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시대 대사제(大司祭)가 신탁을 할 때 사용하던 도구. 구약성서에 나오는 히브리말이며 예로니모(St. Hieronimus)에 의하면 우림은 교리(doctrina), 논증(demonstratio), 표시(ostentio) 등을 의미하고, 둠밈은 진리(veritas), 완성(perfectio), 성덕(sanctitas) 등을 뜻한다. 성서에는 우림과 둠밈을 함께 사용한 예가 있고(1사무 14:41) 우림만 사용한 경우도 있다(민수 27:21, 1사무 28:6). 작은 돌이나 나무 조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 우림과 둠밈은 에봇(ephod)과 연결되어 있으며(1사무 23:6-9, 30:7, 14:3-17), 에봇에게 물어 우림이나 둠밈 가운데 하나를 선택으로서 결정하고자 하는 사항의 긍정이나 부정의 대답을 알아내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일종의 점술과 관련되는 것이다. 제의의 가슴받이에 우림과 둠밈을 넣었던 사실은 아마도 이보다 더 오랜 전통을 보존하고 있음을 뜻한다(출애 28:30, 레위 8:8). 다윗시대 이후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바빌론 이후 시대에는 자취를 감추었다.
우르시스 [원] Ursis, Sabbathinus de
Ursis, Sabbathinus de(1575∼1620).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신부. 중국명은 웅삼발(熊三拔), 자(字)는 유강(有綱). 1606년 중국에 입국, 북경(北京)에 들어가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신부에게 중국어와 한문을 배운 뒤 명 황실에서 천문역산서(天文歷算書)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0년 리치 신부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판토하(I. de Pantoja, -迪我)와 함께 편찬 책임자가 되었다. 1616년 남경(南京)에서 박해가 일어나 북경에까지 그 여파가 미치자 마카오로 피신 1620년 마카오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 ≪태서수법≫(泰西水法 6권, 北京 1612), ≪간평의 설≫(簡平儀說, 北京 1611), ≪표도설≫(表度說) 등이 있다.
우르술라회 [한] ~會 [영] Ursulines
1525년 메리치(St. Angela Merici)가 이탈리아의 브레스치아(Brescia)에서 창립한 수도회로, 최초의 교육 수녀회다. 1544년 교황 바오로 3세는 각자 자기의 집에 살면서 교육에 종사하는 처녀들의 수도회로 이 회를 공인하였고, 1572년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보로메오(St. Charles Borromeo)의 요청에 따라 우르술라회원들이 공동생활을 하고 단식서원을 할 수 있게끔 하였다, 1612년 이후 파리의 우르술라회는 성식서원을 하는 수도회로 바뀌었고, 성 아우구스티노 회칙을 수정한 생활규칙을 회칙으로 채택하였다. 1900년 전세계 우르술라회가 로마에 모여 대회를 개최하고 다양한 우르술라회치 통일을 시도하였다. 이후 많은 수도회들이 로마수족(修族)으로 통합되었다. 로마수족은 단식서원을 한다. 로마수족 이외에도 25개의 우르술라회가 있다. 이들 중에는 성식서원을 하는 수도회들도 많다.
우르비 엣 오르비 [라] urbi et orbi
‘도시와 전세계에’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며, 이후 로마에 운집한 청중들과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보이지 않는 청중들에게 교황이 베푸는 장엄한 강복을 뜻한다. 이 교황 강복은 성년(聖年) 동안에, 그리고 교황 착좌식 기타 중요한 기회에 종종 베풀어진다. 이 강복은 한 때 50년이 넘도록 베풀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교황 비오 11세가 1922년에 이를 부활시켰다.
우르바노 [라] Urbanus
Urbanus 2세(1042?∼1099). 교황(재위 : 1088∼1099). 복자. 원명 Odo 또는 Udo. 프랑스의 샤티용 쉬르 마른(Chatillon-sur-Marne) 태생. 처음에 클뤼니 수도원에서 수업하고, 선배인 힐데브란트(후의 성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천거되고, 이어서 클뤼니파 추기경들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힐데브란트의 숙적인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투쟁에서는 독일인 성직자 그룹을 만들어 반(反)황제열을 일게 하였다. 그리하여 하인리히가 성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항해서 옹립한 대립교황 글레멘스 3세를 로마에서 추방(1093년), 이때부터 그의 세력은 급격히 증대하였다. 회교도인 터키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리스도 교도의 성지순례를 불가능케 하고, 콘스탄티노플까지 육박하자 동로마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로마 교황에게 구원을 요청, 우르바노 2세는 피아첸사에서 교회회의를 개최하고(1095년), 성지 수복을 위한 성전(聖戰)을 일으켜야 함을 강조하고, 동방으로부터의 사절에게도 원조를 약속하였다. 한편 아미앙의 수도사 피에르(Pierre)를 시켜 각지를 유세케 하고, 동년 11월의 클레르몽 회의에서는 교황이 직접 수천 명 대중을 향해 종군을 간청하는 대연설을 통해 출정자에게는 전대사와 그 밖의 보상을 줄 것을 약속하였다. 마침내 제1회 십자군이 결성되고(1096년) 피에르가 거느리는 프랑스군은 육로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다. 복자 우르바노 2세는 자신의 대리자로서 주교 아데마르(Adhemar)를 원정군에 종군케 하였다.
Urbanus 8세(1568∼1644). 교황(재위 : 1623∼1644). 원명 Maffe Barberini. 피렌체 태생. 젊어서 문필가로 이름을 떨쳤다. 추기경(1606년), 볼로냐의 교황사절(1617년), 이어서 교황에 선출되었다. 교황 취임 후 교회의 개혁을 추진하고, 많은 성자(聖子)를 서임했으며, 탁발(托鉢)수도회와 라자리스트회(Lazaristae)를 인가하는 등 종교생활 부흥에 힘썼다. 또한 우르바노 선교대학을 설립하여(1627년) 전도정신을 진작케 하였다, 이단 추방에도 열심이어서 천문학자 갈릴레이를 재판하고(1633년), 얀센(C.O. Jansen)을 이단으로 선고하는 동시에 그의 저서 ≪아우구스티누스≫를 금서(禁書)로 정하였다(1642년). 30년 전쟁 때는 합스부르크가(家)에 반대하는 리실뢰(A.J. Richelieu)의 정책을 기용해서 가톨릭 연맹의 대(對)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감퇴시켰기 때문에 민중의 동정을 상실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