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진(?~1830). 순교자. 세례명은 요한.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이종사촌 신태보(申太甫)와 함께 입교, 주문모(周文謨) 신부 입국 후, 성사(聖事)를 받기 위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신부를 만나지 못해 매우 낙담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05년 한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되었으나 신태보가 관헌을 매수, 석방되었다. 그 뒤 정약용(丁若鏞), 홍낙민(洪樂敏)의 아들 홍우송, 신태보 등과 성직자영입운동(聖職者迎入運動)을 전개, 1811년과 1813년 두 차례에 걸쳐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갖고 북경을 왕래하였다. 그러나 조선 교회측과 북경교구장 수자 사라이바(Souza-Saraiva) 주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파견이 어렵게 되자 오직 개인적인 신앙생활에만 전념,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교우들을 권면하다가 1830년 경기도 양지(陽智)에서 사망하였다.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의 기록(Mgr.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e, vol. 4)에 의하면, 이여진은 죽기 전에 자신이 죽으면 가슴에 구멍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과연 사후, 가슴에 5개의 구멍이 생겼다고 한다.
이여삼 [한] 李~
이여삼(?~1812). 순교자. 세례명 바오로. 1839년 순교한 이태권(李太權)의 숙부. 충청도 홍주(洪州)의 양반 가정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791년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전라도로 이사해 살았고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공주(公州)로 피신해 있다가 1802년 2월(음) 셋째 형과 둘째 형 이무명의 아들인 태권과 함께 체포되어 조카 태권은 풀려나고 형과 함께 유배되었다. 1812년 유배형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으나 다시 체포되어 홍주 관아에서 장하치명(杖下致命)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약 43세였다.
이양등 [한] 李陽登 [관련] 진목정
이양등(?~1868). 순교자. 세례명 베드로. 서울 태생으로 박해를 피해 멀리 경상도 울산의 죽령(竹嶺, 대나무고개)으로 내려와 공소회장을 지냈다. 병인박해를 피해온 김종륜(金宗倫, 루가), 허인백(許仁白, 야고보)를 만나, 이들 3인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더 깊은 산중으로 찾아 헤매다가 경주땅 산내[현재 경북 월성군 산내면]에 있는 소래동 단수골이란 석굴(石窟)을 발견하여 그곳을 피난처로 삼아 목기(木器)를 만들어 팔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1868년 5월 ‘덕산묘지도굴사건’의 여파로 전국적인 박해가 있었고, 이들 셋은 이때 경주 진영의 포졸들에게 잡혔다. 경주 진영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고, 8월 울산감영으로 이송되어 이틀 후인 8월 14일(음 7월 28일) 장대벌 형장에서 효수되었다. 이들의 유해는 허인백의 부인 조애에 의해 수습되어 사형장 근처의 다리 밑에 가매장 되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면서 유해는 월성군 산내면 진목정 안산에 합장되었고 1932년 5월 19일 대구 감천리 공원묘지로 이장되었다. 1962년 10월 25일 석곽에 모셔져 공원묘지 산위에 있는 신천동 복자성당 구내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진목정
이아기련 [한] 李阿只連
이아기련(?~1801).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사학징의≫(邪學懲義)에는 성이 권(權)씨로 나온다. 충청도 출신의 과부로 슬하에 아들을 두었으나 두 아들이 모두 천주교를 배척, 혼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체포되어 충주감영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1801년 10월 3일 이기연(李箕延), 이부춘(李富春)과 함께 충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아가다2 [한] 李~
이아가다(1784~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아가다. 성인 이호영의 누나.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결혼했으나 3년만에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모친, 동생과 함께 입교했고 그 후 부친이 대세(代洗)를 받고 사망하자 동생을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 1835년 2월(음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동생 이호영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여인으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형벌과 고문을 참아냈고 형조에서 동생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이 연기되어 4년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는데, 고통스러운 옥중생활 중에도 동생과 함께 한 날 한 시에 순교하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인내와 끈기로써 생활하여 동생에게 먼저 순교의 영광을 얻게 하고 자신도 동생이 옥사한지 6개월 되던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그 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