뮈텔일기 [한] ∼日記 [프] Journal de Mgr. Mutel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교구장에 임명된 날(1890. 8. 4.)부터 사망하기 직전인 1932년 12월 31일까지(1933. 1. 23. 사망) 거의 매일 써놓은 일기. 총 6,000여면의 분량에 뮈텔 주교 개인의 사정과 교구장 재임기간 동안 일어났던 교회 내외의 주요한 사건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뮈텔 주교는 40여년간 한국 천주교회를 다스렸고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가 장족의 발전을 했다는 점, 그리고 한국사에 있어서 이 시기에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뮈텔일기>는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뮈텔일기>에 기록된 주요 사건들로는 우선 용산신학교 · 명동 대성당 · 약현 성당 등의 건축, 본당증설, 계성학교 · 남대문상업학교(東星中高等學校) · 가명학교의 설립, 양로원 · 보육원 등의 사회사업, 경향신문 · 경향잡지 등의 언론 · 출판사업, 시복조사와 시복식, 대구 · 원산 · 평양 · 연길 교구의 증설 등 주요 교회사건들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는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 모습을 엿볼 수 있고, 또 3.1 운동 당시 신학생들의 시위 참가와 이로 인한 신학교의 잠정적 폐교에 대한 기록들은 일제하 천주교회의 항일운동을 재조명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로서 평가된다. 그뿐 아니라 뮈텔 주교가 조선의 정세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갖고 체험한 동학혁명(東學革命) · 청일전쟁(淸日戰爭) · 민비시해사건(閔妃弑害事件) · 3.1 운동 등에 대한 기록들과 이 사건들을 뮈텔 주교 나름대로 분석·평가한 기록들은 한국사의 보충을 위한 자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뮈텔일기>는 뮈텔 주교 사후(死後) 명동 주교관에 보관되어 오다가 1958년 대전교구가 설정되면서 대부분의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대전교구로 이적되고 서울교구에 남은 일부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구(舊) 용산신학교 자리로 거처를 옮길 때 그곳으로 옮겨졌고, 그 뒤 다시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옮겨져 지금은 동(同)회의 고문서고(古文書庫)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일기는 현재 우리나라에 공개되어 사미스트회(Samist) 소속으로 전주(全州) 교구에서 사목중인 디디에 세르스트반스(Didier t’Serstevens, 한국명 池正煥) 신부가 난해한 필체를 판독하여 정서(正書)하고 있으며 이를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번역 중이다.

[참고문헌] 崔奭祐, 뮈텔주교의 일기(교회와 역사 제103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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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텔문서 [한] ∼文書 [프] Documents de Mgr. Mutel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수집해 놓은 일련의 문서들. 총 1만 3,451건에 달하는 서한(書翰) · 공문(公文) · 신문기사(新聞記事) · 전보(電報) · 유인물 · 명함(名啣) · 안내장 · 외교문서(外交文書)들로서 1871년에서 1925년까지의 교회사 및 한국사와 관련된 내용의 문서들이다. 이 문서들은 수집자인 뮈텔 주교에 의해 교회문서와 기타문서로 분류되어 보관되었고, 뮈텔 주교 사후(死後) 명동대성당 지하 고문서고(古文書庫)로 옮겨져 다른 교회자료들과 함께 보관되어 오다가 1965년 명동 대성당에 보관된 모든 교회자료들과 함께 한국교회사연구소(韓國敎會史硏究所)에 이장(移藏)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최석우(崔奭祐) 신부와 사학자 이원순(李元淳) 교수가 명동에서 온 자료들을 정리 분류하면서 이 문서들을 발견하여 이를 ‘뮈텔문서’(Documents de Mgr. Mutel)라고 명명(命名)함으로써 오늘날까지 ‘뮈텔문서’로 불리고 있다.

<뮈텔문서>는 사용된 언어에 따라 동양어(東洋語) 문서와 서양어(西洋語) 문서로 구분된다. 동양어 문서는 한글문서 390건, 국한문(國漢文) 혼용문서 126건, 한문(漢文)문서 716건, 일어(日語)문서 55건, 총 1,287건이고, 이를 문서의 성격에 따라 분류해 보면 공문서가 410건, 사문서가 652건, 교회문서가 216건이다. 동양어 문서 초기의 것은 한문으로 씌여진 것이 많고, 후기에 올수록 한글로 씌어진 것이 많이 나타난다. 서양어 문서는 총 1만 2,164건으로 라틴어문서가 2,068건, 프랑스어 문서가 9,518건, 영어(英語)문서가 571건, 독어(獨語)문서가 4건, 이탈리아어 문서가 2건, 스페인어 문서가 1건인데, 라틴어와 프랑스어 문서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서양 어문서 대부분이 교회문서이고 또 뮈텔 주교를 비롯하여 문서와 관계된 성직자들 대부분이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이다. <뮈텔문서> 속의 주요 사건 내용으로는 1886년의 한불조약(韓佛條約), 1894년의 동학혁명(東學革命) · 갑오경장(甲午更張) · 항일의병모금사건(抗日義兵募金事件), 1895년의 을미사변(乙未事變), 1896년의 아관파천(俄館播遷), 1898년의 명동 대성당 준공 및 보부상(褓負商)과 황국협회(皇國協會)의 천주교인 위협사건, 1899년의 교민조약(敎民條約) 및 천주교인들의 황성(皇城)신문사 난입사건,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 사건, 1904년의 한 · 불 · 노 비밀 3국동맹(韓佛露 秘密三國同盟) 및 선교조약(宣敎條約), 1905년의 울릉도 영유권 분쟁, 1909년의 교회운영학교 인가에 대한 정교(政敎)분쟁 등인데, 이밖에도 많은 교민(敎民), 정교 분쟁의 내용이 들어있고, 1910년 이후의 문서들에서는 교회 내의 사목(司牧) 관계가 주된 내용이다.

<뮈텔문서>는 한 개인이 수집한 최대의 문서로서 무도 개인과 관(官)이 직접 기록한 원사료(原史料)라는 점, 그리고 이 문서들이 수집된 기간이 구한말(舊韓末)에서 일제(日帝) 초기에 이르는 한국사(韓國史)의 일대 전환기였다는 점에서 사료(史料)로서 높이 평가된다. 특히 같은 시기의 사료인 <법안>(法案), <뮈텔일기>(Journal de Mgr. Mutel) 등과의 상호보완을 통한 근대 한국의 정치·사회·사상·외교사 연구와 한불조약 이후 교회와 정부와 관계, 동학과 천주교, 188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의 교회 모습 등 근대 한국 교회사를 재조명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李元淳, 未公開史料 Mutel 文書, 韓國史硏究, 3집, 韓國史硏究會, 196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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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텔 [원] Mutel, Gustave Charles Marie

Mutel, Gustave Charles Marie(1854-1933) 대주교. 파리 외방전교회원. 제8대 조선 교구장. 한국명 민덕효(閔德孝). 프랑스 블뢰메리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조앵빌 중등학교와 랑그르 소신학교를 졸업하여 1873년 10월 11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한 뒤 1877년 2월 24일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12월 만주에 도착하였다.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인하여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하고 만주에 머무르면서 전교활동 준비와 한국에 관련된 여러 문서들을 정리하는 한편 일본에서의 시복수속 등을 견학하기도 하였다. 이는 후에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의 시복과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80년 5월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와 함께 입국하려 하였으나 조선 관헌들의 엄한 감시로 성공하지 못하고 같은 해 11월에 가서야 황해도 장연(長淵)에 상륙할 수 있었다. 1881년 황해도 백천(白川)에서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와 잠입하였으나, 당시 천주교 탄압교서인 신사 척사윤음(辛巳斥邪綸音)이 공포된 때라서 은거생활을 하며 한국어와 한문공부에 몰두하면서 순교자에 관한 자료와 기록 정리에 열정을 쏟았다. 1885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지도자로 임명되어 파리로 소환되었으나 한불조약(韓佛條約, 1886. 6. 4)이 조인된 훨씬 뒤인 1890년 8월에는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대목)으로 임명되어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성당에서 성성식(成聖式)을 거행하고 나서 뒤테르트르(Dutertre, 姜良),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와 함께 1891년 2월 조선에 재입국하였다.

박해시대에 활동한 적이 있는 뮈텔 주교는 한불조약 이후 지하교회에서 해방된 교회의 모습을 좀더 확연히 하기 위하여 예수성심신학교, 종현(鐘峴) 성당, 약현(藥峴) 성당 등을 준공시키는 이외에 각 지방에서의 본당 창설활동에 많은 지원을 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순교자들의 꽃을 피어나게 하라”(Florete Flores Martyrum)는 그의 표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순교자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순교자 현양과 한국 천주교회사의 정립, 그리고 순교복자의 시복 등으로 꼽을 수 있다. 1894년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의 원본이 발견되자 곧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각 학계에 배포하고 그 원본은 교황에게 진상하였으며(1925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순교상황을 수집하여 1895년 ≪치명일기≫(致命日記)를 편찬하였다. 1904년을 전후하여서는 기해박해(己亥迫害)의 순교행적을 기록한 현석문(玄錫文)의 ≪기해일기≫(己亥日記) 한 벌이 발견되었는데 앞뒤의 일부가 상하여 이를 보충하고 서문을 붙여 1905년 ≪기해일기 뮈텔판≫을 간행하였다.

한편 뮈텔 주교는 확장되는 교세에 따라 교계제도가 확립될 수 있는 기초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1911년 전라도, 경상도의 남부지방을 분할하여 대구교구로 설정한 뒤 1920년에는 함경도, 간도지방을 분할하여 원산교구로 설정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1923년에는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Maryknoll Fathers)의 한국 진출을 주선하여 1927년에 창설된 평양교구의 사목을 이관하였다. 이와 같은 대내외적인 여러 활동으로 1920년 교황청으로부터 백작 작위를 수여받고, 1925년 3월 명의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더욱이 1925년 7월 5일에는 그의 오랜 숙원이던 한국 순교복자 79위에 대한 시복식이 교황 비오(Pius) 11세에 의해 거행되었다. 이밖에 일제하의 탄압 속에서도 교회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가 한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33년 1월 23일 80세의 생을 마쳤다. 주요 저서는 ≪Doc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 de 1839 et 1846≫, ≪Docu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 1866≫, ≪뮈텔일기≫(Journal de Mgr. Mutel, 1890-1933), ≪뮈텔문서≫(Documents de Mgr. Mutel, 1890-1927) 등이 있다.

[참고문헌] Mgr. Larribeau, Un grand Eveque missionnaire, S. Exc. Mgr. Grustave Mutel, Paris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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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투쟁 [한] 文化鬪爭 [독] Kulturkampf [관련] 무류성

교회사(敎會史)에서 문화투쟁이란 보불전쟁(1871년) 후 독일에서 일어났던 반(反)가톨릭 교회운동을 말한다. 당시 독일의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통일을 염원했고, 그를 위해서는 가톨릭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국의회에서 상당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는 중앙당(Zentrumspartei)이 가톨릭 신도들의 정치적 대변인이 되고 있음을 비스마르크는 눈의 가시처럼 생각하였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당시 가톨릭내의 불편한 관계, 즉 교황의 무류권(無謬權)에 대한 실라부스와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측과 따르는 측과의 대립, 알력관계를 이용하려 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소위 구가톨릭교도(Altkatholiken)라 불리는 ‘반대파’들을 지원,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1871년 프로이센 문교부의 가톨릭국(局)이 폐지되고 ‘설교단조규’(說敎團條規, 12. 10)가 발표되어 자유로운 설교가 제한당하였다. 이어 ‘학교감독법’(1872. 3. 11), 예수회원 추방령인 ‘예수회원법’(7. 4)이 발표되었고, 유명한 ‘5월법’이 뒤이어 발표됨으로써 성직자의 양성과 임명, 교회적인 징계권, 교회탈퇴 등은 국가의 지시에 따르도록 되었다. 1875년 ‘구 가톨릭 교인법’(7. 4)은 구 가톨릭 교도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공용권(共用權)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1875년 ‘5월법’은 프로이센 내의 모든 수도원을 폐쇄하며 수도자들은 추방한다는 조문을 명시하고, 예외적으로 병자간호에 종사하는 수도회만이 내각이 정한 바에 따라 지속될 수 있었다. ‘급여차단법’(給與遮斷法, 1875. 4. 22)은 일련의 문화투쟁법을 인정하고 따른다는 서명을 한 ‘어용사제들’을 제외한 모든 성직자에 대해 국가는 재정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사제들에게 위협을 가하였다. 이 모든 법의 실시는 경찰권을 동원하여 과료, 금고, 국외추방 등의 형을 부과하였다. 이러한 강제조치는 신자, 성직자들의 단결과 저항을 초래하였다. 프로이센 뿐만 아니라 바덴, 헤센, 다룸슈다트, 작센에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다. 정부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었고, 오히려 가톨릭의 단결만 촉진하는 꼴이 되었다. 중앙당의 의석이 1873-1874년간의 1년 사이에 91석으로 늘어났고, 마침내 비스마르크는 자진하여 요구를 포기하였다. (⇒) 무류성

[참고문헌] H. Bruck, J.B. Kissling 공저, Geschichte der Katholischen Kirche in Deutschland im 19 Jahrhundert IV 1 · 2, 1907-1908 / J.B. Kissling, Geschichte des Kulturkampfes, B. 3, 1911-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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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만 [한] 文濟萬 [관련] 무세

무세(Mousset) 주교의 한국명. ⇒ 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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