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본당 [한] 載寧本堂

황해도 재령군 재령을 문창리(文昌里)에 위치한 이 본당(주보는 성가광영)이 설정된 것은 1899년 5월이었고, 창설신부로는 그해 2월에 우리나라에 입국한 23세의 르각(Carolus Le Gac, 郭元良) 신부가 부임하였다. 르각 신부는 그 해 8월에 모성학교(慕聖學校)를 개설, 1900년에는 조그마한 성당을, 1901년에는 신부사옥을 건축하였다. 1905년 2대 멜리장(Petrus Melizan, 梅履霜) 신부가 부임, 16년간 재임했으나 교세 발전은 없었다. 1921년 3대 신성우(申聖雨, 마르코) 신부가 부임, 9년간 있으면서 산하 17개 공소(교우수 600명)를 관할하는 한편, 프랑스제 종(鐘)을 들여와 설치, 성당 부근의 야산을 매입, 개간하여 신종(新種)의 포도 · 사과 · 앵두나무 등을 심어 훌륭한 과수원을 조성하였다. 1930년 몇몇 교우들로 인한 불미한 사건 때문에 교구청으로부터 본당 폐지 결정이 내려 신 신부는 신천(信川)본당 창설신부로 전임, 재령본당은 공소로 격하되어 1930년부터 신천본당의 2대 이기준(李起俊, 토마스) 신부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1933년 2월 방유룡(方有龍, 레오) 신부가 재령본당 재건을 위해 4대 본당주임으로 부임,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본당을 새로 일으켰다. 1936년 5대 박정렬(朴貞烈, 바오로) 신부가 부임, 사제관 겸 강당을 신축하였다. 1940년 본당에서는 교우 의사가 경영하던 삼성의원(三省醫院)을 2만 9,000원에 인수하여 9월 1일 성심(聖心)의원이란 이름으로 개원하고 그 운영은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에게 맡겼다. 박 신부는 1942년 12월에 병사하고, 1943년 6대 김경민(金景旻, 루도비코) 신부가 부임, 1946년에는 7대 양덕환(梁德煥,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였다.

북괴당국의 교회에 대한 박해는 날로 가중되어, 1947년 7월에는 샤르트를 성 바오로회 수녀들이 더 이상 활동 할 수 없어 월남해서 서울 본원으로 돌아왔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북괴군이 유엔군에게 쫓겨 후퇴하던 무렵인 그 해 10월 5일 양신부는 납치되어 해주(海州)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유엔군의 입성 직전에 피살된 것으로 보이며 시체는 찾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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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고해 [한] 再告解 [라] frequens Confessio [영] frequent confession

성사적 고백을 일년에 한 번 이상 하는 일, 또는 그 고백.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이래 분별 연령에 달한 모든 신자는 적어도 일년에 한 번 자신의 사죄(死罪)를 고백할 의무를 진다(교회법 989). 그러나 이 의무를 최소한도로 이행하는 것은 완덕(完德)을 추구하는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만족스럽지 못하다. 고해성사를 통하여 신자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죄의 용서를 받으며 하느님과의 우애를 회복하게 되므로 성사적 고백을 자주 하는 것이 유익하다. 이러한 ‘잦은 고백’ 또는 ‘신심고백’(信心告白)을 일컬어 19세기 이래 한국 천주교회에서 재고해라 불렀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경죄(輕罪)도 또한 고백하여 용서받기를 권고하면서(교회법 988②) 성사적 고백을 자주하여 신심을 증진시키도록 장려한다. 경죄의 사함까지 받고 덕행에 진보하는 수단인 신심고백에 의하여 “순수한 자기인식이 깊어지고 그리스도교적 겸손이 자라며, 악습이 제거되고 영적 태만과 냉담이 극복되며, 양심이 순화되고 의지가 강해지며, 구원적 자기억제가 이루어지고 성사자체에 의하여 은총이 증진된다”(교황 비오 12세 회칙 ). 일반적으로 매월 1회의 신심고백은 성실한 신자들에게 현명한 횟수가 된다고 보고 있으나 거의 매일 영성체하는 신자들은 매주 1회 고백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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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한] 齋 [라] abstinentia [영] abstinence [관련] 대재 소재

재라는 말은 ≪한불자전≫(韓佛字典)에 따르면, 식음의 절제(節制) 또는 전폐를 지칭하며 ‘재일’(齋日)이란 바로 단식 또는 절식(節食)을 하는 날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재라는 할 때는 ① 심신의 건전관리를 위한 절식, ② 대재(大齋)에 대응하여 소재(小齋)를 뜻하며, ③ 절주(節酒), 금주(禁酒)까지도 포함하여 이르는 말이다.

소재는 작은 재 즉 육식을 하지 않는 재이고, 대재는 큰 재 즉 단식을 하는 재로서 신자에게 예수고난을 상기케 하여 준행하도록 한다. 연중 지키는 횟수는 각국의 교회관례에 따라서 다르다. (⇒) 소재, 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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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학교 [한] 長興學校

황해도 장연본당의 장방동(長芳洞) 공소에서 운영하던 초등교욱기관. 1907∼1911년에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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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원본당 [한] 長湖院本堂

주보로 ‘매괴의 성모’를 모시는 이 본당은 충청북도에서 최초로 설립된 본당이다.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陰城郡 甘谷面 旺場里)에 있는 이 본당은, 일찍부터 소신학교가 자리 잡은 부엉골(부흥골)에서 전교활동을 하던 부이용(C. Bouillon, 任加彌) 신부가 매산(梅山) 언덕 기슭의 99간 짜리 기와집 터를 사들여 성당으로 만들고 1895년 9월 17일 창설자로 부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부이용 신부가 사들인 성당자리는 임오군란 때 민비(閔妃)가 일시 피신해 있던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일본군이 불을 질러 잿더미가 되어 있던 곳이기에 헐값으로 구입했던 것이다. 부이용 신부는 사제관으로 우선 10평의 집을 짓고, 한식과 양식을 절충한 80평의 성당을 세웠다.

그 당시 이 본당의 공소는 광범하여 경기도 여주 · 이천을 비롯, 충청도에는 단양 · 제천 · 충주 · 음성 · 괴산 · 진천 · 청주 · 보은 등지에 산재하여 있고, 신자는 1,375명에 달하였다. 부이용 신부는 지방민의 교육을 위하여 1907년 매괴학당(玫瑰學堂)을 설립하여, 1913년에는 6년제의 보통학교로 만들었다. 그는 스스로 나무를 많이 심어 조림(造林)사업의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1930년 10월 7일에는 건평 200평의 종가 높이가 130척(尺)인 넘는 현대식의 고딕 연와조 성당을 축성,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이와 함께 교사도 신축하였다. 그는 또 성당 뒷산[梅山]을 닦아 자연환경을 정연하게 만들고, 성체거동 행사를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교세도 늘어 1937년에는 신자총수 2,150명이 되었다.

부이용 신부의 열성적인 사목으로 장호원본당은 기초가 다져졌는데, 1943년 7월 그가 2차 대전 중 연합국인 프랑스인이라는 이유로 서울 신학교에 연금되었다. 그래서 한국인 신부인 장금구(張金龜, 크리소스토모) · 유영근(兪榮根, 요한) 신부가 2, 3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일인(日人)들의 간섭 아래 어렵게 사목활동을 이어갔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이 왔다. 본당에서는 부이용 신부가 한일합방 때 제대 밑에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게양하고 광복의 기쁨을 알렸다. 그해 11월에는 부이용 신부가 다시 부임하여 사목하다가 1947년 10월 25일 별세하였다. 그 뒤 박고안(朴稿安, 프란치스코) 신부가 부임하여 1953년 3월에는 매괴상업학교를 설립하여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였다.

1953년부터는 메리놀 외방전교회에서 관할하는 충청북도 감목대리구의 설정으로 파디(J. Pardy, 巴智) 신부가 9월 부임하였다. 이 본당이 창설된 뒤, 교세의 확장으로 1920년 고마리본당이 분할되어 독립하고, 1932년 청주본당, 1940년 제천본당, 1945년 충주본당, 1957년에는 금왕본당이 분할되었다. 그 후 이 본당의 호칭은 ‘감곡(甘谷)본당’으로 바뀌었다. 현재 김광혁(金光赫, 베드로) 신부가 주임을 맡고 있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어 있다. 1983년 말 현재 교세는 신자수 2,514명, 공소 7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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