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서(1810∼1868). 순교자. 일명 영준(英俊), 세례명은 요한. 경기도 용인(龍仁) 출생.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서울 애고개[지금의 阿峴洞]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한 7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형되고 박해가 점점 가열되자 1866년 6월말 장치선(張致善), 박성집(朴聖集) 등 10명의 교우들과 함께 조선의 박해상황을 프랑스 정부에 알리려는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를 중국으로 탈출시켜 주었고, 이어 이해 9월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자 리델 신부를 태우고 강화도에 정박중인 프랑스 군함에 승선, 리델 신부에게 조선에 남아 있는 칼레(Calais, 姜) 신부, 페롱(Feron, 權) 신부의 소식과 박해상황을 전하였다. 이로 인해 1868년 5월(음) 아내와 함께 체포되어 아내 주 데레사는 옥사하고 자신은 2명의 교우와 함께 강화도에서 처형당해 순교하였다.
최인길 [한] 崔仁吉
최인길(1764∼1795). 순교자. 세례명 마티아. 역관(譯官)의 아들. 조선 교회 초창기 김범우(金範禹) 집에서 권일신, 정약용, 이벽 등과 함께 공동집회를 가졌을 때 적발[乙巳秋曹摘發事件], 김범우와 함께 체포되어 김범우는 유배되고, 그는 효유 석방되었다. 이벽에게서 세례를 받은 그는 신부영입을 위해 윤유일(尹有一), 최창현(崔昌顯), 지황(池璜) 등과 힘을 합쳐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1794년 주문모(周文謀) 신부가 입국하자 그는 주 신부의 거처할 곳을 마련하였고, 1795년에 박해가 심해져 주 신부 체포에 혈안이 되자 주 신부를 대신하여 자기가 교회의 두목이라고 자칭하여 체포됨으로써 그 뒤 얼마 동안 주 신부를 피신케 할 수 있었다. 지황, 윤유일과 함께 1795년 6월 28일 31세로 옥중에서 처형되었고 그의 시체는 강물에 내던져졌다.
최익현 [한] 崔益鉉
최익현(1833∼1906). 조선후기의 문신이며 대(大) 유학자. 의병장.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 경기도 포천(抱川)에서 최대(崔岱)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했고, 1855년(哲宗 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1868년 장령(掌令)으로서 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 이로 인해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으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의 직곡(直谷)에서 5년간 은거하였다. 18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기용되어 다시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민비(閔妃)일파에 의해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승진되자 더욱 강력하게 대원군을 탄핵, 결국 대원군을 실각시켰으나 자신은 제주도록 유배되었다. 1875년 풀려나와 이듬해 일본과의 통상이 논의되자 5개조의 배일척사소(排日斥邪疏)를 올렸다가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어 1879년 풀려났고, 그 후 1895년 갑오개혁 때 단발령을 강력히 반대하여 다시 투옥되기고 하였다. 1898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었고, 이후 중추원의관, 의정부찬정, 경기관찰사 등의 발령을 모두 사퇴하고 배일 · 매국역신(賣國逆臣)의 토멸을 주장하여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임병찬(林秉瓚) · 임낙(林樂) 등 80여명의 제자와 함께 전라도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을 규탄하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후 4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순창(淳昌)에서 일본군 · 관군 등과 교전하였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 유배중 일인(日人)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유소(遺疏)를 임병찬에게 구술(口述), 이를 올리게 한 후 굶어 죽었다. 최익현은 조선말기의 대유학자로서 스승 이항로의 학풍을 이어받아 척사론(斥邪論)에 있어서도 강력한 논조를 띠고 있는데 특히 일본에 대한 배척은 천주교에 대한 배척보다 더욱 강력한 것으로 그의 반평생 배일 · 항일으로 일관되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면암집≫(勉庵集)이 있다.
최영이 [한] 崔榮伊
최영이(1818∼1840).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바르바라. 성인 조신철(趙信喆)의 처. 성인 최창흡(崔昌洽)과 성녀 손소벽(孫小碧) 부부의 딸.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서 양친의 모범에 좇아 입교,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20세 때 상처한 조신철과 결혼, 아들 하나를 두었고 성직자영입운동을 전개하던 남편을 도와 헌신적으로 내조하였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남편과 함께 피신했으나 6월에 친정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친정 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체포될 때 어린 젖먹이 때문에 배교할까 염려되어 친척에게 맡기고 포청(捕廳)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의 신문 중 남편이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서적과 성물 때문에 2차례의 주뢰와 태장 260도를 맞는 혹형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고 형조에서도 3차의 형문을 이겨 내고 사향을 선고받았다. 1840년 2월 1일 당고개(堂峴)에서 2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