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타누스파 [한] ∼派 [라] Montanismus [영] Montanism

2세기 후반 몬타누스(Montanus)에 의해 프리지아(Phrygia)에서 발생한 종말론적 이단운동. 동서로 신속하고 널리 파급되었으나 5-6세기에는 거의 모두 사라졌다. 원시교회의 소박성으로의 복귀, 성령에 대한 기대와 영적 선민의식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몬타누스 자신은 156-157년 혹은 172년에 예언을 시작, 하느님의 나라가 프리지아에 있는 페푸자(Pepuza) 가까이에 내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추종자 중에는 프리스카(Prisca)와 막시밀라(Maximilla)가 특히 유명하였는데 이들은 몬타누스와 함께 종교적 황홀경 속에서 이상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으며 추종자들은 이를 성령에 의한 것으로 믿었다.

로마령 아프리카에 있던 몬타누스파의 분파는 금욕적 특성으로 특히 유명한데 206년경 여기서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의 동조를 얻었으며 재혼을 금하고 현존의 단식 규정이 너무 이완되어 있다고 비판, 독자적인 규정을 만들었다. 또한 박해 때 도망하는 것을 배교로 간주하였다. 테르툴리아노도 속죄 규정이 너무 관용적이라고 비판, 가톨릭 신자를 ‘동물적 인간(psychici)’이라고 불렀으며 몬타누스파들은 ‘성령을 받은 자’(pneumatici)라고 불렀다. 이 운동의 어떤 요소들(종교적 열정, 탈혼적 예언)은 원시 그리스도교와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에서는 제도 중심주의의 성장과 교회의 속화에 직면하여 초기 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로 이해되기도 한다. 더구나 그 뒤 교회 역사에서 계속적으로 나타난 종말적 집단들의 한 예로 이해될 수 있다. 수많은 정통 저작가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는데 그 중에는 아폴리나리우스(Claudius Apollinarius), 밀티아데스(Miltiades), 로도(Rhodo) 등이 있다. 200년 이전에 아시아 교회회의에서 정식으로 단죄되었다.

[참고문헌] P. de Labrille, Les sources de l’histoire du Montanisme, Fribourg 1913; La crise Montaniste, Paris 1913 / W. Schepelern, Der Montanismus und die Phrygischen Kulte,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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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누스 [관련] 몬타누스파

⇒ 몬타누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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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시뇰 [영] Monsignor [이] Monsignore

가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에 대한 경칭(敬稱). 어원상 ‘나의 주인’이란 뜻을 지닌 이탈리아어(monsignore)에서 유래한 이 칭호는 아비뇽 체류시대에 프랑스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은 재치권을 행사할 교구를 갖지 않은 교황청 고위 성직자와, 주교품을 받지 않은 자로서 덕망이 높은 성직자가 교황으로부터 몬시뇰 칭호를 받는 것이 보통이다. 한국에는 3명의 몬시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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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본당 [한] 木浦本堂

전라북도 여기저기 여러 본당이 설립되었던 1896년 가을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호남지방 순회 때 목포에 될 수 있는 한 신자들을 이주시키도록 당시 수류 본당(水流本堂) 라크루(Lacrouts, 具) 신부에게 위임하였다. 한편 1897년 봄 뮈텔 주교로부터 책임을 부여받 드예(Deshayes, 曺) 신부는 목포시 산정동 90번지에 20여 평 규모의 성당 겸 신부사택용으로 벽돌 건물을 세우고 1898년 봄에 목포 본당을 설립, 1909년 봄까지 초대 주임신부로서 전교사업을 벌였는데, 당시 교우수는 약 300명이었다.

2대(1909-1912년) 투르뇌(Tourneux, 呂) 신부, 3대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 신부 때인 1913년에는 목포시 산정동 94번지에 현재의 성당을 벽돌조 건물로 100여평 대지 위에 신축하여 성 십자가 성당으로 이름지었다. 4대(1914-1915년) 카넬(Canelle, 簡)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1차 세계대전으로 소집되어 전사함으로써 1년 동안 본당신부 없이 제주읍의 라크루 신부가 대신 관리하였다. 5대(1915-1922년) 타케(Taguet, 嚴) 신부 때는 교우수가 400명, 6대(1922-1932년)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 때는 교우수 700명, 7대(1932-1934년) 송남호(宋南浩, 요셉) 신부 때는 교우수 800명으로 차차 증가추세를 보이다가, 8대(1934-1942년)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신부인 모나간(Monaghan, 矣) 신부 때는 1,800명, 9대(1942년 봄-여름) 김재석(金在石, 요셉) 신부 때는 1,950명, 10대(1942년 여름-1944년) 박문규(朴文奎, 미카엘) 신부 때는 2,050명, 11대(1944-1949년) 최덕홍(崔德弘, 요한) 신부 때는 2,500명, 12대(1949. 2-1949년 가을) 김재석 신부 재부임 때는 2,600명, 13대(1949년 가을-1950. 7. 24) 쿠삭(Cusack, 高) 신부 때는 2,750명이었다. 그런데 쿠삭 신부는 6.25 동란으로 인하여 캐롤(Caroll, 安) 몬시뇰, 보좌신부인 오브라이언(Obrien, 吳) 신부와 함께 공산군에 의해 납치되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1952년에는 목포 본당이 경동 본당(京洞本堂)을 분리시키면서 산정동 본당으로 이름이 바뀌어지게 되었다. 쿠삭 신부의 뒤를 이어 모란(Moran, 安) 신부가 14대(1950-1953년)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는데, 이 때 교우수는 3,000명이었다. 그 뒤 15대(1953-1953. 6) 도슨(Dawson, 孫) 신부, 16대(1953. 6-1956년) 새비지(Savage, 元) 신부 때에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이 전교활동을 시작하면서 성심유치원을 창립, 운영하였다. 17대(1956-1960년) Dunne(都) 신부 때인 1958년에는 목포시 북교동 본당(北橋洞本堂)의 신설로 본당 관할구역이 분리되었다. 18대(1960-1962년) 휴스(Hughes, 柳) 신부 때는 교우수가 4,594명, 19대(1962-1964년) 모리시(Morrisey, 矣) 신부 때는 교우수가 4,650명이었다. 20대(1964-1969년) 브라질(Brazil, 陳) 신부 때인 1966년 5월 29일에는 목포시 산정동 97번지에 166평의 철근 콘크리트 및 벽돌 슬레이트 성당, 45평의 사제관을 건립하고 성 미카엘 대천사를 본당주보로 정하고 성 미카엘 성당으로 이름지었다. 그리고 1969년 9월 3일에는 목포시 연동 본당의 신설로 본당 및 공소 관할구역을 재조정하였다. 21대 캐얼란(Carelan, 車) 신부 때는 교우수가 3,000명이었고, 목포시 대성동 본당의 신설로 다시 본당 및 공소 관할구역을 재조정하였다. 22대(1972-1974년) 모리시 신부 때는 교우수 2,000명, 23대(1974-1978년) 놀란(Nolan, 盧) 신부 때도 2,000명, 24대(1978-1983년) 이재흥(李載興, 힐라리오) 신부 때도 2,000명이었다. 1978년 10월 27일에는 6.25때 피랍된 성직자(캐롤 몬시뇰, 쿠삭 신부, 오브라이언 신부) 순교비를 본당 내 성모상 옆에 세워 제막하였다. 25대(1983-현재) 주임신부는 박영웅(朴英雄, 가브리엘) 신부이다. 1984년 현재 신자수는 1,937명이고, 3개의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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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 [한] 牧杖 [라] baculus

주교장(主敎杖)을 말한다. 모세와 아론의 지팡이를 모방(출애 4:20, 7:12)하여 높은 권력과 사목자의 상징으로서 주교의 복장 가운데 일부를 이룬다. 주교가 미사를 집행할 때는 지팡이 손잡이의 동그란 쪽을 사람들에게 향하도록 휴대한다. 대수도원장과 수녀원장도 수도원 안에서는 그것을 휴대할 권리가 있다.

주교직의 상징으로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633년 제4 톨레도(Toledo) 교회회의에서였고, 그 뒤 세빌라(Sevilla)의 이시도로(Isidorus)에 의하여 언급된 기록이 남아 있다. 처음 10세기에는 지팡이 손잡이가 동그란 모양이었는데 더 홀형(笏型)을 이루게 되고, 교황도 ‘베드로 장’이라고 하여 이것을 가지고 다녔다. 아무튼 목장은 주교가 교구에 부임하는 권리의 한 상징으로서 전례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1세기 무렵부터 아마 서임권(敍任權) 논쟁의 결과, 지금과 같은 형태의 목장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주교에게 맡겨진 양떼를 충실히 사목하고, 길 잃은 자를 인도하며 약한 자를 돕는다는 뜻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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