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Fort, Gertrud von(1876-1971). 독일의 가톨릭 여류시인, 소설가. 민덴의 신교도(新敎徒) 가정에 태어나 트렐치(E. Traeltsch)에게 사사(師事)하여 역사 · 종교철학을 배우고, 1924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작품은 신학적 세계사적 배경을 지녔으며, 자아실현(自我實現)과 신(神)의 권위와의 사이의 긴박감을 그려내었다. 소설로 ≪베로니카의 수건≫(Das Schweisstuch der Veronika, 1928), ≪유태인가 밖의 교황≫(Der Papst aus dem Ghetto, 1930) 등이 있다.
르코르뷔졔 [원] Le Corbusier
Le Corbusier(1887-1965). 프랑스의 건축가, 화가, 저술가. 본명은 Charles Edouard Jeanneret. 스위스의 라쇼드퐁 태생. 고향에서 그림 공부를 한 뒤 파리에서 건축을 공부, 1922년 건축 사무소를 열고 주택 · 도시계획 등의 설계 · 감독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집은 살기 위한 것이다”라고 제창, 근대 기계문명을 낳은 과학과 기술에 입각해서 철과 시멘트와 유리에 의한 명쾌한 근대건축을 창도하였다. 그가 설계 · 감독한 작품으로는, 제네바의 국제연맹궁전(1927년), 파리 공예박람회의 레스프리누보관(館), 파리의 스위스학생회관, 마르세이유의 노동자 아파트, 도쿄(東京)의 국립서양미술관(1955년) 등이 있다. 모더니즘 건축의 거두이며, 시와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르장드르 [원] Le Gendre, Louis-Gabriel Arsene Ambroise
Le Gendre, Louis-Gabriel Arsene Ambroise(1866-1928). 파리 외방전교회원. 서울교구 선교사. 한국명은 최창근(崔昌根). 프랑스 쿠탕스(Coutance) 교구의 뒤시(Ducey)에서 출생. 1884년 쿠탕스 교구 대신학교에 들어가 1889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았다. 1년 동안 교구사제로 사목하다가 1890년 9월 21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고, 이듬해 한국에 부임하였다. 1892년 원산, 1893년 황해도 수안(遂安)의 덕골, 1895년 평양 외성(平壤外城) 등지에서 사목하였다. 1898년 시복조사 담당으로 한때 사목생활에서 떠났으나 다시 1902년 부산본당 주임, 1909년 송도(松都) 본당 주임신부를 역임하였으며 그 후 1919년 이질 치료차 프랑스로 귀국했다가, 1921년 다시 한국에 돌아와 서울교구 주교관에서 휴양하면서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1923년 ≪회장직분≫, 1925년 ≪천주교요리≫(일명 대문답)을 저술했고 1926년부터는 신학생을 위한 나한사전(羅韓辭典) 편찬에 착수했으나 심한 안질(眼疾)에 걸려 중단하고 그 뒤 합병증에 시달리다가 1928년 4월 21일 선종,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르완다 [원] Rwanda
중동부 아프리카의 적도 근방의 내륙 농업국으로 인구밀도가 높다. 면적 2만 6,338㎢에 인구 약 511만 명(1982년 추계)에 이른다. 1917년 최초의 르완다 출신 사제가 탄생하였으며, 그 뒤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1930-1940년). 그러나 1939년부터 1944년까지 기근, 종족분쟁, 정치적 분쟁 때문에 포교 활동에 많은 장애를 받았다. 1982년 현재 가톨릭 신자는 약 236만 명에 이르며 독일, 벨기에, 영국 등의 개신교도 무시 못 할 세력을 가지고 있다.
르와지 [원] Loisy, Alfred Firmin
Loisy, Alfred Firmin(1857-1940). 프랑스 근대주의자, 성서학자. 파리에서 공부하고, 파리의 가톨릭학원(Institut Catholique)의 히브리어 및 구약학 교수가 되었다(1881년). 후에 르낭(J.E. Renan)의 강의를 듣고 범신론자로 기울었다. 그로 인해 전통적인 가톨릭의 신앙은 흔들렸으나, 가톨릭교회에 머무르면서 교리의 근대화에 힘썼다. 비판적 견해로 인해 성서학교수 직위에서 물러나고(1892년), 앗시리아어 · 히브리어 이외의 강의를 금지당하였으며 ≪성서 교설≫(L’Enseignement biblique, 1892-1893) 출판 후에는 대학에서 아주 쫓겨났다. 하르나크(Adolf von Harnack)의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답해서 ≪복음과 교회≫(L’Evangile et l’Eglise, 1902)를 출판, 하르나크가 그리스도교를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 위에 세워진 것이라 주장한데 대해,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발전해 나아가는 교회의 신앙 속에서 구해져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제4 복음서≫(Le Quatrieme vangile, 1893) 등을 저술하였으나 모두 비난받고 금서(禁書)가 되었다. 후에 시골로 물러가(1904년), 대작 ≪공관복음서≫(Les Evangiles synoptiques, 1908)를 저술하여 교회의 전통에 공공연히 반대되는 견해를 내놓고 파문을 당하였다. 콜레즈 드 프랑스에서 종교사 교수로 근무(1909-1930), ≪종교≫(Les Religions, 1917) 등을 저술하여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교(異敎) 신비주의의 강한 영향을 역설, 또한 ≪신약제서≫(新約諸書, Les Livres du Nouveau Testament, 1922)에서 이 사고방식을 발전시켜 양식사적 연구법의 영향에 반영시키고 있다. 그의 신약에 관한 최종적 견해는 ≪그리스도교의 탄생≫(Naissance du Christianisme, 1923) 속에 요약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복음서를 역사적 문서로 다루지 않고, 교리문답적 문학의 일종이면서도 역사적 근거가 희박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독일의 성서비평학에 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거기에 그 자신의 직관을 섞어서 독특한 성서학을 형성하였다. 프랑스의 근대주의 창설자로 널리 인정받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