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교회사서설 [한] 朝鮮敎會史序說 [관련] 한국천주교회사

달레(Dallet) 신부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Historire de l’Eglise de Coree)의 서설 부분을 1947년 3월 이능식(李能植) · 윤지선(尹志善)이 역주(譯註)하여 발간한 책. 서울 대성(大成)출판사에서 4 · 6판 317면으로 간행한 이 책을 통하여 불어(佛語)로 저술된 ≪한국천주교회사≫의 서설 부분이 처음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당시 이능식은 서울대학에서 동양사(東洋史)를, 윤지선은 연희대학에서 국문학을 각각 강의하였다. 그 뒤 같은 내용을 1966년 정기수(丁奇洙)가 ≪조선교회사서론≫(朝鮮敎會史序說)이란 제목으로 번역하여 서울 탐구당(探究堂)에서 발간하였고, 1979년 안응렬(安應烈) · 최석우(崔奭祐)가 ≪한국천주교회사≫의 모든 내용을 역주할 때 이 서설 부분이 다시 번역되었다. (⇒) ≪한국천주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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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교구통신문 [한] 朝鮮敎區通信文 [프] Le Seoul Bulletin [관련] 타벨라

한국에 거주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정보교환 수단으로 1902년부터 1921년까지 20년 동안 프랑스어로 등사 간행한 잡지. 이 잡지는 고유한 명칭은 없고, 편의상 서울에서 발행된 것이므로 ‘le Seoul Bulletin’이라 하여 이를 ‘조선교구통신문’으로 번역하여 불리게 되었다. 이 잡지의 성격에 대해서는 1909년에 발행된 <조선교구통신문>의 내용 중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발행 횟수는 월 2회, 조선 안에 거주하는 천주교 성직자라면 비매품으로 누구나 받아 볼 수 있다. 편집자는 드예(Deshayes, 曺) 신부이고, 관리인은 비에모(Villemot, 禹) 신부로 되어 있다. 내용은 종교적 ·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 · 문화적인 모든 분야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아주 객관적으로 기술된 내용이고, 가끔 해설이 첨부되어 있기도 하다. 편집은 드예 신부 외에 비에모 신부, 망(Meng, 明) 신부, 라리보(Larribeau, 元享根) 신부 등이 여건이 허락되는 대로 맡아 왔는데 1921년 11월 30일 이후 폐간된다는 예고도 없이 발간이 중단되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타벨라>(Tabella)지의 속간이 주요한 원인으로 추론되고 있다. (⇒) <타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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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교구 [한] 朝鮮敎區 [라] Vicariatus Apostolicus Coreae

1831년 9월 9일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왕국에 설정된 교구. 정확한 명칭은 조선대목구(代牧區)이나 편의상 조선 교구로 부르고 있다.

1. 조선교구가 설정되기까지 : 1660년 중국 남경(南京)에 교구가 설정되면서 조선지역은 남경교구에 포함되었다. 그 후 조선지역은 1792년 북경 교구 구베아(Gouvea) 주교의 개인적인 보호와 지도에 맡겨졌고, 이러한 위임은 구베아 주교의 후계자들에게도 계승되어 조선 교회가 북경교구에 속한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되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일부 학자들이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기 시작한 후, 주어사 · 천진암(走魚寺 · 天眞菴)에 모여 강학(講學)을 하는 동안 천주교 신앙에 대한 싹이 텄다. 그래서 1784년에 이벽(李檗)의 권유로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 들어가 세례를 받고 귀국한 다음, 그들은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신앙공동체의 출현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을 찾게 된다. 초기의 신도들은 스스로 신앙을 찾고 구했으며 실천했다는 점에서 세계 교회사상 유례가 없는 자율적인 교회 창설의 전통을 남겼다. 그리고 한국 교회를 가톨릭 교회 본연의 교회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열성적으로 성직자 영입(迎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795년에는 한국 교회의 사목 책임자(司牧責任者)인 북경주교가 보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순교하자, 조선 교회는 또 목자 없는 교회로 돌아갔다. 그래서 제2차 성직자 영입운동을 벌이게 되었는데 청원(請願)은 당연히 조선 교회의 사목책임자인 북경주교가 대상이 되었으나 자율적 활동으로 신앙을 구하고 교회를 창설한 전통을 가진 신자들이기에 마침내 가톨릭의 수위권자(首位權者)인 교황에게 직접 청원하는 적극적인 대책을 세웠다. 조선 교회가 창설된 후, 조선의 신도들에 의해 제기된 조선 교회와 로마 교황과의 연계 발상(連繫發想)은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에 처음으로 나타나 있다. 그 뒤 1811년 권(權)기인 등 8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은 조선 교회의 재건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로마 교황청에 주교의 파견을 요청함으로써 교구설정을 위한 노력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에 이어 교황이 조선교구의 설정을 결심케 한 것은 1825년에 쇄국의 조선왕국에서 발송한 정하상(丁夏祥)과 유진길(柳進吉) 등의 간절한 청원서였다. 이 청원은 조선 교회를 위한 성직자 파견만이 아니라, 조선 교회에 대한 영속적 교정(敎政)대책의 강구를 요청하였다.

조선교구의 설정에는 북경주교의 호의가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혹독한 박해 하에서도 발전하는 조선 교회의 존재는 북경 주교의 뜨거운 감격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사목 책임자로서 그는 깊은 이해와 뜨거운 후원으로 로마교황에게 조선 교인들이 직소(直訴)하는 청원을 오해 없이 수긍하고 이를 교황에 전달하는 데에 적극 협력하였다. 조선 교회의 청원은 1827년 포교성성(布敎聖省)에 접수되고 교황에게 상정되었는데 교황과 포교성성 장관인 카펠라리(Cappellari)추기경은 성심을 다하여 조선 교회의 대책을 서둘렀다.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에 조선 선교의 중책을 맡아 주도록 거듭 교섭하였다. 조선 교회를 위하여 더 다행한 일은 파리 외방선교회의 브뤼기에르 신부가 1829년 멀리 방콕에서 조선전도를 지원하고 나선 일이고, 1830년에는 조선 교회를 위해 적극 힘써 준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임되어 그레고리오 16세로 즉위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교구의 설정을 위한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사도전승의 교회’의 제도가 조선에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2. 조선교구의 활동 : 1831년 조선교구가 독립교구로 설정된 이후 그 역할과 업적, 그리고 희생은 엄청나게 컸다. 그러나 조선 교회의 끈질긴 저력은 초기 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자율적으로 교회를 일으키고 지켰던 연면한 전통에 그 바탕이 있었다. 모진 박해와 시련 속에 자라온 조선교구는 1911년에 서울교구로 개칭되었으며 전라도와 경상도지방을 대구(大邱)교구로 분리시켜 주었다. 한국 전역을 관할하였던 조선교구 80년 발자취는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선교사들의 포교활동 : 조선교구의 사목을 맡은 파리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은 조선시대에 목숨을 걸고 포교하다가 많은 순교자를 냈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만주 뻬리쿠(哵咧溝)에서 병사하였다. 그 후 최초로 입국한 선교사는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였다. 그는 1836년 1월, 조신철(趙信喆)과 정하상의 안내로 변문(邊門)을 거쳐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자, 정하상의 집에 머무르면서 조선어를 배우는 한편 한문으로 성찰방식(省察方式)을 만들어 번역하고, 고해성사를 비롯해서 모든 성사를 집행하였다. 그는 또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포교했는데 경기도와 충청도에 분포된 교우촌(敎友村)들을 찾아가 각 교우촌의 회장을 임명하고 주일과 축일에도 전례적(典禮的)인 모임을 갖도록 하였다. 모방 신부의 활동 중 가장 괄목할 업적은 1836년 말에 3명의 조선인 소년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 김대건(金大建)을 선발하여 마카오의 신학교에 보낸 일이다. 샤스탕(Chastan, 鄭) 신부는, 소년들을 데리고 간 정하상 등의 안내로 무사히 입국하여, 전교에 필요한 조선어를 외우면서 교우들이 사는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성사를 집행하였다.

1838년에는 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亭) 주교가 입국하여 당시 9천여 명에 달한 조선신자들을 사목하였다. 한편, 그는 사제직에 적합한 신자들을 선발하여 신학과 라틴어를 강의하였다. 그 중에는 42세의 정하상도 있었는데 그들은 속성(速成)으로 3년내에 신품(神品)을 받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인하여 이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정하상도 선교사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1841년 8월 22일에 조선교구는 교황으로부터 ‘무염시태’(無染始胎)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主保)로 받아 모시게 되었다.

3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Ferreol, 高) 주교는 1845년에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와 함께 바다로 입국하였다. 그는 한국인 첫 신부인 김대건에게 신품성사를 베풀고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신심(信心)단체들을 설립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긔해일긔≫를 편찬하는 한편 ≪병오일기≫(丙午日記)[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9명의 순교자 전기 포함]를 수집하여 로마로 보냈고, 박해를 피해 숨어 다니며 포교에 힘쓰다가 1853년 45세로 병사하였다.

철종(哲宗)시대의 조선교구는 궁핍하고 가난한 중에도 종교상으로는 풍요한 때였다. 1854년에 입국한 4대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는 1857년에 다블뤼 신부에게 조선에서 최초로 주교의 성성식(成聖式)을 올리어 계승권을 가진 보좌주교로 임명하고, 처음 성직자회의도 개최하였다. 그는 조선교구 신자생활 전반에 관한 지침을 제시하고 사목서한(司牧書翰)인 <장주교 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를 1859년 8월 2일자로 일반 신자들에게 발표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또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를 시켜 고아를 기르는 성영회(聖嬰會)를 운영토록 했으며 기아(棄兒)를 거두어 키웠다. 또 주요한 도시에는 ‘시약소’(施藥所)를 세워, 빈민들을 무료로 치료하여 주었는데 이것은 한국 교회 최초의 의료사업이었다. 그는 성직자 양성에도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제천에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 지휘로 신학교를 설치하여 정규과정을 가르치게 하였다. 당시 푸르티에 신부는 자연과학 · 조선의 식물학 · 지질학 · 동물학 · 과학 · 조선어 연구 · 문법서 · 나한한(羅韓漢)사전 등을 편찬하는 등 대단히 광범위한 학문연구를 10여년간 계속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베르뇌 주교가 먼저 순교하자 보좌주교였던 다블뤼 주교가 5대 교구장이 되었으나, 그도 곧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성무집행을 할 당시 여가를 이용하여 ≪조선사 연표(年表)≫와 조선역사에 대한 책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으며 ≪한한불(漢韓佛)사전≫을 준비하면서 그때까지 조선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천주교 서적을 재검토하였다. 그는 한국어의 단어에 대한 상당한 목록(目錄)을 수집하였는데 이러한 활동은 당시의 조선에서 처음 시도된 일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1857년에 ≪한한불사전≫을 거의 마무리하고 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사료수집에 착수하여 두 종류의 <비망기>를 작성하였다. 이와 같은 귀중한 사료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파리의 본부로 보낸 것은 그의 큰 업적이었다. 병인박해 때 살아남아 조선을 탈출한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6대 교구장이 되어 1877년에 다시 조선에 입국했으나 곧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한국 교회는 박해 가운데도 국내에서 각종 교리서의 번역, 보급과 함께 ≪한불자전≫(韓佛字典), ≪한어문전≫(韓語文典) 등의 편찬 작업을 진행하여 1880년과 1881년에 이의 간행을 보게 됨으로써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또한 달레(Dallet)의 ≪한국 천주교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가 1874년에 파리에서 출판됨으로써 가혹한 박해 속에서도 살아남은 한국 교회의 모습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1880년대 전반기부터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 얻게 되었다. 이 때 7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블랑(Blanc, 白圭三) 주교는 종현성당의 터를 잡아 성당 건립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한국 교회 재건에 공헌하였다. 1890년에는 뮈텔(Mutel, 閔德孝) 신부가 8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포교사업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 발전되었다.

② 평신도들의 활동 : 조선교구 시대의 평신도들은 수차에 걸친 가혹한 대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끝까지 사수(死守)하였다. 이 시기의 천주교 신자들은 대체적으로 가족적이고 친족적(親族的)인 관계와 연결되어 활동하였다. 그들은 극히 가난한 처지에 놓여 있었으나 박해를 피해 다니는 교우들끼리 촌락(村落)을 형성하여 공동의 생업(生業)을 영위하며 살아갔다. 교우촌의 신자들은 서로 돕고 협력하면서 정신적 위로와 극진한 교우애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교우촌에서 베푸는 교육의 내용은 대체로 교리 지식과 기도생활에 관한 것이었으며 순교정신에 대한 철저한 종교교육이 실시되었다. 그들은 심한 박해를 견디면서 선교사들을 보호해 주었고, 회장들은 선교사를 도와 복사(服事), 강론, 성경해설, 교리설명 등 다양하고 광범한 활동을 하였다. 흉년이 들어도 가난한 사람을 서로 돕고, 무식한 사람들을 가르치며, 병자들을 찾아 간호해 주고, 감옥에 갇힌 동료들을 위로하며, 버려진 어린이들을 데려다 키웠다. 그들은 이와 같은 선행을 통하여 포교하고 교세를 키워갔다.

당시 평신도들은 외적(外的)인 많은 제약과 박해 속에서도 차원 높은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박해 때문에 선교사와 회장을 잃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손실에 지나지 않았고, 당시의 교회는 단시일 내에 다시 생명력을 되찾는 저력을 보였다. 평신도들의 순교정신, 교우애, 실천의 덕행, 그리고 생명과 바꾸는 포교행위는 한국 교회의 굳건한 초석이 되었다.

③ 조선교구의 문화활동 : 조선교구의 문화활동은 한 마디로 한국 근대화의 정신적 기초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조선교구는 한국어의 연구와 한글보급에 크게 공헌하였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의식을 불어 놓은 사회 교육적 기능을 발휘하였다. 또한 1880년대 이후부터는 각종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또한 <경향신문>과 같은 교회의 공식 언론기관을 통하여 개화(開化)의 참된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교구 시대에 성취된 신앙의 자유는 우리나라의 종교 · 신앙의 자유를 확립시킨 기점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교구가 남긴 정신적 유산 중에 가장 큰 것은 순교의 전통이었다. 조선교구는 교구가 설정된 후만 하여도 세 차례나 큰 박해를 당하였고 1만여명의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그 가운데서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丙午迫害) 때 순교한 79위는 1925년 시복되었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24위는 1968년 시복되었으며, 이들 103명의 복자들은 1984년 5월 6일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서울에서 시성(諡聖)되었다. 이 103위 순교 성인들은 조선교구가 세계의 교회에 남겨 준 중요한 정신적 유산인 것이다. (⇒) 서울대교구

[참고문헌] 朝鮮敎區設定150周年紀念敎會史심포지움報告書, 敎會史硏究, 第4輯, 韓國敎會史硏究所, 1983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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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원] Im Lande der Morgenstille [한] 朝鮮 [관련] 베버

독일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 수도회 총원장 베버(Norbert Weber, 1870∼1956) 신부가 저술한 조선 기행문. 1911년 2월부터 6월까지 조선을 방문한 베버 신부가 서울 · 수원 · 안성 · 공주 · 해주 · 신천 · 평양 등지를 여행하고 귀국한 뒤, 조선 방문 때의 사진 · 그림 · 메모 등을 토대로 저술, 1915년에 간행되었다(1923년 재판). 전체 450여 면(面)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조선의 풍속 · 민속 · 민간신앙 및 베네딕토회의 선교활동을 소개하고 있고, 흑백과 천연색의 전면(全面)사진 52장을 비롯하여 총 290여장의 사진을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의 사료적 가치로는 한국교회사 사진자료의 공백기인 1910년대 교회 모습과 조선문화의 단편을 보여주는 풍부한 사진자료, 정확하고 객관적인 조선교회에 대한 보고 등을 들 수 있는데 이외에 최초로 조선과 조선교회를 서구(西歐)에 소개했다는 데에도 큰 의의가 있다. (⇒) 베버

[참고문헌] 가톨릭시보, 제1151호, 1979. 4. 22 / 교회와 역사, 제60호, 1978. 8. 15, 韓國敎會史硏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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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제사문제 [한] 祖上祭祀問題

1. 문제의 성격 : 조상 제사문제는 인류 구원의 보편적 성사인 가톨릭 교회가 유교문화권의 동양인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어떻게 왜곡됨이 없이 전하며 또 그리스도교 신앙과 유교문화와의 조화를 이룰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 비롯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창립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함에 있어 한편으로는 복음의 순수성과 보편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각 민족의 고유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하여 그리스도교를 그 민족 안에 토착화해야 하는 이중적인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이 선교의 양면성은 시대나 환경에 따라 어느 일면이 강조되기도 하나 근본적으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상호 조화를 통해서만 교회는 본연의 사명을 원만히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천주교가 전래되던 당시 중국과 한국은 생활 전반에 걸쳐 유교사상과 문화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효(孝)의 종교라고 일컬어질 만큼 효를 중시하는 유고에서 부모 생시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제사를 통해 효도를 계속하며, 또한 공자에 대해서도 만세의 스승으로 받들어 존경의 의식과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 선교에 임한 서양 선교사들은 이 이질적인 유교식 조상제사와 공자 공경의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또 그리스도교 신앙과 병행할 수 있느냐는 난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이 문제에 대해 1세기간이나 논쟁을 벌였다. 마침내 로마 교황청에서 이 의례들을 미신적인 행위라고 판단하여 금지 명령을 내리게 되며 이로써 한국, 중국, 일본 등 유교문화권의 극동지방 선교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교황청이 이런 금령을 내린 데는 여러 요인이 있었으나 선교정책에 있어 토착화보다는 신앙의 통일성을 중시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 후 약 200년간 이 금령은 엄격히 준수되어 오다가 20세기에 들어와 시대의 변천과 교황의 선교정책의 변화에 따라 상당히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조상제사문제는 앞으로 극동지방 선교와 토착화를 위해 더욱 연구되고 해결되어야 할 중대한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2. 유교 조상제사의 근본 의미 : 인(仁)을 핵심으로 하는 유교는 효를 통해 인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아 효를 무엇보다 강조하며, 또한 모든 덕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이 효에 의해 그 사람됨을 평가하며 효도하지 않는 자는 자식이라 할 수도 없고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유교의 효의 정신은 가장 귀중한 생명과 지극한 사랑과 은혜를 조건 없이 주신 생명의 근원인 부모와 선조께 감사의 보답을 드리는 데 있다. 보본(報本)과 보은(報恩)의 마음에서 연유한 이 효는 구체적으로 3가지 효도(孝道)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즉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잘 보전하고 후손을 통해 지속시키며, 부모를 지성(至誠)으로 봉양하며, 부모의 뜻을 받들어 도(道)를 닦아 떳떳한 사람이 됨으로써 후세에 이름을 빛내고 부모에게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효도는 부모 생시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계속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이 섬기듯이 함”[事死如事生](中庸 19章)으로 이어가며 특히 제사를 통해 실천된다. 제사는 생명의 근본에 보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돌아가신 부모와 선조를 생시와 같이 공경하여 효를 이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유교 조상제사의 근본 의미는 복을 구하기 위함이나 기타 다른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녀로서 자기 생명의 근본인 부모와 선조에게 보본과 보은의 효를 계속 실천하는 데 있다.

이러한 조상제사는 다음과 같은 예절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죽은 이의 신상(神像)인 신주(神主)에게 인사를 드리는 참신(參神), 향을 피우고 술을 부음으로 혼(魂)과 백(魄)을 불러들여 임재(臨在)하도록 하는 강신(降神), 정성의 재물을 올리는 초헌(初獻)과 아헌(亞獻) 및 종헌(終獻), 사모의 정을 표하면서 제물의 흠향을 간절히 청하는 축(祝), 제물을 흠향하도록 잠시 문을 닫고[闔門] 시간적 여유를 주는 유식(侑食), 차나 숭늉을 드리는 헌다(獻茶), 작별 인사를 올리는 사신(辭神), 제물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죽은 이와 일체(一體)를 이루고 친족 간의 일치와 유대를 도모하는 음복(飮福) 등이다. 이 모든 예절은 죽은 이를 생시와 같이 정성껏 섬기려는 효도의 상징적 표현이요, 또한 “선조에게 제사 지낼 때는 여실히 임재(臨在)해 계신 듯이”(論語 八佾 12) 하는 성경(誠敬)의 실천인 것이다.

한편 유교 제사에 있어 중심이 되는 신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사람의 죽음이란 혼과 백의 갈림인데 백을 떠난 혼이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게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여겨 혼이 의지하도록 마련해 준 의빙처(依憑處)요, 둘째는 인간의 본성적 조건에서 볼 때 돌아간 이를 계속 사모하고 섬기기 위해 볼 수 있는 상(像)이 필요한데, 신주는 바로 즉은 이의 신상인 것이다. 사진도, 초상화도 없던 아주 옛날에는 제사 때 죽은 이와 혈육이 같은 손자 중 하나를 뽑아 신상으로 삼아 제사상에 올려놓고 지냈는데 이를 시(尸) 또는 시동(尸童)이라 한다. 시동에게는 죽은 이의 웃옷을 입혔으니 이는 돌아간 이를 잘 연상하여 극진한 정성을 드리기 위함이다. 후대에 와서는 시동 대신 신주를 세웠으며 또 지자(支子)가 제사를 지낼 때는 지방(紙榜)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신주의 유래나 또 제사 후 지방을 태워 없애는 것은 신주 또는 위패(位牌)는 의빙처보다는 신상의 의미가 더 강하며 더구나 현대에 와서 의빙처의 의미는 거의 상실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3. 중국 의례논쟁(儀禮論爭)과 교황청의 금령 : 중국에서의 소위 의례논쟁이란 그리스도교의 신(神, 라틴말의 Deus)에 해당하는 중국말 용어가 무엇이며 선조와 공자에게 드리는 유교식 제사와 존경의식을 허용할 것이냐는 문제에 대해 약 100년간 벌였던 쟁론을 말한다. 16세기 말엽 중국 선교에 임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와 그의 동료 예수회원들은 주로 지식층을 상대로 전교를 하였고 높은 수준의 유교문화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배치되지 않는 한 받아들이고 조화하려는 문화적 적응주의(適應主義)내지 보유론적(補儒論的) 입장을 취하였다. 그래서 선조와 공자에게 드리는 제사나 존경의식에 대해서도 그 본래 의미를 파악하여 자녀나 제자가 부모와 스승에게 드리는 효도와 존경의 표현이라고 해석, 허용하였다. 그러나 예수회보다 반세기 늦게 중국에 들어온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 방침을 비난하면서 조상제사와 공자 공경의식을 미신적 행위라고 반대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된 데는 선교 방침의 차이도 있었지만 이들이 접촉한 사람들이 예수회와는 달리 주로 시골의 서민층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시골사람들이 거행하던 조상숭배 제사나 공자 공경의식에는 민간신앙의 영향으로 미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의례논쟁의 발단은 1643년 도미니코회원 모랄레스(Morales)가 예수회의 선교 방침에 반대하여 17개항의 문제를 교황청에 제기함으로써 일어난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1645년 모랄레스가 제기한 행위들을 금하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당황한 예수회는 마르티니(Martini)를 로마에 파견하여 자기들의 입장을 설명하였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검토 끝에 1656년 예수회의 선교 방침을 허용하는 훈령을 내렸다. 이어서 1659년 포교성성은 모든 선교사를 위한 훈시를 통해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선교지의 문화 전통을 존중할 것이요, 혹시라도 그것을 바꾸었으면 하는 생각은 하지 말 것이며 비록 비난을 받아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관습에 도전함에 있어서도 말로써가 아니라 자제와 침묵으로써 하고 좋은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시달하였다. 이러한 교황청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도미니코회는 다시 이의를 제기하게 되며, 이에 교황청은 1669년 먼저의 훈령이 나중의 관용훈령에 의해 무효화된 것이 아니라 둘 다 각각 제시된 문제점과 환경에 따라 지켜져야 한다고 신축성 있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런데 파리 외방전교회의 입국은 다시 문제를 재연시켰으니 파리 외방전교회 중국 책임자이며 복건성(福建省)의 주교인 메그로(Charles Maigrot)는 1693년 자기 관할구역에 있는 사제들에게 공자와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를 금하는 명령을 내리고 이 문제에 대한 명백한 결정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이에 오랜 연구와 검토 끝에 교황 글레멘스 11세는 1715년 3월 19일 칙서 를 통해 제기된 의례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즉 그리스도교의 신의 명칭으로는 천주(天主) 이외에 천(天)이나 상제(上帝) 등의 다른 용어를 사용할 수 없으며, 조상숭배 제사와 공장 공경의식을 금하며, 또한 조상의 위패도 금하나 다만 신위(神位)라는 글자 없이 이름만 써서 모시는 것은 허용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1742년 7월 11일 칙서 를 통해 글레멘스 11세의 칙서를 재천명하면서 모든 선교사에게 칙서 준수를 서약하도록 명하고 이에 불복하는 자는 엄한 벌과 함께 중국에서 추방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이 문제에 대한 일체의 논란을 금함으로써 파란만장했던 1세기간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의례문제에 대한 교황청의 판단기준은 그 근본의미가 무엇이냐는 관점에서보다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병행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으며, 금지령을 내린 이유는 당시 중국인의 종교 심성으로 볼 때 이 의식들이 미신과 혼합되어 있어서 미신적 요소를 분리해 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처의 이면에는 교황청의 선교정책에 있어서 토착화보다는 신앙의 순수성과 통일성의 중시, 유럽화된 그리스도교와 보편적 그리스도교 신앙과의 혼동 및 언어의 장벽 등 많은 요인들이 작용했던 것이다.

4. 한국에 있어 제사 금령과 그 영향 : 외국 선교사의 입국 전교 없이 스스로 천주교에 대해 학문으로 연구한 끝에 신앙으로 신봉하고 또 전파한 초기 조선 학자들은 천주교 교리와 유교의 가르침을 조화시키려는 보유론적 입장을 취했으며, 이런 태도는 당시 지식층을 이론적으로 설복, 입교시키는데 주효하였다. 그런데 유교와 천주교의 충돌, 참혹한 피의 참사를 불러일으킨 사건이 발생하니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버린 소위 폐제분주사건(廢祭焚主事件)이다. 물론 이전에도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론적인 논란이 있었으며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과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 일어났으나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었다.

1790년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을 통해 조선에 전해진 북경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명령에 따라 전라도 진산(珍山)에 살던 선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과 그의 외종형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은 조상의 제사를 폐하고 그 신주를 불태워 버렸다. 또한 1791년 5월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權氏)가 별세하자 이들은 정성으로 장례를 치렀으나 위패는 만들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당시 조상숭배를 신앙과 같이 지켜 오던 전통 유교사회에서는 마치 ‘모든 계층의 눈동자를 찌른 격’이었으며 그 충격과 파문은 엄청났던 것이다. 당시의 임금 정조(正祖)는 평소 학자들을 아끼고 천주교도들에 대해 호의적이어서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온 조정이 들끓고 상소가 빗발치듯 할 뿐만 아니라 국시(國是)를 어긴 자들을 그대로 둘 수 없어 이들을 사형에 처하고 천주교도들을 문초했으며 더 나아가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禁敎令)과 함께 전국의 모든 서학서(西學書)를 불태워 버리도록 명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신해박해이다.

조선에 있어 천주교에 대한 100여 년간의 탄압은 사상적 갈등, 당쟁, 경제적 피폐, 민족적 위기의식 등 여러 배경에서 기인했으나, 이 폐제분주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피의 참사를 정당화하는데 충분한 이유를 제공해 주었다. 천주교도들은 부모도 모르는 불효자, 인륜(人倫)을 저버린 짐승의 무리로 낙인이 찍히고, 사회 ·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기존 윤리질서와 사회체제에 대한 부정과 파괴를 자행하는 불온세력 내지 비국민(非國民)으로 인식되었다. 이로써 천주교 선교는 큰 타격을 입었고 신앙의 토착화를 막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나, 다른 측면에서는 지식층의 입교를 극난케 함으로써 천주교가 점차 서민층으로 확산되어 서민층이 주류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 조선에서 이렇듯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폐제분주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윤지충과 정하상(丁夏祥)은 공술(供述)과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다음과 같이 상세히 진술하고 있다. 첫째, 물질적 음식물은 혼의 양식이 될 수 없고, 잠자는 사람에게 음식물을 드리지 않듯이 영원히 잠든 이에게 제물을 차려 봉헌하는 것은 허세요 가식이며, 둘째 신주는 목수가 만든 나무 조각이므로 나의 골육이나 생명과 아무 관계가 없어 부모라 부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어떤 물질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그들의 독자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의 설명을 그대로 인용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런 이유들은 당시 조상숭배가 국교와도 같이 준행되던 유교사회에서는 상상치도 못한 일이요, 이들 역시 천주교회에서 금하는 까닭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상제사에 대한 윤유일과 구베아 주교의 대하는 당시 유학자들과 천주교회간의 인식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유일(有一)이 ‘제사를 드리는 것은 돌아간 이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기 위함[事死如事生]인데, 천주교를 믿으면서는 제사를 지낼 수 없다면 이는 매우 곤란한 일이온데 무슨 방도가 없겠습니까?’ 하고 묻자, 주교가 대답하기를 ‘천주교는 반드시 성실을 가장 중요시하는데 사람이 죽은 후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크게 성실한 도리[誠實之道]에 어긋난다’고 하였다”(≪邪學懲義≫ 移還送秩 權儉供草).

5. 시대 변천과 허용 조치 : 약 200연간 엄격한 규제 하에 금지되었던 조상제사와 공자 존경의식이 20세기 전반서부터 해빙기를 맞게 되었다. 교황청이 이 문제에 대해 정책 변화를 하도록 작용한 요인으로는, ① 역사 연구의 발전으로 인한 토착화에 대한 재인식, ② 엄격한 단죄 신학에 반대하여 비 그리스도교 민족 안에 내재해 있는 영적 요소들과 그리스도교 은총을 조화시키려는 신학사조의 대두, ③ 동양에서 민족주의의 등장에 세계 정치무대에서 이들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동방 민족들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서구인들의 보다 깊은 이해와 통찰, ④ 서양 문물과 사상의 영향으로 동양인의 종교 심성에서 미신적 요소의 감소, ⑤ 국법에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고 국가에서 명하는 공경의식은 그 본래 기원이나 의미가 어떠하든지 간에 이제 와서는 단지 사회적 국민의식에 불과하다는 정부 당국의 발표 등을 들 수 있다.

20세기에 와서 이 문제에 대한 첫 도전은 1932년 일본의 팽창주의에 의해 세워진 만주국에서 강력하게 일어났다. 이 신생 만주국은 국민의 단결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공자숭배를 국민에게 의무화했으며 이로 인해 천주교도들은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당황한 교회 당국은 공자숭배의 성격을 정부에 질의했으며 만주정부는 이 의식이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사회적 국민적 예식일 따름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교황 비오 11세는 1935년 공자 존경의식을 허용하였다. 또한 1년 후인 1936년에는 일본의 신사참배(神社參拜)를 허용하면서 지금까지 금지되었던 혼인, 장례, 그 밖의 사회 풍습 등에 대해서도 폭 넓은 허용조치를 취함으로써 적응주의원칙이 교회의 확고한 선교정책임을 드러냈다. 더 나아가 비오 12세는 1939년 12월 8일 <중국 예식에 관한 훈령>을 통해 공자 존경의식을 행할 수 있다고 전면적으로 허용했으며, 선조 공경의식에 있어서는 “시체나 죽은 이의 상 또는 단순히 이름이 기록된 위패 앞에 머리를 숙임과 기타 민간적 예모를 표시함이 가하고 타당한 일이다”라고 함으로써 비록 전면적인 허용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관용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취한 이유는 시대 변천에 따라 풍속도 변하고 사람들의 정신도 변해서 과거에는 미신적이던 예식이 현재에 와서는 다만 존경과 효성을 표하기 위한 민간적 예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훈령에 준하여 한국 주교단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관한 보다 상세한 지침을 정하였는데 허용 사항으로는, 시체나 무덤, 죽은 이의 사진이나 이름만 적힌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며 음식을 진설하는 행위 등이며, 금지 예식은 제사에서 축과 합문(闔門)[혼령이 제물을 흠향하도록 잠시 문을 닫는 예식], 장례에 있어 고복(皐復)[죽은 이의 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예식], 사자(使者)밥[죽은 이의 혼을 고이 모시고 저승으로 가라는 뜻으로 밥과 신발을 상에 차려 놓는 것] 및 반함(飯含)[죽은 이의 입에 쌀, 조가비, 구슬 등을 넣는 예식] 등이다. 그리고 위패는 신위라는 글자 없이 다만 이름만 써서 모시는 경우 허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완화조치에도 불구하고 이 조상제사문제는 아직도 그리스도교 선교에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극동지방의 복음화를 위해 깊이 연구되고 재고되어야 할 과제이다. 또한 앞으로의 선교와 토착화를 위해 거울로 삼아야 할 역사적 교훈인 것이다. (崔基福)

[참고문헌] 兪棨, 家禮源流 / 李宜朝, 家禮增解 / 柳長源, 常變通攷 / 方豪, 中西交通史 卷五, 臺北 1977 / K.S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in China, Taipei 1973 / G.H. Dunne, Generation of Giants, Notre Dame, Ind. 1962 / D. Fernandez Navarrete, The Travels and Controversies of Friar Domingo Navarrete 1618∼1686, ed. J.S. Commins, Cambridge, Eng, 1962 / Columba Cary-Elwes, China and the Cross, New York 1957 / A.H. Rowbotham, Missionary and Mandarin, Barkeley and Los Angeles 1942 / Collectanea Constitutionum, Decretorum, Indultorum, ac Instructionum Sanctae Sedis, pp.776∼810, Hing Kong 1898 / J. Metzler(ed.), Sacrae Congregationis de Propaganda Fide Memoria Rerum, vol.2-3 pp.786∼788, Freiburg 1976 / Acta Apostolicae Sedis, vol.28(Roma 1936), pp.406∼409; vol.32(1940), pp.24∼26 / 崔基福, 朝鮮朝에 있어서 天主敎의 廢祭毁主와 儒敎祭祀의 根本意味, 崔奭祐神父華甲紀念 韓國敎會史論叢, 서울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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