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디(Pardy) 주교의 한국명. ⇒ 파디
파업권 [한] 罷業權 [영] rights of strike [독] Streikrecht
파업권이란 노동자가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동조합 등의 의사결정에 따라 집단적으로 노동의 제공을 거부활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파업은 노동쟁의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전형적인 쟁의 형태로 처음에는 단순히 작업장에서 빠져나가는 형태(walkout)를 취했지만 이같이 노동제공의 거부라는 소극적 형태가 파업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게 되자 배반자의 행동을 감시하는 피케팅이라는 형태로도 발전하게 되었다. 대체로 노동운동이 발전한 선진국의 경우 평화적인 파업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왜냐하면 파업권은 생존권적 기본권인 동시에 국가권력에 대한 자유권으로서의 대사회적(對社會的) 권리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세계의 사목헌장>과 교황 바오로 6세의 <행동에의 부름>에서도 파업을 “노동자가 자신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인정한다(사목 68, 부름 14). 위 사목헌장 “파업은 노동자들 자신의 권리를 수호하고,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필요하고 정당한 최후의 수단이 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헌법에서도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해 … 단체행동권을 가진다”(31조 1항)라고 규정하고는 있으나, 국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업체에 종사하는 근로자 등에 대해서는 잠정적인 조처로 일부의 파업권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파스토르 [원] Pastor, Ludwig von
Pastor, Ludwig von(1854~1928). 독일의 가톨릭 역사가. 그의 부친은 칼빈파의 프로테스탄트였으나 부친을 여윈 뒤, 모친한테서 가톨릭 교육을 받았다. 19세에 그는 교황사(敎皇史)를 쓸 계획을 세웠다. 루바인, 빈대학 등에서 배운 다음 로마를 답사하였다. 교리 신학자 하인리히와의 교제는 그의 학문적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레오 13세로부터는 국제적 연구를 위해 교황 비장(秘藏) 문고에의 출입을 허락받았다. 1880년에 인스부르크대학 강사, 1887년에는 동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의 명성 높은 강의는 보편주의적 견해와 진정한 독일 사상에 넘쳐 있었다. 1901년부터는 로마의 오스트리아 중앙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교황사를 연구하였다. 1921년에는 오스트리아 주재 교황청 공사를 지낸 일도 있다.
그의 ≪교황사≫(Geschichte der Papste seit dem Ausgang des Mittelalters) 16권은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었다. 이 저술은 1799년 비오 6세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저작은 근세 역사서적 가운데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문예부흥기와 가톨릭시즘의 부흥을 다룬 몇 권은 가장 독창적이고도 내용이 충실하여 교황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이 저술은 랑케의 정치사적 기술과 다르고 얀센을 모방하여 넓은 뜻의 문화사를 저술하였다. 그의 저술은 위대한 세계사와 정신사를 전하는 유럽 230개 도시의 문고를 광범하게 활용하여 펴낸 역작이다. 교회 내부의 발전보다 다른 면에 더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비판도 받았으나 파스토르의 교황사는 원래 교황권과 그 수위권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고 ‘교황의 역사’를 저술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파스칼 [원] Pascal, Blaise
Pascal, Blaise(1623∼1662).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그리스도교 사상가. 클레르몽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죽었다. 사법관의 아들로 3세 때 모친을 여의고, 부친의 사직(辭職)과 동시에 파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능을 보야 12세 때 혼자 힘으로 유클리드기하학 정리 32까지 생각해냈다고 한다. 부친의 친구인 수학자 데자르그(Gerard Desargues, 1593∼1662)의 영향을 받고, 16세 나이로 유명한 ≪원추곡선 시론≫(Essai pour les coniques, 1640)을 썼다. 1639년 부친의 복직으로 일가는 루앙(Rouen)에 이주하였다. 계산기를 발명, 1648년에는 파스칼의 원리(수압기의 원리)를 발견, 그 후에도 1654년부터 1658년 사이에 수학분야에서 정수론(整數論), 확률론, 적분법에 관한 많은 발견을 하였다. 이러한 과학연구와 함께 가족 모두가 얀센주의 신앙을 믿어, 1646년에 그 자신도 ‘제1차 회심(回心)’을 체험하였다.
1650년 일가는 다시 파리로 옮겨, 그는 사교계의 교양있는 인사들과 접촉, 인간완성의 이상을 추구, 문학자로서의 자질을 연마하는 동시에 수학적 사색에 더욱 몰두하였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삶과 신앙과의 모순에 관해 내면적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진 끝에 마침내 1654년 11월 결정적 회심이라 일컬어지는 이상한 신비적 체험을 가졌다. 이 체험에서 그는 사람의 아들이자 신(神)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종교적인 신앙 속에 가장 확실한 것을 얻었다고 믿었다. 그것은 합리적 확실성을 초월한 감정 · 의지 등 전인적(全人的) 활동을 감싸고 충만케 하는 확실성이었다. 누이동생 자클린(Jacqueline)에 뒤이어 1655년 포르르와얄(Port Royal) 수도원의 객원(客員)이 되어, 성서와 교부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얀센주의에 공명하는 이 수도원은 당시의 예수회로부터 수도원장 아르노(A. Arnauld)를 비롯해 심한 공격을 당했고, 결국 얀센주의는 이단 판결을 받았다. 파스칼은 아르노의 위촉을 받고 1651년부터 1657년까지 연달의 익명의 공개장 ≪시골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Lettres crites a un provincial)를 발표, 처음에 은총에 관한 신학문제를 논하고, 이어서 예수회의 파성적이고 부패된 도덕을 규탄해서 크게 인심을 동요케 하였다. 이 서한은 문학사적으로 근대 프랑스 산문의 모범으로 손꼽히는 명문(名文)이다. 이보다 앞서 그는 과학적 사대정신(회의주의, 이상주의, 수학)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대결시키는 그리스도교 변증론의 구상을 짜기 시작하였으나, 이 저술은 완성을 못보고 단편적 초안만 남겨졌다. 이것이 유명한 수상록 ≪팡세≫(Pensees sur la region)이며, 그가 별세한 후에 출판되었다. 또한 1658년에는 ‘나선(螺旋)’의 문제에 관한 사색을 했고, 미적분학(微積分學)을 발표하여 훗일의 라이프니츠 미적분학의 선구(先驅)가 되었다. 만년에는 지병(持病)에 시달리면서 고뇌 속에 사색을 계속하였다.
사상사적으로 그의 업적을 생각해 보면, 르네상스 이래로 일어난 근대 자연과학, 인문주의적 인간 형성, 종교개혁운동을 계기로 대두된 아우구스티노적 종교사상 등 세 가지를 계승 발전시켰는데, 이것은 그가 수립한 3개의 질서(물체 · 정신 · 자애)에 각각 자리를 잡을 수 있다. 그는 도덕가로서 개아(個我)의 완성사상을 추구했는데, 이것은 이 3개 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인간중심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자연 · 인간 · 신의 문제가 저마다 실재성을 드러내면 전개되고 있다. 자연과학에 있어서 그는 스콜라적 자연학이나 데카르트적 자연학에 대해, 갈릴레이에서 뉴턴으로 발전하는 근대적 실증적 자연과학 계열에 있으며, 인간문제 있어서는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에 대해 주체적 고찰방법에 의해 후세의 실존적 사유(思惟)를 예시(豫示)하였다. 종교문제에 있어서는 스콜라적 주지주의적인 교의학 및 윤리학을 타파하고, 의지결단과 내면성을 중시하는 근대 · 현대 가톨릭시즘의 선구를 이루고 있다. 그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뒤를 잇는 프랑스 도덕가의 한 사람이지만, 그 인간완성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에 내재(內在)하지 않고 하느님의 초자연적 관계에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심정설>(心情說)에 있어서 베르그송(H. Bergson) 등의 사상적 선구가 되고 있다.
무교절 축제
무교절 축제
하느님께서는 니산 14일 저녁부터 21일 저녁까지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무교절을 반드시 지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해가 지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기에 14일 저녁은 15일의 시작이므로 축제기간은 7일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집에 누룩이 있어도 안 되고, 누룩 든 빵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이스라엘에서 잘려 나갈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축제 기간에는 첫날과 마지막 날에 거룩한 모임을 열어야 합니다. 거룩한 모임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모임입니다. 그 두 날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하느라고 마음을 빼앗긴다면 거룩한 모임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허락된 것은 그날 저마다 먹어야 할 것을 준비하는 정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이 축제를 지내야 합니다. 이 축제를 지냄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을 대대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고,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반드시 지키라고 명령하신 무교절 축제를 지냄으로써 이집트의 노예생활과 약속의 땅에서의 자유인으로서의 삶은 반드시 달라야 하는 것을 기억하고, 하느님의 구원에 감사하며 노예생활에서의 요소들은 모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농부들도 누룩 없는 빵의 축제를 지냈는데, 이 축제의 목적은 새 수확물을 묵은 수확물과 뒤섞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무교절에는 새 곡식물을 순수하게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뜻에서 옛 곡물로 만든 누룩을 넣지 않은 채 만들었습니다. 또한 거룩한 제사 의식에도 순수한 빵만 드리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참조: 탈출23,18;레위2,11;6,9-10).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누룩은 발효를 시켜 빵을 부풀리는데 이것을 변질로 이해하면 “부패와 타락의 상징이며 죄의 원이”가 됩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어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리사이들이나 사두가이들의 부정적인 모습들은 누룩이 되어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마음을 변질시키니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주님께서도 경고하셨던 것입니다(마태16,6; 마르8,15;루카12,1). 하느님 자녀들은 언제나 변질을 가져오는 누룩에서 벗어나 언제나 순수한 반죽으로 참된 파스카 어린양이신 예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