘새로운 신심’(Devotio Moderna)이란 운동을 일으켰고, ‘공동생활의 형제회’라는 신심단체를 탄생케 하였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당시의 속화된 교회를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그 개선을 추구하려고 노력하였고 이를 위해 교육에 전념하였다. 뒤에 ‘공동생활의 형제회’에서 운영한 학교에서 교육받고 배출된 이들 중에 루터, 칼빈, 츠빈글리 등의 종교개혁가들이 들어 있었다.

교회 상황은 14∼15세기에 일어난 일련의 불행한 대사건, 즉 ‘교황청의 아비뇽 천도’와 ‘서구의 대이교’는 교회의 영향력을 상실케 하였고 교황권을 약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이러한 교황청의 분규는 ‘공의회 지상주의’의 운동과 위클리프 및 후스의 이단 운동을 일으켜 교황의 권위는 더욱 떨어졌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교황들은 그들의 시대적 사명인 교회 쇄신과 이슬람교도에 대적하는 서구의 단합을 완수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부 교황은 족벌주의 정책을 감행하였고 자기 중심의 배타심에 물들어 있었다. 특히 개인주의는 교황 취미의 소산인 문화적 업적에 공헌하였지만 베드로 대성전의 재건을 위한 대사부 판매는 종교개혁의 직접 동기가 되었다. 아울러 주교직은 귀족의 독점물이 되었고 이는 정신적 직책보다는 세속적 직업의 인상을 주었다. 따라서 일부 고위 성직자들은 그들의 영신적 사명감을 망각하고 물질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반면에 하급 성직자들은 제대로 신학 교육과 영신도자를 받지 못하였다. 참다운 수도 성소를 갖고 입회한 수도자가 적었고, 수도회 사이에 분열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평신도들의 신심은 너무 외적인 면에 치중하였고 자주 미신과 결부되었으며 이기적이며 물질적 효과에 밀착되어 있었다. 이는 대사부의 판매를 가능케 하였다.

3. 루터의 종교개혁 : 교황 레오 10세는 선임 교황 율리오 2세가 베드로 대성전의 재건을 위해 1507년에 반포한 전대사를 다시 선포하였다. 그리고 모금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대사 설교가 필요하였다.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대사위원회가 설립되어 설교 지침서가 발간되었고 설교가들이 임명되었다. 이 지침서는 대사에 대한 교리를 약술하였고 반면에 모금 목적을 위해 대사를 과찬하여 상품화함으로써 일반 대중이 그 본래의 의미를 망각하고 남용하도록 오도하였다. 루터가 거주하는 비텐베르크에서는 대사 설교가 허용되지 않았으나 그의 교우들이 이웃 지방에서 활동하던 요한 테첼의 설교를 듣고 대사부를 사오는 광적인 소란에 충격을 받고 대사 남용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일련의 신학명제(95개 조목의 명제)를 작성하여 1517년 10월 31일에 그의 주교와 동료 교수들에게 발송하였다. 이는 후에 출판업자들에 의해 간행되어 세상에 나옴으로써 문제화되었다.

1518년에 이르러 루터의 명제는 신학자들의 반박을 받았고 그는 수도원 참사회에 소환되었으며 로마에서 파견된 카예타노 추기경의 심문을 받았지만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루터는 1518년 11월 9일에 반포된 대사에 대한 교회 입장과 1520년 6월 15일에 공포된 <교회 교서>에 불복하여 1521년 1월 3일에 파문을 받았다.

루터 문제는 이제 정치문제로 번져 1521년의 보름스 국회에서 이단자로 단죄되어 추방령이 내려졌으나 전쟁의 발발로 실현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루터는 반(反)교회적 개혁 저술 활동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널리 전파하였다. 1526년에 이르러 황제는 독일의 종교문제를 정치적으로 타결하기 위해 국회를 열었지만 루터를 지지하던 제후들은 반기를 들어 일어나므로 1529년에 그리스도교계는 양분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수많은 회담과 충돌을 거쳐 루터가 사망한 뒤에 1555년에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일차적 타결을 보았으나 다시 충돌이 일어나 ‘30년 전쟁’ 끝에 ‘베스트팔리아 평화회담’에서 종교 분쟁은 최종적으로 일단락되었다. 1570년에 이르러 독일 북부지방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는 루터교로 개종하였으나 그 외의 유럽지역에서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4.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 : 스위스에서는 츠빈글리가 자신의 성서관과 루터의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취리히에서 교회설교가로 활동하면서 1519년부터 루터의 개혁 정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1523년에 시의회의 지지를 받아 그의 교회 개혁안을 제시하였는데 여기에는 성당 안에 있는 성화상의 제거, 수도원의 폐쇄, 국가의 교회 성직록 관리, 국가 혼인 제도의 신설, 교회 전례와 강복의 폐지 등이 있었다. 이에 대해 1524년에 12명의 성주들이 가톨릭 동맹을 맺고 항의하여 취리히 시의회는 일단 개혁운동을 정지하였으나 1525년부터 츠빈글리는 개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신 · 구교의 종교전쟁(카펠리전쟁)이 일어나 1531년에 츠빈글리는 전사하였고, 취리히와 남부 독일에 미치던 영향력도 점차로 약화되어 갔으며 칼빈파로 흡수되었다.

한편 1524년에 츠빈글리가 가톨릭 동맹에 굴복하자 그의 일부 과격한 추종자들은 반발하였다. 그들은 ‘신앙에 의한 의화’라는 개혁교리를 실현하기 위해서 자유롭게 신상을 받을 수 있는 성인이 되어야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유아의 세례를 금지하고 성인(成人)의 재세례를 주장하였다. 1525년에 취리히 시의회는 재세례파의 집회를 금지하고 이들을 박해, 추방하였다. 추방된 재세례파는 서북부 독일과 네덜란드로 자리를 옮겨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교회와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다가 1535년에 뮌스터에서 지도자들이 처형됨으로써 재세례파가 건설하려는 그리스도 왕국은 종지부를 찍었다.

제네바에서는 1534년 초에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론으로 ≪기독교 강요≫(1536)를 저술한 칼빈이 시의회의 지지를 받고 종교개혁에 착수하였다. 그의 과격한 신자생활의 혁신은 시민들의 반발을 받았으나 칼빈은 가혹한 처벌로 대응하므로 1555년에 이르러 모든 저항은 제거되었고, 제네바는 개혁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칼빈의 사상은 프랑스에 들어가 ‘갈리아 신앙 고백서’가 작성되었고 여기에 정치적 개입으로 위그노전쟁(1562∼1598년)이 발발하여 이는 ‘낭트 칙령’으로 칼빈파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에도 정치적 혼란 속에서 칼빈교는 성장하여 북부지방에서는 국교가 되어 개혁교회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도 들어왔다. 당시에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 네덜란드와 영국은 식민지 건설과 함께 칼빈 사상을 해외에 쉽게 확대할 수 있었다.

5. 영국의 종교개혁 : 헨리 8세(1509∼1547)는 본래 루터의 종교개혁에 반대하면서 칠성사(七聖事)를 옹호하는 입장을 밝혔을 때에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그런데 이미 교황 율리오 2세에게 관면을 받고 과부가 된 형수인 아라곤의 가타리나와 결혼하였지만, 뒷날 앤 볼랜과의 사랑에 빠져 이혼하기 위해 관면의 무효성을 주장하였다. 결국 교황 글레멘스 7세와의 이혼문제에 대한 절충이 결렬되자 헨리 8세는 단독으로 이혼을 추진하여 의회로 하여금 영국 왕의 영국교회에 수위권을 인정하도록 조치하였고, 영국 성직자들에게 이러한 수위권에 굴복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로써 영국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분리되었다. 1533년부터 로마 교회에 충실한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해 박해를 가하였고 수도원을 폐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루터나 칼빈의 종교개혁에 동조하지 않고 ‘6개 신앙 조항’을 공포하여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실천을 준수하였다.

헨리 8세를 계승한 에드워드 6세(1547∼1553)는 10세의 어린 왕이었기 때문에 외삼촌 에드워드 세이모어(Edward Seymour)가 섭정을 하면서 칼빈 사상을 영국 교회에 도입하여 교회개혁에 착수하였다. 1547년에 가톨릭 교회의 칠성사가 거부되고 ‘6개 신앙 조항’이 파기되었다. 1548년에는 성직자의 독신제가 폐지되었고, 1553년에는 영국 교회의 ‘42개 신앙조항’이 반포되었다. 이제 영국의 성공회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에드워드 6세가 1553년에 사망한 뒤에 가타리나의 소생인 메리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는 매우 환상적 가톨릭 신자였다. 그가 등극하게 된 것은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자행된 섭정 독재정치를 종식하고 전통적 튜더(Tudor)왕가의 계승을 의회와 국민이 갈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리는 이를 오해하여 국민이 여왕의 가톨릭 신앙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그는 1554년에 스페인의 국왕 필리페 2세와 결혼함으로써 영국의 민족적 자존심과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켜 의회와 국민의 강력한 반대를 받아 점차로 국민의 신망을 잃었다. 그래서 메리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잔인한 보복행위를 감행하였다. 아울러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을 화형에 처하면서 개신교도들을 박해하였다. 결국 1558년에 메리는 사망하였고, 이로써 영국에서의 가톨릭 부활의 희망은 사라지고 오히려 프로테스탄트가 견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메리를 계승한 엘리자베드 1세(1558∼1603)는 볼랜의 딸이다. 그는 그의 어머니와 헨리 8세의 결혼을 단죄한 이유로 로마 교황청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가톨릭 신앙 때문에 어느 누구도 박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자베드의 치하에서 영국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새로운 영국 성공회의 교계제도를 설정하였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박해는 교황 비오 5세가 1570년에 엘리자베드 여왕을 파문하였을 때에 심각하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제 영국 성공회는 대륙의 어느 개신교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대륙의 개신교도가 박해로 피난하게 될 때에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金聖奉)

[참고문헌] Owen Chadwick, The Reformation, Harmondsworth 1968 / Harold Grimm, The Reformation Era 1500-1650, 2nd ed., New Your, London 1973 / John M. Todd, Reformation, London 1972 / Thomas M. Lindsay, A History of the Reformation, 2 vols. (2nd ed.); Edinburgh 1963 / E.G. LEonard, Reformation, Paris 1969 / H. Tuchle, C.A. Bouman, J. Le Brun, Reforme et contre-Reformation, Paris, 1968 / H. Daniel-Rops, L’Eglise de las Renaissance et de la Reforme, Paris 1955 / Joseph Lortz, Die Reformation in Deutschland, 2 vols. Freiburg I. Br. 1939∼1940 / Erwin Iserloh, Joseph Glazik, Hubert Jedin, Reformation. Katholische Reform und Gegenreformation, Freiburg I. Br., Basel, Wien, 1962 / Franz Lau, Reformationsgeschichte 1532 bis 1555, Gottingen Zurich 1964 / 金聖奉, 종교개혁의 역사적 원인, 역사안의 교회, 서울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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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한] 宗敎 [라] religio [영] religion [관련] 그리스도교 도교 동학 불교 신흥종교 유교 유태교

1. 용어설명 및 정의 : 종교(宗敎)라는 용어는 19세기말 종교학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religion’[英, 佛, 獨語로 ‘종교’]의 번역어로 만들어진 것으로 근대화의 물결 속에 중국, 우리나라 등 한자(漢字) 문화권에 통용되게 되었는데, 근본되는 가르침이란 뜻이다[宗이라는 단어는 중국불교에서는 ‘siddhanta’의 번역으로 진리를 파악한 최고의 경지를 뜻하며, 敎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여 가르치는 것을 지칭하였는데, 인류의 종교현상 전체를 가리키게 된 현대어 종교와 직접적 연결은 없다]. 그런데 religion이란 본래 라틴어 religio에서 나온 말로 고대로부터 두 가지로 해석되었다. 곧 기원전 1세기 치체로(Cicero)에 의하면 “다시 읽는다”라는 뜻을 지닌 ‘re-legere’에서 나온 단어로 반복되어 낭송되는 종교의식에 초점을 맞추어 초월자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낸 것이고, 4세기 그리스도교 저자인 락탄시오(Lacius C.F. Lanctantius)에 의하면 “다시 묶는다”는 ‘re-ligare’에서 나온 말로 신(神)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죄로 끊어진 관계를 재결합시켜 주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종교의 핵심을 유일신 전통에서 하듯 절대신과 인간의 관계로 보든, 궁극적(究極的) 실재를 향한 내성(內省)의 마음가짐이라고 보든,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을 다루는 것이라고 포괄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1870년 뮐러(F. Max Muller)가 런던왕립연구소에서 종교과학(a science of religion)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탄생을 호소한 연설을 그 발단으로 삼는 현대적 학문으로서의 종교학([독] Religionswissenschaft)은 종교적 표현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인간 안에 내재한 궁극적인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종교학은 이러한 종교적 존재로서의 인간현상을 이해하려는 학문적 노력이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축적된 여러 문화에 대한 지식과 호기심, 그리스도교 선교사업의 확장 및 계몽주의적 합리적 사고에 기초를 두고 유럽에서 일어난 새로운 경향이라고 하겠다. 곧 전통적으로 종교 연구 자체가 구원을 얻기 위한 수행으로 간주되었다. 인도의 우파니샤드철학, 불교의 대승철학, 이슬람의 마드라사(Madrasa, 모스크 소속 학교) 전통, 그리스도교의 신학 등은 각기의 신앙공동체를 위하여 그 전승을 계속하고 심화시키려는 노력으로서 타종교나 이단파들과의 투쟁 속에 이론을 정립하였던 것이다. 이와 달리 현대적 종교학은 각 종교의 주관성을 존중함과 동시에 종교라는 현상이 인간문화의 보편적인 것이라는 각도에서 객관성 확립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2. 현대 종교학적 연구의 소개 ① 종교사학과 종교현상학 : 우선 종교학적 연구방법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끝으로 연구의 대상이 되는 종교전통들에 대하여 논하겠다. 가장 중요한 종교연구방법은 종교사학(宗敎史學, history of religion)과 종교현상학(宗敎現象學, phenomenology of religion)으로 이들은 현대 종교학의 두 기둥과 같은 위치에 서서 최근에는 이 두 접근방법의 결합 및 조화 속에서 종교학의 앞날을 전망하고 있다. 종교사학은 종교가 특정한 역사적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모습을 사료의 역사학적 연구방법에 의하여 고찰하는 것으로 각 종교의 특이성, 발전성, 역사성을 중시한다. 역사적 발전성의 문제는 20세기 초기 조단(Louis H. Jordan)이나 틸레(Cornelius P. Tiele) 등에 의하여 주창되었던 종교적 진화론에 입각한 종교간의 우열을 따지는 진화론적 비교방법은 근거가 미약해서 이제는 거의 포기되었고, 각 종교전통 안에서의 역사적 변천 및 사상의 발전을 살펴보려는 노력에 치중하고 있다. 결국 종교사학의 전제는 종교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종교의 시작과 역사를 알아야만 된다는 것으로, 종교의 의미를 그 역사적 전개를 통하여 찾으려는 것이다.

한편 종교현상학은 나타나는 그대로의 종교현상을 믿는 자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1891년 처음 종교현상학을 주창했던 소세(Chantepie de la Saussaye)에 의하면 알려진 종교적 사실들을 편견 없이 분류하고 체계화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영역으로 종교사학과 종교철학의 중간에 위치한 학문이다. 죄더블롬(Nathan Soderblom)과 오토(Rudolf Otto)에 의해 확립된 종교체험 고유의 거룩함의 개념은 종교현상학의 기초적 범주의 역할을 하였다. 20세기 전반기에 크리스텐센(W. Brede Kristensen)과 반 데어레우(G. van der Leeuw)에 의하여 고전적 시기를 맞이하였고, 엘리아데(Mircea Eliade)에 의하여 대중화되었다. 종교현상학은 연구가의 핵심을 뚫어보는 통찰력과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예민성을 중요시하나 연구의 대상인 믿는 자의 종교적 주체성을 절대시하여 모든 편견을 배제하고 판단을 보류(epoche)할 것을 요구한다. 존경스러운 태도로 옆에 서서 나타나는 현상 그대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며 전체가 이해되었을 때 체계적 서술 내지는 여러 종교현상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 유형을 말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종교사학이 각 종교의 역사적 특수성을 중시하는 데 비하여, 종교현상학은 인간의 공통된 종교성 그 자체를 추구한다는 데서 서로 보완적이다.

② 종교인류학, 종교심리학, 종교사회학 : 둘째 부류의 종교 연구방법은 사회과학적인 것으로 곧 종교인류학, 종교심리학, 종교사회학이다. 종교인류학은 문화공동체 현상을 중시하고 공동체가 공유하는 신화의 의례야말로 그 사회의 세계관을 알려 준다는 전제에서 초기에는 통과의례(通過儀禮) 등 종교의 외부적인 의식을 중점적으로 연구하였고, 보통 경전이 없는 원시전통을 다루어 왔다. 최근에 와서는 세계 종교전통의 신념체계, 상징화과정 등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처음 종교인류학은 18, 19세기에 계몽주의 및 진화론의 영향 아래 원시종교에 대한 관심과 원시종교에서 종교의 기원을 찾으려는 추구로 시작되었다. 드 브로스(Charles de Brosses)의 서물숭배론(庶物崇拜論, fetishism), 타일러(Edward Tylor)의 애니미즘(animism, 精靈論), 매레트(Robert Marett)의 마나론(Manaism) 및 프레이저(James Frazer)의 주술론(呪術論, magic) 등은 그 대표적 예였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인류학자들의 성급한 이론화는 당시대의 원시인의 경험에서 역사 이전의 상태를 유추할 수 있고 오늘의 세계종교들이 원시신앙에서 진화되어 나왔으리라는 증명될 수 없는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더구나 계속된 인류학적 연구에서 마나(Mana)를 비인격적 개념이라고 보았던 매레트의 마나론과 종교보다 주술이 먼저 있었다는 프레이저의 주술론이 오류였다는 것이 밝혀져서, 종교의 기원을 실증적으로 찾으려는 시도는 그 추구 자체가 잘못된 것으로 판정되고 있다(프레드릭 스트렝, 종교학입문, 36∼55면).

종교를 비롯한 인간현상을 모두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은 이성절대주의에 대한 반발이 19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나 낭만주의의 물결이 퍼지면서 이성 대신에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 및 내적 경험을 중시하게 되었다. 헤겔(Hegel)은 그의 ≪정신현상학≫에서 인간정신과 접촉되어 있는 신적 정신을 인간 문화의 정수라고 보았고, 실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는 종교적 감정을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보아 종교를 무한자를 향한 절대의존감정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추구가 발전되어 오토는 종교체험 안에서 발견되는 신성(神性)의 비이성적 요소인 뉴멘(numen)을 묘사하였고, 인류학자인 스트로우스(Levi Strauss)는 신화연구를 통행 의식적 현상에서 무의식 속에 있는 보편적 특성을 찾는 구조주의를, 엘리아데는 상징론을 내놓게 되었다.

한편 종교심리학이 개척되어 우선 제임스(William James)는 1901년의 길포드 강의에 기초를 둔 ≪종교체험의 다양성≫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실증적 연구로 개인 성숙에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보려고 하였다. 그는 종교의 제도적 표현은 2차적인 것이고 그 원천적 모습은 인간 자아의 내부세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종교인들의 체험적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결과 종교체험의 특징을 밖으로부터 오는 힘에 의하여 매혹되는 기쁨과 안녕의 체험 및 초월자와의 관계에서 오는 심각성과 한계성의 체험의 공존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종교체험은 인간자아에 새로운 국면을 일깨워 큰 변화를 일으킨다고 결론 내렸다. 그 이후 종교심리학의 쌍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융(C.G. Jung)은 무의식의 심층 속에서 종교의 기능을 보려 하였다. 프로이트는 종교는 무의식적 죄의식 및 알력의 투사로서 인간에게서 책임감을 앗아가기 때문에 인간 성숙의 저해하는 ‘인류의 보편적 강박 노이로제’라고 정의한 반면에, 융은 인간의 내적 심층에 나타나는 ‘집합적 무의식’ 속에서 종교는 창조성의 원천이 되어 인간 성숙을 돕는다고 결론 내렸다. 곧 종교심리학은 종교현상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개인적 체험 속에서 종교가 인간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에 비하여 종교사회학은 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및 사회제도가 종교에 미치는 영향 등에 관심을 둔다. 현대사회학의 사조라 부를 수 있는 뒤르켐(Emile Durkheim)은 1915년 ≪종교생활의 기초형태≫라는 책을 써서 종교는 사회가 지닌 ‘집합적 의식의 상징적 표상’으로서 사회적 유대를 견고케 하여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가진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종교의 연구는 사회의 연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종교가 그 사회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결국 사회에서 모든 종교적 가치가 시작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회를 종교의 기원이요 척도라고 본 뒤르켐의 결론은 순수한 종교학적 입장에서 보면 종교를 종교가 아닌 다른 요인에서 시작된 것으로 설명하려는 하나의 환원주의(reductionism)에 분명하여 비판받고 있지만, 종교의 사회적 기능 및 종교와 사회의 밀접한 간계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는 데서 종교사회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보겠다. 종교의 통합적 기능을 중시했던 뒤르켐과는 달리 베버(Max Weber)는 종교가 역사적 사회적 변혁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가장 복합적인 세계종교들을 연구하였고 각 종교에서 발견되는 독특성에 관심을 쏟았다. 근대화를 이끈 자본주의 정신과 칼빈주의와의 관계에서 서양 근대사회의 특징을 찾았고, 예언자 등 카리스마적 종교지도자들이 사회변화에 끼친 영향을 중시하였다.

결국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자들에 의한 사회과학적 종교연구는 기능주의적 접근방법으로서 조교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데에는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으나, 종교현상 그 자체를 이해하고 궁극성을 내포한 그 특수성을 파악하기 위하여는 역시 처음에 언급한 종교사학 및 현상학적 연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곧 종교를 학문적 객관성을 가지고 이해하기 위하여는 그 종교의 역사를 이해함과 동시에 시간적 변천 속에서도 지속되는 종교적 의미와 구조를 파악해야 되며, 그 뒤에 그 종교가 가지는 기능적 역할까지 알아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종교연구는 다양성을 띠며, 종교의 전체적 이해는 다각적인 연구결과의 종합으로만이 가능하다.

③ 종교철학과 종교신학 : 종교연구의 셋째 부류는 종교철학(philosophy of religion)과 종교신학(theology of religion)으로 위의 경험적 연구방법과는 달리 규범적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곧 종교철학은 진리의 문제를 직접 취급하여 종교의 본질 · 핵심 등을 규명하려고 하며, 철학적 논리성으로 종교적 사료를 체계화한다. 종교신학은 특정종교의 입장에서 타종교를 보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가치를 수용, 비판하고 자기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재해석하여 종합하려는 시도로 전통적 종교연구방법의 연속이며, 실존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점점 그 경향도 학문적으로 체계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가톨릭의 종교신학적 방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선포한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과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모든 인간을 비추는 진리의 빛이 부분적이나마 타종교들 안에 반영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대화를 통해 그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순수한 인간적 가치를 긍정하고 발전시키라고 격려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인 대표적 가톨릭 신학자로는 라너(Karl Rahner)와 실레테(H.R. Schlette)를 들 수 있다.

3. 종교전통에 따른 구분 : 종교를 연구하는 접근방법에 따라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고찰하였는데, 이제는 종교전통을 간단히 분류하여 설명하겠다. 우선 종교를 오랜 역사와 경전 및 기록된 전승[literate tradition]을 소유한 세계 종교들과 의식이나 설화 등을 통해 구두로만 전승된 원시종교전통[illiterate tradition]으로 구분한다. 세계종교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권에서 발생한 유태교 · 그리스도교 · 이슬람교 등의 유일신 계시종교들과 고대 인도 브라만 문화와 연결된 힌두교 · 불교 및 중국의 종교들에 있어서 거대한 문화형성의 원동력이 되어온 살아 있는 종교 전통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한국은 중국의 종교전통인 유교 · 도교 · 불교 등을 삼국시대로부터 받아들여 발전시킴과 동시에 원시종교전통으로 구두 전승되는 무속신앙을 밑바탕에 깔고 있었다. 곧 한국의 종교전통은 상층에는 유 · 불 · 선 전통과 200년 전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그리스도교 등 세계종교들을, 하층에는 동북아시아를 비롯하여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는 샤마니즘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흡사 종교의 살아 있는 박물관과 같은 다원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대중의 종교생활 속에서 이 두 상하층은 긴장 속에서도 융합되었고 1860년 동학운동 이후로 새로운 종교공동체까지 산출하게 되어 무수한 신흥종교를 일으켰다. 따라서 한국은 종교적으로 다원화되고 있는 지구촌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 예이며, 오늘의 도전과 미래의 좌표가 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다.

앞에서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다루는 것이라고 포괄적으로 정의하였다. 궁극성을 달리 표현하면, 곧 모든 종교는 구원의 종교라는 말이다. 그런데 구원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의 폭이 있어서 현세적 기복(祈福)신앙에서부터 내세적인 불멸 내지 부활이라는 영생에의 신앙 및 인간존재의 완성에 대한 신앙 등이 있다. 이 세 가지 의미의 구원이 서로 연결성을 지니지만, 그 중에서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고하는 현대인에게 가장 호소력을 지닌 것은 구원의 세 번째 의미일 것이다. 참된 인간이 되고 싶고 비인간화된 기계문명 속에서 인간화의 원동력이 종교 안에 있음을 현대인들은 무의식적으로나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종교학적인 연구 자체에서도 인격화를 부르짖는 종교학자 스미드(Wilfred Cantwell Smith) 교수는 인류가 서로를 ‘우리’라는 의식 속에 알고 배우게 되리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인간을 중시했던 동아시아 전통 속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궁극자는 인간성숙(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의 바탕이 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종교의 의미와 인간의 구원문제가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 유태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신흥종교, 동학 (金勝惠)

[참고문헌] F.E.D. Schleiermacher, Reden uber die Religion, 1799 / G.W.F. Hegel, Die Phanomenologie des Geistes, 1807 / M. Muller,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 1873 / C.P. Tiele, The Elements of the Science of Religion, 1897-1899 / Durkheim, Les formes elementaires de la vie Profane, 1912 / S, Freud, Totem und Tabu, 1913 / R. Otto, Das Heilige, 1917 / W. James, The Varieties of Religions Experience, 1920 / J. Soderblom, Das Werden des Gottesglaubens, 1926 / C.G. Jung, Psychology and Religion, 1938 / M. Eliade, The Sacred and the Profane, 1959 / K. Rahner, Schriften zur Theolo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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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과경 [한] 終課經 [관련] 끝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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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한] 存在 [라] esse, ens [영] being, presence [독] Sein, Existenz

존재가 귀속시키는 것은 존재자(存在者, ens)이다. 존재는 최고의, 가장 보편적인, 여러 개념에 환원될 수 없는 개념의 내용을 표시한다. 존재의 영역은 온갖 것을 포괄하며, 특수영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콜라학(學)에서는 ‘존재의 초월성’이라고 불렀고, 그런 뜻에서 존재는 초월적이다. 가톨릭의 입장에서 보는 존재관(存在觀)에 한정시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존재는 온갖 존재자가 귀착되고, 그것에 바탕하여 인식되는 것으로서 근원적인 개념이다. ens는 모든 실재성(reality)을 가리키는 보통 용어로서, 인간의 지성(知性)에 의하여 인식되는 갖가지 실재성에 따라서 우선 보편적인 존재(esse commune)와 ‘존재 그 자체’(ipsum esse) 곧 절대적인 존재인 하느님(신)으로 구별된다. 다시 말해, ‘ens ab alio’는 ‘타자(他者)에 의한 존재’ 곧 다른 원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 피조물(被造物)이며, ‘ens a se’는 ‘자존’(自存) 곧 자기에 의한 존재자, 자기의 존재의 원인 = 하느님(신)이다.

존재자는 존재자인 한에 있어 어떤 존재법칙에 따르게 마련인데, 스콜라학에서는 근본적인 존재 법칙 말고도, 모든 존재에 귀속하는 ‘초월적인 규정’으로 지칭되는 하나[一], 참[眞], 선(善)을 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는 존재자가 통일적인 본질을 가져야 하며, ‘참’은 존재자가 지성에 의하여 인식될 수 있어야 한고, ‘선’은 존재자가 가치노력에 대상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였다.

존재자의 존재의 기본적인 분류에서 첫 번째로 구별되어야 할 것은 실존(實存, Dasein, existentia)과 사존(斯存, Sosein, essentia)이며, 둘째 번으로 구별되어야 할 것은, 자존유(自存有, substantia, 實體)와 타존유(他存有, accidens, 偶有)이고, 세 번째로는 현실유(現實有, actus)와 가능유(可能有, potentia)이다. 존재자의 존재를 경험상으로 볼 때에는 네 가지의 근본적인 종류로 나누어진다. 즉 무기적(無機的) 존재, 유기적(有機的) 존재, 감성적(感性的) 존재, 정신적 곧 영적(靈的) 존재가 그것인데, 이것은 ‘존재고도’(存在高度)라고 할까, 즉 존재의 완전도(完全度)가 위에 말한 차례에 따라 차차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만 한다. 이상에서 추려내면, ‘ens in se’는 ‘자기내유’(自己內有)이며, ‘ens per se’는 ‘자기 자신에 의한 존재’ 곧 본성(本性)에 의한 존재 또는 한정될 수 없는 존재인데, 모두가 자존유 곧 실체이다. ‘ens entis’는 ‘존재의 존재’ 즉 그 자체로는 실재할 수 없고, 실체 속에서만 실재할 수 있는 것, 따라서 ‘우유’(偶有) 곧 타존유이다. 유한적인 존재의 궁극의 근거로서 무한의 영적인 존재인 하느님을 어림잡을 수 있다.

스콜라학의 용어인 ‘아날로기아 엔티스’(analogia entis)란 자연 즉 피조물과 초자연 즉 신과의 사이에는 존재적인 구별과 동시에 유비(類比)가 있다고 봄을 지칭하는 말인데, 가톨릭 신학에 있어서는 현대에 와서도 보통 이것이 기본적인 원리의 하나로 다루어지고 있다. 존재를 ‘presence’라는 말로서 해석할 때, 이는 실제로, 혹은 효과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자의 가까이에 있음을 가리킨다. 이 말은 어원이 되는 라틴어 prae(∼의 앞에) + ens(존재), 또는 praesens(진행되고 있는 일에 참여하는 것)에서 왔다. 실재라는 것은 대상 물건이 현실로 실체적으로 거기에 있음을 말한다. 효과적인 존재란 이 대상물의 영향이 미치는 존재를 가리키지만, 그 영향의 원인은 실제로는 다른 곳에 있다. 영적인 존재는 물리적으로는 부재일지라도, 어떤 사람의 지성과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를 가리키지만, 그 영향의 원인은 실제로는 다른 곳에 있다. 영적인 존재는 물리적으로는 부재일지라도, 어떤 사람의 지성과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인 것이다. 하느님(신)은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들이 사물을 인식하듯이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사람이라기보다 인간성을 초월한 그 이상의 존재이다. 헬비히(Monika Hellwig)가 지적했듯이, “예수 안에서 사람들은 독특한 모양으로 하느님과 접촉하고 있고, 또 접촉하도록 초대받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접촉은 인간의 전존재(全存在)를 변화시킨다.” 사도들이 우리에게 한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의 존재 이유 때문에 예수를 만났다는 말은,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하느님과 우리가 직접으로 인격적인 대면을 하도록 초대받은 체험을 말한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과 만남의 장소이요, 예수는 곧 하느님이다.

[참고문헌] E. Przywara, Analogia entis I, Freiburg 1932 / N. Hartmann, Zur Grumdlegung der Ontologie, Berun 1935 / J.B. Lotz, Sein und Wert I, Paderborn 1938 / A. Guggenberger, Der Menschengeist und das Sein, 1942 / J. Maritain, Sept lecons sur l’etre, Paris 1933; A Preface to Metaphysics: Seven Lectures on Being, New York 1945 / T.C. O’Brien, Metaphysics and the Existence of God, Washington 1960 / B. Montagnes, La Doctrine de l’analogie de l’etre d’apres saint Thomas d’Aquin, Louvain 1963 / Monika Hellwig, who is Jesus Christ?, What are the Theologians Saying?, Ohio 1970 / John A. Hardon, S.J., Catholic Dictionary, Now York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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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서 [한] 趙∼

조화서(1815∼1866).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베드로. 최양업(崔良業) 신부의 복사(服事). 성인 조윤호의 아버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태어났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로 부친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으로 이주하여 한 막달레나와 결혼, 아들 윤호를 두었고 이 때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신부를 보필하였다. 그 후 1864년 다시 전주의 성지동으로 이사했고 얼마 후에 아내가 사망하자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지방으로 확산되어 이해 12월 5일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이명서, 정원지, 아들 윤호와 함께 체포되었다. 옥에서 아들에게 “네 마음이 변할까 염려된다. 관장 앞에서 진리대로 말하여라” 하고 격려했고 이에 아들 윤호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버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이렇듯 아들과 함께 순교를 각오하고 6, 7차의 신문을 당했는데,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체하며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의 유혹을 여러 번 받았다. 그러나 모든 유혹과 형벌을 이겨내고 12월 1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성지동과 대성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아들 윤호는 10일 후인 23일 같은 장소에서 순교함으로써 3대가 순교하는 영광을 얻었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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