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본당 [한] 舒川本堂

충남 서천읍에 위치한 대전교구 관할의 이 본당은 1934년 금사리(金寺里)본당 산하 서천 공소로서 발족하여 2년 후 서천본당으로 승격, 초대 조인원(趙仁元, 빈첸시오) 신부가 부임하였다. 2대 김영식(金永植, 베드로) 신부 때인 1942년 역시 금사리본당 산하의 장항(長項)공소가 본당으로 승격 독립할 때, 서천본당은 뜻밖에도 장항본당 산하의 서천공소로 격하, 이후 25년간 공소로 머무르는 불운을 겪었다. 그 동안, 1955년 공소 강당 건립(현 성당으로 사용), 이듬해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이 강당을 축성하였다. 마침내 1967년 12월 장항본당에서 분리, 서천본당으로 다시 승격되면서 3대 조병기(趙炳起, 바오로) 신부가 부임, 5대 윤인식(尹仁植, 바오로) 신부 때인 1979년 수녀원 건물 준공, 현 김기(金基, 바오로) 신부의 부임 이듬해인 1981년 사제관이 준공되었다. 이 본당의 주보는 예수성심, 신자수는 1,451명(1983년 현재), 산하 공소수는 18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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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제 [한] 徐昌濟

徐昌濟(1889-1971). 국어학자. 교리교사. 세례명은 토마스. 1899년 7월 6일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상우남면 상장동에서 태어났다. 18세까지 유학자 이죽계(李竹溪)의 문하에서 한학(漢學)을 배웠고, 캐나다 북장로교에서 설립한 함흥 영생중학교(永生中學校)를 1920년 졸업하고 보신중학교(普信中學校)와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 뒤 성직을 희망, 전도사를 거쳐 1932년 목사 안수(按手)를 받고 기독교 복음교회 목사로 재직하는 한편, 1945년 청진(淸津) 관북대학(關北大學), 1947년 한양대학(漢陽大學)에서 국어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개신교 교리에 대해 회의를 느끼면서 1949년 목사직을 사퇴한 후 6.25동란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 그곳에서 ≪교부들의 신앙≫ 을 감명 깊게 읽고 그 책의 역자(譯者) 장면(張勉) 박사의 권면으로 개종, 1952년 8월 15일 부산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뒤 산골 벽지와 나환자촌을 순회하며 전교하는 한편 서울대학교와 가톨릭대학에서 국어를 강의하였으며 1960년대에는 주교회의 산하 가톨릭공용어위원회의 위원으로 교회용어의 개정, 토착화에 공헌하였다. 1971년 6월 26일 지병인 동맥경화증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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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리본당 [한] 西井里本堂

평택 본당 관할의 공소로 출발한 서정리는 성녀 소화 데레사를 주보로 모시고, 이 지방의 중심에 위치하여 날로 교세가 발전함에 따라 1932년 5월, 몰리마르(Josephus Molimard, 牟) 신부가 평택본당 신부로 있으면서 이곳에 본당을 세우기 위하여 경기도 평택군 송탄면(松炭面) 서정리에 대지 200평을 구입, 근방 20여 공소의 성금을 모아, 1934년 10월에 연와조 57평의 성당과 사제관을 세웠다. 몰리마르 신부는 평택에 주재하면서 주일마다 이곳을 찾아와 미사를 드리다가 1938년 10월에는 프랑스인 교우들의 지원으로 고딕식 100평의 현 성당과 65평의 사제관을 짓고, 그 자신이 서정리본당의 신부로 옮겨와서 1947년 8월까지 사목활동에 열중하였다.

그 뒤 클리어리(Patrick Cleary, 吉) 신부가 2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는데 6.25 동란으로 귀국하니, 한때 사제 없는 본당이 되기도 하였다. 1952년 7월 유수철(柳秀徹, 도미니코) 신부가 3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야간학교를 개설하였다. 1953년 5월 유 신부는 효명중학교(曉明中學校)를 설립하고 1955년 미839부대의 지원을 얻어 285평의 교사를 증축, 그 뒤 고등학교까지 병설하여 실업계 공업학교를 거쳐 종합학교로 발전시켰다. 1961년 4대 강원유(康元裕, 요한) 신부를 거쳐, 윤병희(尹炳熙, 바오로) 신부가 5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자 1962년 12월 ‘레지오 마리에 샛별 꾸리아’를 창단하여 지도신부를 겸하였다. 1963년 김덕제(金德濟, 치릴로) 신부가 6대 신부로 재임 중 수원교구에 편입되었다. 이 본당에는 현재 2,019명의 신자가 있고, 공소는 8개소이며, 배문한(裵文漢, 도미니코) 신부가 13대의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그 동안 이 본당을 맡았던 주임신부는 1968년 유진선(柳眞善, 레오) 신부, 1970년 장금구(莊金龜, 크리소스토모) 신부, 1971년 강주희(姜周熙, 방그라시오) 신부, 1975년 조원규(趙源奎, 야고보) 신부, 1977년 한종훈(韓鍾勳, 스테파노) 신부, 1981년 최경환(崔敬煥, 마지아) 신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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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도 [한] 徐廷道

徐廷道(1866-1964). 대구교구 소속 신부. 교회음악가. 세례명 베르나르도. 경상북도 대구(大邱)에서 태어났다. 1911년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수업을 닦던 중 1914년 대구 성 유스티노신학교 창설과 함께 성 유스티노신학교에 편입,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한편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와 페셸(Peschel, 白鶴老) 신부에게 오르간과 음악이론을 배웠다. 1923년 5월 26일 사제서품을 받고 1년간 부산 범일동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한 후, 안동본당 주임(1924-1937년), 고성본당 주임(1937-1942년) 대구교구 부주교겸 계산동본당 주임(1942-1944년), 문산본당 주임(1944-1948년), 함양본당 주임(1948-1950년), 화원본당 주임(1950-1954년) 등을 거쳐 1954년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한 경남 감목대리구가 설정되자 부감독에 피임되었다. 그러나 1954년 12월 대구교구장 최덕홍(崔德弘, 요한) 주교가 사망, 후임 교구장에 경남 감목대리구장이던 서정길(徐正吉, 요한) 신부가 임명되어 이듬해 주교로 성성되자 다시 대구교구 부주교에 피임되었고, 이어 상서국장에 피임되었다. 그 후 남산동본당 주임(1960-1962년)을 거쳐 1962년부터 경북 경산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던 중 1964년 11월 지병인 위궤양으로 경산본당 소속 용성공소에서 휴양하다가 11월 23일 선종하였다. 유해는 대구교구 주교관 내의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서정도 신부는 바쁜 사목활동 중에서도 많은 성가를 작곡, 1924년 간행된 ≪조선어성가집≫에 그가 작곡한 <무변해상새 별>, <오주예수 천주심을>, <너에게 하례하오니> 등이 실려 있고, 이외에 <교우로다>, <죄인의 바람이신>, <오 만나여> 등의 성가를 작곡하였는데 작곡활동 시기가 1917년을 전후한 시기라는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한국인에 의한 서양음악 작곡의 효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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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길 [한] 徐正吉

徐正吉(1911~1987). 제7대 대구(大邱) 대교구장. 대주교. 세례명 요한. 경남 울산군 두서면 미호동에서 출생. 1932년 대구 성 유스티노신학교에 입학, 중등과 · 철학과를 거쳐 1938년 신학과를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품 후 부산 청학동본당 주임신부, 1943년 부산 범일동본당 주임신부, 1945년 대구교구 경리부장, 1948년 대구 계산동본당 주임신부, 1954년 경남(慶南) 감목대리 겸 부산 범일동본당 주임신부 등을 역임했고, 1955년 제7대 대구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해 9월 15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1962년 3월 한국 교회의 교계체제가 확립됨과 동시에 대구교구가 대(大)교구로 승격되자 이해 7월 5일 대주교로 서임되었고 이어 1965년까지 제2차 바티칸공의회 1·2·3·4차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1972년 이문희(李文熙) 신부를 보좌주교 겸 총대리로 임명, 대구 대교구의 행정을 맡게 하였다.

1955년 대구교구장으로 임명된 이후 현재까지 많은 수도회와 수녀회를 대구 대교구로 초치, 전교와 교육을 전담시켰고 또 부산(釜山)교구, 안동(安東)교구 등을 분할, 독립시키는 등 대구 대교구와 한국 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 : 서정길 대주교는 1987년 4월 7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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