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윤진 [한] 文∼

문윤진(?-?). 순교자. 세례명 미상(未詳). 천민 출신으로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피신처중 한 집의 여종이었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산골로 피신했으나 이 해 5월(음) 체포되어 공주(公州)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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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부흥기교황 [한] 文藝復興期敎皇

니콜라오 5세에서 레오 10세까지의 교황 문예부흥기에 교황좌에 올랐던 이 시대의 교황에 대한 비난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 교황 가운데 어떤 이는 가톨릭 교회의 최고지도자로서 의무를 옳게 이행하지 못했는가 하면 사생활에 수치스러운 잘못도 있었다. 이 시대의 교황사(敎皇史)를 훑어볼 때, 당시 세속화로 치달은 사회상이 교회의 영도자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쳤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신앙 자체에 대한 죄를 저지른 교황은 없었고, 과학이나 예술의 면에서는 오히려 공헌이 큰 교황들이 많았다. 또 당시의 교황들은 종교면에서 중세의 사상계를 보편적인 근대생활로 끌어 올리는데 기여한 바도 컸다.

이 시대의 첫 교황인 니콜라오 5세(재위 : 1447-1455)는 과학 · 예술의 발전을 위하여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를 계승한 갈리스토 3세(재위 : 1455-1458)는 인격면에서 흠 잡을 데 없는 인물로 법률의 대가이기도 하였으나 신흥예술과 문학에 동조하지 않았으므로 인문주의자(人文主義者)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비오 2세(재위 : 1458-1464)는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요, 정치가로서 유럽을 통해 손색없는 교황으로 평가받았다. 6년간의 재위기간을 통하여 그는 모든 그리스도교 군주와 민중의 호응을 얻어, 터키인의 지배로부터 유럽을 해방시키기 위한 십자군의 동원에 온 정열을 불태웠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바오로 2세(재위 : 1464-1471)는 인문주의에 적극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선황(先皇)들이 채용한 교황청의 인문주의자들을 해고하고, 교황학사원까지 폐지하여 교양 없는 교황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식스토 4세(재위 : 1471-1484)는 학식과 모범적인 덕행(德行)으로, 프란치스코회의 총회장을 지낸 인물이었으나 불행히도 야심적인 친척들 때문에 문벌주의(門閥主義)에 휘말려, 교황의 주요 임무인 교회 내부의 개혁을 게을리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인노첸시오 8세(재위 : 1484-1492)는 젊어서 사생아를 둘이나 낳게 한 인물인데, 카란드리 추기경에게 잘 보인 인연으로 1472년에 사제가 되고, 이듬해에는 추기경이자 로마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로베레 가문에 충성을 바친 댓가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의 손녀 결혼식을 교황궁전에서 거행한 것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실태였다. 그와 같은 풍토였으므로 추기경들의 세속적 생활과 낭비 또한 극심한 상태였다. 인노첸시오 8세는 그의 형제의 사생아인 13세 소년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그가 후일 교황이 된 레오 10세이다.

알렉산데르 6세(재위: 1492-1503)는 스페인 부농의 아들이며, 갈리토스 3세의 조카로 교황으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부유한 그는 일찍부터 외도에 탐닉하여 바노사 · 데 · 카타데이와의 불륜관계로 네 자녀를 둔 인물인데, 독성적(瀆聖的)인 방법으로 책략에 의해 교황이 되었다. 그런 선거가 치러질 수 있었다는 것은 교회 최고위층의 부패가 당시 어느 정도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비오 3세는 자애심이 많고 재능도 훌륭하였으며 과학, 예술을 사랑하는 교황이었다. 그러나 몸이 약하여 교황직에는 26일간을 있었을 뿐이다. 그를 이은 율리오 2세(재위 : 1503-1513)는 식스토 4세의 조카인데 의지력이 강한 분으로. 문예부흥의 진정한 지도자요 참다운 교황이었다. 거인인 그는 사제라기보다 황제로서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교황의 속권(俗權)을 강화하고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전임 교황들이 황폐하게 만들어 놓았던 교황령(敎皇領)을 잘 다스려 옛날의 위신을 되찾았다. 그래서 사가(史家)들은 그를 “교황직의 구제자”요 “16세기의 대왕”이라고 쓰고 있다. 문예부흥기의 마지막 교황은 레오 10세(재위 : 1513-1521)이다. 그는 당시의 가장 고귀한 메디치 가문의 아들로, 교양이 풍부하고 낙천적이며 사치스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열성적인 신앙으로 의무를 잘 수행하였으며, 인정 많고 친절하여 예술, 문화도 사랑하였다.

[참고문헌] Pastor IV, F. X, Seppelt, Papstgeschichte bis zur Franzosischen Revolution II,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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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부흥 [한] 文藝復興 [관련] 르네상스

⇒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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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인 [한] 文榮仁

문영인(?∼1801).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 때의 동정 순교자. 세례명은 비비안나. 중인 출신으로 6세 때에 궁중에 들어가 15세에 궁녀가 되었다. 총명함과 빼어난 미모로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졸도하여 중병을 앓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본집에 돌아온 문영인은 여회장인 강완숙(姜完淑)과 독실한 교우였던 어머니의 감화로 주문모(周文謨) 신부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자 그 다음 날 신기하게도 병이 완쾌되었다. 문영인에게 미련을 가진 궁중에서는 의사를 보내어 문영인을 치료코자 했으나 궁중에서 보낸 사람이 집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다 나았던 병이 다시 도져 반신불수상태에 빠짐으로써, 하는 수 없이 궁중에서 제적되는 몸이 됐다. 이렇게 해서 자유의 몸이 되자 문영인은 더욱 신앙을 굳게 지켜 주 신부를 도와서 교우간의 연락을 취하고, 박해 때에는 교우들을 숨기는 등 헌신적인 봉사를 하는 한편 전교에도 힘써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던 중 포졸들의 가택수색으로 신자임이 드러나 체포되어 강완숙 등 4명과 같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옥중에서도 밤낮으로 심령의 수업에 힘쓰면서 모진 형벌과 감언이설을 이겨내 끝내 배교치 않으므로 1801년 5월 22일(음) 형장으로 끌려나가 순교하였다. 형장에서 모여드는 구경꾼을 쫓으려는 군졸에게 문영인은 “가만 놔두시오, 짐승을 죽일 때도 구경하거늘, 하물며 사람 죽이는 걸 왜 못 보게 하느뇨?”라 말하면서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목을 내미니, 잘린 목에서 젖같은 횐 피가 흘러 형리들이 대경실색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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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본당 [한] 文山本堂

마산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예수성심. 소재지는 경남 진양군 문산면 소문리. 1867년경 함안(咸安)에 살던 신자 구한선(다태오)이 문산으로 이사하여 처음으로 전교, 소문리에 공소가 설립, 처음에는 대구(大邱)의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후에는 영도(影島)에 주재하던 조조(Moyse Jozeau, 趙) 신부가 전교하였고, 1901년 마산(馬山) 본당이 설립되고부터는 타케(J. Taquet, 嚴) 신부, 무세(G. Mousset, 文) 신부가 전교하여 신자가 많이 늘게 되었다.

1905년 문산 본당으로 승격, 초대 주임으로 줄리아(Julien, 權) 신부가 부임, 1907년 소문리에 대지 2,400평과 기와집 10여 동을 매입하여 본당의 기틀을 굳히고 1909년 부산 초량(草梁) 본당으로 전임, 2대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김신부는 하동(河東), 순천(順天), 남해(南海), 사천(泗川), 고성(固城) 등지를 돌아다니며 공소를 설립, 교세를 크게 신장시킨 후 1916년 황해도 감목대리직을 받고 황해도 장연(長淵) 본당으로 전임하였다. 김명제 신부는 재임 중 성당을 신축하고 지방 계몽사업으로 배명 학교(培命學校)를 설립하는 업적도 남겼다. 3대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는 1929년까지 14년간 재임하면서 전남 순천 본당, 경남 거제(巨濟) 본당, 진주(晋州) 본당, 통영(統營) 본당 등을 분리 독립시켰다.

5대 김영제(金永濟, 요한) 신부는 1931년부터 1944넌까지 재직하면서 특히 현대식의 현 성당 · 사제관 · 성모당 · 수녀원을 건축하였다. 현재 주임사제는 23대 허성학(許盛鶴, 아브라함 1982~ ) 신부, 신자수는 1,132명(1983년말 현재), 공소는 3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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