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철증 [한] 趙喆增

조철증(1827∼1868). 문신. 천주교인. 자는 치양(稚壤), 본관은 풍양(豊壤). 서울에서 조능하(趙能夏)의 아들로 출생. 1859년 증광문과 병과(增廣文科丙科)에 급제, 주서(注書)를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프랑스 선교사들과 많은 교우들이 처형당하자 장치선(張致善), 최인서(崔仁瑞) 등과 함께 박해상황을 중국의 선교사들에게 알리고 조선에 남아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탈출시키려는 계획에 참여, 페롱(Ferron) 신부의 구원 요청을 위해 중국으로 가는 최인서, 지자익(池子益) 등을 재정적으로 후원했고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의 피신과 상해(上海)로의 탈출을 도왔으며 조정에 있으면서 천주교박해를 완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1868년 오페르트(Oppert)의 남연군 묘 도굴사건 직후 체포돼 김계교(金季釗)·장치선 등의 자백으로 4월 19일 의정부에서 월해초구죄(越海招寇罪)로 체포령이 떨어졌으나 당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던 조카 조유선(趙猷善)이 미리 체포령 소식을 알려주자 체포되기 전에 단양(丹陽)에서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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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한] 組織神學 [영] systematic theology [독] Systematische Theologie

조직신학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 조직화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조직신학이라는 특정분과 학문이 있는 것이 아니고, 기초신학, 교의신학, 윤리신학 등 분과들을 포함하는 분류용(分類用)개념이다. 실천신학에 대조되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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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증이 [한] 趙曾伊

趙曾伊(1782∼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바르바라. 성인 남이관(南履灌)의 처. 경기도 이천(利川)의 양반 교우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16세 때 남이관과 결혼했고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 친정아버지와 시부모가 순교하고 남편이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유배되자 친정인 이천에 내려가 10여년을 고생하며 살았다. 그 후 30세경 다시 상경하여 먼 친척이 되는 정하상(丁夏祥)을 도와 선교사 영입에 필요한 자금마련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1832년 남편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편과 함께 이듬해 입국한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보필하고 공소(公所)를 세우는 등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였다. 그 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친정으로 피신시키고 어린 딸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가 7월에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남편 남이관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관헌들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함구하고 신앙을 지켜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랐고, 그 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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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국 [한] 趙鍾國

조종국(?∼1951?). 명동본당 청년회장, 6.25 피랍자. 서울에서 출생. 계성(啓星)학교를 졸업하고 한의약계에 투신, 10여년을 화평당약방에 근무한 후 약방 주인 이응선의 사위가 되어 화평당의 운영을 맡았고 그 뒤 조선매약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전무를 거쳐 사장에 취임하였다. 광복 후 1946년 대한약행을 설립하고 이어 보인당 제약회사를 인수, 명실공히 한의약계의 왕자로 군림하였고 그뿐 아니라 교회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명동본당 청년회 회장으로서 박병래(朴秉來), 송경섭(宋璟燮) 등과 함께 청년운동을 주도하였다. 6.25동란 중 피난하지 못하고 있다가 1951년 9월 16일 명동본당 총회장 정남규(鄭南奎), 청년회 부회장 송경섭, 경향잡지사 총무 김한수(金翰洙), 김정희(金貞熙) 등과 함께 북한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아무도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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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원] Jozeau, Moyse

Jozeau, Moyse(1866∼1894). 한국명 조득하(趙得夏).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1889년초에 한국에 도착하여 곧 경상도 북부지방을 맡아 전교활동을 약 1년간 계속하다가, 1890년에 부산지방의 교회창립사업을 맡았다. 신자라고는 한 명도 없는 그 곳에 교회를 세우고, 여러 곳의 벽촌과 섬을 순회하면서 복음 전파에 전념한 결과, 3년 후에는 약 2,000명의 신자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는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정력과 굳은 신념 때문이며, 교우들뿐만이 아니라 이교도들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1893년 그는 부산을 떠나 그와 같이 젊고 정력적인 인물을 필요로 하는 전라도로 전임케 되었다. 그의 거처로 된 배재마을은 곧 모범적인 마을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이 때 불행히도 동학(東學)의 일파가 그의 관할 구역을 습격하자, 그는 용감하게 이와 맞서 싸웠으나 정세가 점점 불리해졌으므로 구원을 청코자 서울로 올라갔다. 도중 전주를 거쳐 공주에 다다랐을 때 청(淸)나라 군사에게 잡혀 총살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1894년 7월 29일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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