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에서 ‘랍’의 칭호를 가진 사람은 관직을 가진 훌륭한 사람을 말한다. 랍비는 문자 그대로 ‘나의 주인’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가리켜 ‘선생님’이란 뜻으로 불렀다(마태 23:7, 요한 1:38). 사도시대 이후에는 랍비는 유태교 성직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참고문헌] John A. Hardon, S.J., Modern Catholic Dictionary, New York 1980.
구약성서에서 ‘랍’의 칭호를 가진 사람은 관직을 가진 훌륭한 사람을 말한다. 랍비는 문자 그대로 ‘나의 주인’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가리켜 ‘선생님’이란 뜻으로 불렀다(마태 23:7, 요한 1:38). 사도시대 이후에는 랍비는 유태교 성직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참고문헌] John A. Hardon, S.J., Modern Catholic Dictionary, New York 1980.
Lactantius, Caecilius Firmianus(240?~320?). 그리스도교 호교가. 라틴교부. 북아프리카 이교도 집 안에서 출생하여 아르노비오(Arnobius)의 제자가 되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통치기간 동안 니코메디아에서 수사학 교사로서 활약하였다. 그의 개종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303년 박해 때 공직을 잃고 2년 후 서방으로 가서 갈리아에서 살다가 동방으로 돌아온 것 같다(311~313년). 노년에는(317년경)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들인 크리스푸스(Crispus)의 가정교사로 지냈다.
현존하는 그의 저서는 그리스도교와 관련 있는 것들뿐이다. ≪하느님의 업적에 관하여≫(De Opificio Dei, 303~304)는 인체(人體)의 해부학적 경이로움을 통하여 하느님의 섭리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하느님의 가르침≫(Divinae institutiones, 313) 전 7권은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는 외교인들의 주장을 논박할 목적으로 씌어졌다. 이 저술에서 이교도들의 신앙과 철학을 공격하면서 그리스도교, 정의, 진리, 경신(敬神), 진정한 종교, 종말론 등을 다루는 락탄시오는 그 논거를 성서에서보다는 ‘시빌의 신탁’(Sibylline oracles) 등 이교도의 예언서에서 찾아내고 있다. 이 밖에 ≪하느님의 분노에 관하여≫(De ira Dei, 314경)에서 하느님의 인간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심을 밝히고 ≪박해자들의 죽음≫(De mortibus persecutorum, 318경)에서 박해자들의 비운을 그렸다. 후자는 역사서로서 가치 있는 문헌이다. 락탄시오는 당시 교양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안내하기 위하여 형식의 미(美)를 존중할 필요에서 라틴어로 저술하였다. 그는 문체에 있어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라틴어 저술가 가운데 고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락탄시오의 저술을 가리켜 “마치 치체로의 웅변이 흐르는 것 같다”고 예로니모는 극찬한다. 문예부흥기 때 ‘그리스도 교인 치체로’라고 불린 락탄시오는 그리스도 교리에 관하여 깊이 다루지는 못하였다.
La Pierre 또는 Lapierre(?~?). 프랑스 중국파견함대 분함대장(分艦隊長), 해군대령. 중국명 납별이(拉別耳). 프랑스에서 출생. 1846년 세실(Cecile) 제독이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포함한 3명의 프랑스 선교사 학살에 대해 조선정부에 항의서한을 전달한 후, 이에 대한 회신을 받고자 1847년 7월 2척의 군함에 메스트로(Maistre, 李)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부제를 태우고 중국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조선 근해에 이르러 전라도 고군산도(古群山島)에서 배가 좌초되어 조선정부의 회답을 받지 못하고 종교의 자유를 청하는 서한을 전라도 관찰사에게 전한 후 구조하러 온 영국(英國)배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조선정부는 그 후 세실의 편지에 회신을 보냈는데 이 회신은 마카오에 있는 라피에르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敎會史硏究,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Lafourcade, Arnaldus(1860~1888). 조선 교구 선교사. 한국성(姓)은 나(羅). 프랑스의 바스크 지방의 랑드르(Landres) 지방과의 경계인 유르퀴(Urcuit)에서 태어난 그는 강인한 성격에 건장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가장 어려운 포교지인 한국으로 가게 한 원인인지도 모른다. 1883년 2월 19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6년 9월 26일 사제품을 받고 그해 12월 1일에는 한국으로 떠났다. 그 이듬해 서울에 도착한 그는 곧 전라도 지방으로 파견되어 동료인 두세(Doucet) 신부를 도우며 한국말을 배워, 가을에는 독자적으로 한 구역을 전담할 수 있었다. 34개의 공소를 돌아다니며 1,170명의 신자들로부터 고해를 듣고, 52명에게 영세를 주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으나, 험한 산길을 찾아 헤매며 불편한 잠자리와 맞지 않은 음식은 그토록 건강했던 몸을 점차로 잠식하여, 임지에 내려온 지 1년도 못되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외딴 이역땅에서 홀로 숨을 거두는가 싶었으나 우연히도 동료신부와 젊은 베르모렐(Vermorel) 신부가 그를 도우려고 찾아왔다가 그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한국에 입국한지 불과 1년 반도 못되는 1888년 7월 11일이었다.
Raffaello, Sanzio(1483~1520). 이탈리아의 화가 · 건축가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천재 예술가의 한사람. 라파엘로는 11세 때, 화가로 우르비노에서 활동을 하던 아버지, 산치오(G. Sanzio)를 잃고, 1499년 페루지아로 가서 페루지노의 문하생으로 그림을 배웠다. 거기서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여 스승의 구도(構圖)를 개조하였다. 공간에 교차하는 화음(和音)의 물결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음악적인 감각은 루브르 미술관의 <성 미카엘>, <성 게오르기우스>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예술적인 일관된 기조를 이루고 있다.
페루지아에 온 후로는 급속히 페루지노의 최고기법을 익혔으며, <성모대관(聖母戴冠)>(바티칸 미술관), <그리스도의 책형(磔刑)>(런던), <스포잘리치오>(성모의 결혼, 밀라노) 등을 페루지노의 작품으로 착각할 정도인데 공간의 처리나 환상적인 표현은 그의 스승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선미를 보여 준다. 그는 1504년 피렌체로 가서 4년간 체재하는 동안, 현실감에 넘친 예술 감각에 감동하여 그 곳의 예술적 전통에 도취되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암법(明暗法) 등을 배워 페루지노의 영향을 탈피하고 피렌체의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도니 부처상(夫妻像)>등 초상화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이 뚜렷이 보이며, 이 시대에 가장 많이 그려진 성모자상에 있어서도 성모의 자태나 피라밋형의 구도에 있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이 다분히 나타나 있고 <그리스도의 매장>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선의 움직임까지 모방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선인(先人)의 기법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화면구성에 있어서의 선의 율동적인 조화라든지 인물의 태도의 고요함이나 용모의 청순함 등에는 언제나 독자적인 매력을 나타내었다. 1509년에는 교황 율리오 2세를 위하여 바티칸 궁전 장식에 종사하여 천장화(天障畵)를 그린 후, 사면의 벽면에 <성체의 논의>, <아테네의 학당>, <파르나소스> 등을 그렸다. 14년 동안 그는 건축에도 손을 대었는데 선배인 브라만테가 죽은 뒤 베드로 대성당 건축의 감독을 맡았다. 미켈란젤로가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 작품으로 미의 표현에 있어 미를 이차적인 가치로 밖에 인정하지 않은 비극적인 인물이었다고 하면, 라파엘로는 고전예술의 미의 이상을 불변의 기준으로 보는 예술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