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성(1943∼1984). 수원교구 소속 신부. 세례명 토마스 아퀴나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중원리(中元里)에서 태어났다. 성신중고등학교를 거쳐 1970년 7월 11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고, 경기도 안중(安仲)본당 주임신부로 첫 사목생활을 시작하였다. 1972년 5월 군종신부로 육군에 입대, 1977년 12월 대위로 예편한 후 경기도 왕림(旺林)본당 주임신부 겸 광성국민학교 교장으로 사목하였다. 1983년 4월 수원 가톨릭대학 설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자 사무국장 겸 건설본부장에 임명되어 수원 가톨릭대학 건립을 지휘하는 한편 수원교구 건축위원, 광암학원 이사, 수원교구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1984년 2월 수원 가톨릭대학을 완공 후 동(同)대학의 기획관리처장 겸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84년 10월 24일 간암으로 서울 명동 성모병원에서 선종, 미리내 소재 수원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정해박해 [한] 丁亥迫害
1827년(丁亥年) 전라도 곡성(谷城)을 시작으로 전라도 지역, 경상도 상주(尙州), 충청도와 서울의 일부지역에 일어난 박해. 1801년 신유(辛酉)박해 이후 전국적인 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신유박해의 마무리를 위해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은 천주교탄압의 법적 근거가 되어 1815년 을해(乙亥)박해 등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교우들은 정하상(丁夏祥)을 주임으로 교회재건과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26년 일본의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우리나라에 서신을 보내 일본에서 배를 타고 도망친 6명의 천주교인을 체포해 달라고 요청, 관헌들의 천주교인 밀고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정해박해는 시작되었다. 곡성에서 시작된 박해는 전라도 전역에 파급되면서 240여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이어 4월 22일(음) 전주포졸들이 경상도의 상주에서 신태보(申太甫)를 체포, 전주로 압송해 가자 이를 계기로 경상도에서도 박해가 시작되어 상주에서 5∼6개소의 교우촌이 습격당하여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서울에서는 4월 21일(음) 이경언(李景彦)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충청도의 단양(丹陽)에서는 경상도의 박해를 피해 유성태(劉性泰)의 집으로 피신해 온 교우들이 체포되어 충주(忠州)로 압송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서울 등지에서 2월부터 5월까지 4개월 동안 500여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었으나 전라도에서 이경언 · 이일언(李日彦) · 정태봉(鄭太奉) 등 8명이, 경상도에서 박보록(朴甫祿) · 김사건(金思建) · 김언우 등 6명이, 충청도에서 유성태 등 500여명중 15명만이 옥사 또는 처형당해 순교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배교하고 석방되거나 유배되었다. 이것으로 정해박해는 종식되었으나 피해가 가장 큰 전라도 지방의 교회는 거의 폐허화되었다.
정하상 [한] 丁夏祥 [관련] 기해박해 정약종
정하상(1795∼1839). 성인. 축일은 9월 20일. 본관은 나주(羅州), 한국 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이고,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의 조카이며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부친은 실학자 이익(李瀷)의 학문을 이어 서학(西學)을 연구하고,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참여한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으며, 1801년 순교하였다. 순교적 희생으로 진리를 증언한 순교자인 아버지와 신심이 유달리 깊었던 어머니 유 세실리아(柳∼)의 인도로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깨우쳤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부친과 친형 철상(哲祥)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하여 순교하자 7세인 정하상은 누이동생 정혜(情惠)와 어머니를 모시고 마재[馬峴, 京畿道 楊州郡 瓦阜面 陵內里 마재부락]의 큰댁으로 낙향하였다. 20세 때 단신 상경하여 교우 조증이(趙曾伊) 집에 의지하며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귀양가 있는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수년 간 학덕을 닦았고, 서울로 귀환하여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한 초석으로 종횡의 활동을 펴게 된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오직 한 분이던 성직자 주문모(周文謨) 신부와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들인 순교한 후 좀처럼 부흥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첫째로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하고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조직화하는 한편, 한국 교회에 다시금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주교(北京主敎)를 상대로 성직자영입운동(聖職者迎入運動)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이 어려운 사업을 현석문(玄錫文, 가롤로)과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등 희생적이며 유능한 동지와 힘을 모아 추진하였다. 정하상은 북경주교에게 한국 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직접 호소하기 위하여 1816년 이후 전후 아홉 차례나 국금(國禁)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복 5천리의 길을 엄동설한에 노복의 비천한 역무를 담당하며 부경사대사신(赴京事大使臣)의 사행 기회에 틈타 북경을 왕래하며 북경주교에게 계속 청원(請願)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경교회의 사정도 여의치 못하여 한 사람의 성직자도 조선왕국으로 파견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1823년부터 정하상은 국내 교회의 실질적 지도자의 일을 맡아보면서 역관(驛館)으로 북경과의 연락이 용이한 유진길과 부경사행의 노복인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을 밀사로 북경 교회와 꾸준히 교섭케 하였다. 정하상의 성직자 영입운동은 마침내 세계교회로까지 확대된다. 즉 북경주교를 대상으로 하는 성직자 영입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움을 체험적으로 간파하게 된 정하상은 마침내 세계 가톨릭의 최고 수위권자(首位權者)인 교황에게 청원하기로 한 세계적 경륜(世界的 經綸)의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825년 정하상은 유진길과 의논 후 “저희들은 교황성하께 두 가지 일을 겸손되이 제안하옵는데, 이 두 가지가 똑같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나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옵니다. … 신부를 파견하는 것이 저희들로서는 큰 은혜요 저희들에게는 크나 큰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오나, 이와 동시에 저희들의 욕구를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신적 구원을 보장하여 줄 방법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일일 것입니다”라고 매우 함축적인 내용을 담은 대교황청원문(對敎皇請願文)을 올렸던 것이다. 성직자의 파견만인 아니라 영속적인 구원을 보장할 적극적 대책을 청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청원문은 북경주교의 동정어린 배려로 마카오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경리부로 접수되었고, 포교성성장관 움피에레스(Umpierres) 신부의 의견이 첨부되어 1827년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고, 포교성성장관 카펠라리(Capellari) 추기경의 주선으로 파리 외방전교회(巴里外邦傳敎會, La Societe des Missions-Etrangeres des Paris) 소속의 전교성직자이던 브뤼기에르(Brugiere) 주교의 조선전도 자원이 있어 마침내 1931년 9월 9일자로 교황 복자 그레고리오 10세[전기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임되어 등극]에 의해 조선교구의 설정이 세계에 선포되었다.
정하상의 업적을 살펴보면 첫째 그는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진보적이고 세계적 안목을 가졌던 박해시대 한국 교회 평신도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둘째로 정하상은 조선교구 설정 이후 조선교구로 부임해 오는 성직자를 계속 영입(迎入)해 들였고, 그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로의 회장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여 한국 교회 발전에 지극히 큰 공헌을 쌓았다. 즉 1834년말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비밀리에 영입하였고 1835년 모방(Maubant) 신부, 1836년에 샤스탕(Chastan) 신부, 그리고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 주교를 영입하였다. 이리하여 조선교회가 교구장인 주교, 전교자인 성직자 그리고 교구 신자를 가지는 교회로의 교회체제를 갖추게 했으며 이들 성직자를 협조하여 한국 교회 발전을 위해 몸바쳐 일하였다. 셋째로 그는 앵베르 주교로부터 속성 신학교육을 받고 성직자(聖職者)가 되기 위해 선택된 한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적 열성과 교리에 대한 지적 이해, 그리고 놀라운 신덕에 탄복한 앵베르 주교가 베트남의 베리트(Beryte) 주교의 예를 따라 박해하의 조선 교회에 필요한 방인성직자 양성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학지(學知)와 수덕(修德)과 신망(信望)의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고 정하상 자신도 순교하게 되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넷째로 장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상재상서>(上宰相書)로써 박해자에게 천주교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문서로 힘있게 주장하였다. 체포되기 전에 미리 저술하였고 체포 후 박해 당국자에 제출된 <상재상서>는 불과 2,000여 자의 단문의 글이나 가장 요령 있게 주장한 명문으로 이름 높은 소책자이다. 다섯째로 정하상은 생명의 극(極)을 다하여 순교함으로써 천주의 신앙을 증거하고 영생의 영광을 얻었으며 한국인의 신앙을 굳게 실증하였다.
그는 기해박해 때인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45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그보다 두 달 늦게 79세의 노모 유 세실리아도 옥사 순교하였고, 다음 달에 누이동생인 정혜마저 순교하였다. 이 세 분 순교자는 1925년에 복자로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정하상의 일생은 오로지 천주만을 위한 고귀한 것이었다. (⇒) 기해박해, 정약종 (李元淳)
[참고문헌] 邪學謀叛罪人洋漢進吉等鞫案 / 右捕盜廳謄錄 / 憲宗實錄 /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 A. Launay 原著, 安應烈 譯, 한국 79위 순교복자전, 京鄕雜誌社, 1957.
정태봉 [한] 鄭太奉
정태봉(1795∼1839). 순교자. 세례명은 바오로. 충청도 덕산(德山)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그 뒤 어느 정도 자립할 수 있게 되자 1824년 내포(內浦) 지방을 떠난 전라도 용담(龍潭)에 정착,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순교(殉敎)하기를 원하여 가끔 자신의 턱을 도마에 갖다 대고 참수(斬首)당하는 연습을 하곤 하였다. 1827년 한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용담 아문(衙門)에서 심문과 형벌을 받은 뒤 전주(全州)로 압송되었고 전주감영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고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난 의정부(議政府)에서 사형선고를 확정판결을 내리지 않아 전주옥에서 12년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그 여파로 사형이 확정되어 이해 5월 29일(음 4월 17일) 그 동안 함께 옥살이했던 이일언(李日彦), 신태보(申太甫), 이태권(李太權), 김대권(金大權) 등과 함께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정치신학 [한] 政治神學 [영] political theology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신학의 한 흐름으로, 신앙의 제재(題材)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신학을 가리킨다. 정치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이를 전개한 사람들은 메츠(J.B. Metz), 몰트만(J. Moltman), 콕스(H. Cox) 등이다. 이들은 이전까지 신학이 사회와는 단절된 개인의 신앙만을 문제 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신앙이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하여 신앙의 실천이 사회와는 무관한 개인의 인격적인 문제에만 국한되어 왔다고 비판하면서, 인간은 사회와 밀접히 결속되어 있는 만큼 정치에 관심이 없는 신학은 올바른 신학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신앙에 함축되어 있는 정치적인 역량을 개발하여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정치신학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종말론적인 약속들, 예컨대 정의, 자유, 평화, 화해 등을 성취하기 위해 그리스도 교인들은 사회의 온갖 구조악과 맞서 싸워 이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치적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보다 나은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구원에 동참하는 행위임을 정치신학자들은 신앙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치신학자들은 정치와 신앙을 혼동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이 처한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신앙인인 살아가야 할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끊임없이 추구함으로써 현실에 책임을 지는 신학일 따름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재난을 겪은 서유럽 신학자들에 의해 태동한 정치신학은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차별받는 흑인들에게 수용되어 흑인신학으로, 라틴아메리카로 건너가 해방신학으로, 여성운동가들에게 수용되어 여성신학으로 발전되어 억눌린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신학이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