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벽 [한] 李檗

이벽(1754∼1786). 한국 천주교의 선구자인 이벽은 경주 이(李)씨 부만(溥萬)의 둘째 아들로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덕조(德操), 혹은 벽(蘗)이라고도 하며, 호는 광암(曠菴), 세례명은 세자 요한이다. 건장한 신체에 무술에도 능했으며, 경서(經書)에 전통하고 언변도 좋아 물 흐르듯 했다고 한다. 아버지 부만은 이벽이 무관으로 출세하길 바랐으나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미움을 사서 벽(僻)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1777년(정조 1년) 권철신(權哲身) · 정약전(丁若銓) 등과 함께 강학에 참가하여 하늘, 세상, 인성(人性)에 대해 토론하였고 옛 성현들의 윤리서(倫理書) 등을 함께 검토함과 아울러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한역판(漢譯版) 철학, 수학, 종교서적 등을 공부하였다. 이벽은 이 때 초보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천주교 교리 연구에 전념하였다. 1783년 정약전 · 약종 형제들과 함께 하느님의 존재와 그 유일성, 천지창조, 영혼의 신령성(神靈性)과 불면성, 후세에서의 상선벌악(賞善罰惡) 등의 철학적 논제(論題)에 대해 토론하였다. 초보적인 지식 속에서 진리에 목말라 하고 있던 이벽은 1783년 겨울 이승훈이 북경사절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훈에게 찾아가 천주교에 대해 소개하고 북경에 가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도 받아서 돌아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와 함께 천주교 서적을 구해 오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북경에서 그라몽(Grammont, 梁東材)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은 이승훈이 1784년 천주실의, 기하원본과 같은 서학서적, 상본, 망원경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이것을 받아든 이벽은 외딴 집을 세내어 천주교 교리연구와 묵상에 몰두하였다.

이를 통해 이벽은 종교의 진리에 대해 더욱 해박한 지식을 얻게 되었고, 중국과 조선의 미신에 대해 철저히 반박할 수 있게 되었으며, 칠성사와 연중기도, 성인의 행적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도 연구하였다. 이벽은 드디어 1784년 음력 9월경 수표교(水標橋)에 있던 자기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복음의 전파에 나섰다. 최창현(崔昌顯), 최인길(崔仁吉), 김종교(金宗敎), 김범우(金範禹), 지황(池璜) 등의 중인계급과 마현의 정약전 · 약용 형제, 양근의 권철신 · 일신 형제 등의 양반계층에도 복음을 전파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유림(儒林)은 천주교 교리가 국가의 지도이념인 성리학적 윤리체제를 송두리째 파괴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중 이가환(李家煥)은 “서교(西敎)가 비록 명설(明說)이긴 하지만 정학(正學)은 아니다”고 하면서 이벽을 토론으로써 설득하려 했으나 이벽의 정치한 논리와 장하(長河) 같은 웅변에 오히려 설득당했다 한다. 이기양(李基讓)도 이벽과 토론했으나 이벽이 세상의 기원, 우주의 질서, 하느님의 섭리, 영혼의 본성, 후세의 상벌과 조화에 대해 설명하자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로부터 1년 후인 1785년 중인 김범우가 형조에 잡혀가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단양(丹陽)으로 귀양가는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였다. 이를 기화로 평소 천주교에 대해 못 마땅하게 생각하던 유림들이 들고 일어났다. 태학생(太學生) 정숙(鄭淑)은 천주교 신자들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통문(通文)을 돌려 천주교인들과는 완전히 절교하라고 권고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자기 집안에 불행을 가지고 올지도 모를 이 종교를 버리게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썼다. 이벽의 아버지도 이벽을 배교시키기 위해 나섰다. 그는 성질이 급한 사람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벽의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배교만을 강요하였다. 이벽이 말을 듣지 않자 그는 목을 매어 자살하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이벽은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을 써서 자신의 신앙을 감추었고 그 후로는 외부와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살았다. 그는 자신의 배교적(背敎的) 행위에 대하여 무서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다가 1786년 33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

교회사적으로 보아 이 벽은 조선 천주교 창설의 선구자로 위치 지을 수 있다. 물론 이벽 이전에도 천주교에 접한 사람은 많았다. 조선 후기 사회적인 모순이 누적되면서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불과한 주자학에 대해 심한 반발을 느낀 많은 학자들이 서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성호 이익(李瀷)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학자들은 서학의 과학기술을 유용한 학문으로 받아들여 연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만은 이단시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학을 학문으로써 뿐만이 아니라 종교로서 받아들인 이벽, 이승훈, 정약전 · 약종 형제, 권철신 · 일신 형제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조선 천주교 창설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사람이 이벽이다. 그는 1777년 이래 주어사, 천진암에서 있었던 수사학(洙泗學)적 분위기의 강학을 그리스도교 진리 탐구와 실천적인 분위기로 바꿨고, 이승훈에게 천주교를 소개하여 중국에 가 영세를 받게 함으로써 1784년 많은 조선인 신자 공동체를 이룩하게 하였다. 한국 천주교가 이 해를 천주교 창설의 원년으로 삼아 기념하고 있음을 미루어 볼 때 이벽의 선구자적 역할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남달리 짧았던 생애와 박해로 인한 유작(遺作)의 부족으로 이벽의 사상을 자세하게 알기가 어렵다. 이벽의 작품으로 주장되는 것은 ≪만천유고≫(蔓川遺稿) 속에 수록되어 있는 <천주 공경가>(天主恭敬歌), <성교요지>(聖敎要旨)에 불과하나, 이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와 사료 비판이 계속 요청되고 있다. 이와 아울러 정약용의 ≪중용강의≫(中庸講義) 세주(細註)에 언급된 단편적인 사실들을 통하여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벽의 서학사상도 다른 남인신서파(南人信西派)와 같이 전통적인 주자학에 대한 비판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경서(經書)에도 박학다식했던 이벽은 주자학을 선유(先儒)들의 사상에 비춰 비판하면서 진유사상(眞儒思想)인 수사학적인 사상체계에 도달하였고, 마테오 리치의 보유론(補儒論)을 흡수하여 그의 그리스도교 사상이 싹틀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보유론은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에서 주장한 것으로 중국의 근세사상계에 큰 파문을 던진 것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후기 남인신서파의 복고주의적인 사상체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벽은 ≪천주실의≫와 함께 ≪칠극≫(七克), ≪영언여작≫(靈言蠡勺), ≪직방외기≫(職方外紀) 등을 접하면서 신의 존재, 원죄, 영혼불멸, 사후(死後)의 세계, 서양의 신학에 대한 이해 등의 사상 폭을 넓히고 깊게 하였다. 이로써 이벽은 유교사상과 천주교 사상을 접맥시켜 한국의 천주교가 꽃필 수 있는 기반을 닦은 인물로 기록될 수 있게 된다. 이벽의 사상체계와 지식은 정약용에게 전달, 수용되었다.

[참고문헌] 홍이섭, 이벽-한국 근세사상상의 그 위치, 사회과학연구회, 사회과학, 3권, 한국교회사연구논문선집 I에 재수록, 1960 / 홍이섭, 서학사상상의 이벽, 한국사의 방법, 탐구당, 1968 / 샤를르 달레 原著,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분도출판사, 1979 / 김옥희, 광암 이벽의 서학사상, 가톨릭출판사, 1979 /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의 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최석우, 한국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이백주년기념주교위원회 [한] 二百周年紀念主敎委員會 [영] Commission for Bicentennial Celebration

주교회의 산하기구의 하나로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 기념사업을 통하여 교회 쇄신과 민족 복음화를 이룩하자는 목적으로 1980년 가을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설치한 위원회. 200주년 기념과 관련된 제반업무에 관한 최고 의결기관이다. 위원장 윤공희 대주교 아래 200주년을 내실있게 기념하기 위해 각종 신심운동을 활성화시키며 홍보활동을 전개하는 정신운동위원회(위원장 정진석 주교), 신앙대회, 시성식, 교황방한 등 각종 행사와 일시적인 문화행사를 담당하는 기념행사위원회(위원장 경갑룡 주교), 한국 교회의 소신을 위해 전국 사목회의 및 교구 사목회의 추진 개최하는 사목회의위원회(위원장 박정일 주교), 통일 성가집 편찬, 성서 번역, 한국 순교자 시성시복 등 지속적인 문화사업을 담당하는 기념 사업위원회(위원장 김남수 주교) 등 4개의 집행위원회 및 사무처와 중앙위원회 등의 직속 부서를 두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이방인 [한] 異邦人 [라] gentes [영] gentiles

유태인의 세계관에는 하느님이 세계 여러 민족 중에서 유태인을 특별히 선택하여 선민으로 세웠다는 자부심이 짙게 배어있다. 이러한 선민사상에 입각하여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인은 할례를 받지 않은 비유태인을 천시하며, 그들은 하느님이 내리신 특권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방인이란 유태인 이외의 세계 여러 민족을 가리킨다(사도 49:6, 로마 2:14). 이러한 개념은 바빌론 유배기 이후의 묵시문학과 외경, 후기 유태교문서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배기에 들어간 유태인에게는 배타적인 사상의 경향이 농후해지고 유태인 공동체의 특권의식을 강조하였다. 이방인들과의 교제나 식사를 엄격히 금했다. 이러한 편견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남으로써 시정될 수 있었다. 복음은 유태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리지 않고 모두 다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사실과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할 수 있음을 선포하였다. 여기서 유태교는 민족종교에서 그리스도교라는 세계종교로 전환했음을 뚜렷하게 나타내 준다. 실제로 바울로는 이러한 복음을 가지고 이방인에게 전도하였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이바르바라 [한] 李∼

이바르바라(1825∼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동정녀(童貞女). 성녀 이정희(李貞喜) · 이영희(李英喜)의 조카.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 청파동에서 자라났고 어려서 부모를 여윈 후로는 두 이모 이영희 · 이정희에게 의지하고 살았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4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여러 차례의 신문을 받은 후 형조로 이송되었고 형조에서 어린 것이 배교하지 않는다고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배교하지 않자 포청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포청에서 전보다 훨씬 잔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꿋꿋이 참아 내며 함께 옥에 갇혀 있는 어린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던 중 5월 27일 기갈과 염병,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이민식 [한] 李敏植

이민식(1829∼1921). 1846년 병오(丙午)박해 때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시신을 운반한 사람. 세례명 빈첸시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목격하고 40여일동안 김 신부의 시신을 거두려고 노력한 끝에 10월 26일 밤 포졸들의 감시를 뚫고 김 신부의 시신을 거두어 미리내에 안장했고, 그 뒤 1901년 시복 수속 관계로 김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게 되자 유일한 증인으로 발굴에 참여하였다. 평생을 자신이 거두어 안장한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돌보다가 1921년 12월 9일 사망하였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