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한] 東學

동학은 조선왕조 후기의 민중적 고통을 해탈하기 위하여 창도된 민간 신앙의 일종이다.

1.발생사적 배경 : 조선왕조 후기와 같은 사회적 혼란기에 민중들로 하여금 신흥종교에 귀의토록 한 요인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를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는 당시의 사회 · 경제가 가지는 구조적 모순이었다. 예컨대 단순한 인사행정[入仕] 이상의 의미를 갖는 과거제도가 타락한 점이라든가, 문치(文治)를 중요시함으로써 나타나는 봉록제도(俸祿制度)의 미숙함으로 인한 하급관리의 수탈, 토지제도의 불비(不備)로 인한 민생의 어려움[民막]과 같은 제도적인 갈등, 그리고 이러한 제도적 모순 이외에 나타나는 질병이나 한해 · 수해 등의 천재지변은 삶에 대해 궁극적인 확신을 갖지 못한 하층계급으로 하여금 해탈의 한 방법으로서 신흥종교에 귀의케 하였다. 둘째로는 사상적인 피폐인데 당시의 지배윤리였던 유교가 치자(治者) 중심의 통치원리인 데다가 시대적 변천과 더불어 설득력을 잃게 되고, 불교는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으로 재원이 어려워 도교나 무속신앙과 영합함으로써 그 본래의 구원의 문제가 일탈되기 시작했으며, 서학은 특히 조상숭배를 둘러싼 이교도적 이질감으로 인하여 민중신앙으로 미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황 속에서 민중들은 새로운 이상향의 도래를 갈구하고 있었다. 셋째로는 중국을 세계 문명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주자학적 세계관과 중국을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1840년에서부터 비롯된 중국의 불행한 국제적 경험들, 이를테면 아편전쟁(1840년)과 이로 인한 서구인의 부도덕성에 대한 인식, 애로우호사건과 뒤이어 일어난 영불연합군의 북경 함락(1856~1858년), 태평천국의 난 (1850~1856년)에 비춰진 그리스도교적 요소와 왕조적 불안이 한국 민중들로 하여금 수기(守己)의 이론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넷째로는 서세동점과의 일련의 분규들, 이를테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의 평양 공격과 병인양요, 1868년의 오페르트(E. Oppert)에 의한 남연군묘(南延君墓) 굴총사건, 1871년의 신미양요, 프랑스 선교사의 잠입에 따른 전통문화의 위기감 등이 민중을 동학에 눈뜨게 만들었다. 다섯째로는 서기 10세기경에서부터 비롯된 불행한 한일관계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사상무장 운동의 일한으로서 동학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2. 창도와 발전 과정 ① 제1기(창도에서 교조의 순교까지) : 교조 최제우(崔濟愚, 호는 水雲)는 몰락한 유생 최옥(崔-)의 서출(庶出)로서 일찍이 부모를 잃고 세속의 고난 중에 고통 받던 중 명상과 지적 탐구, 그리고 자기 황홀(ecstasy)을 거쳐 대각(大覺)하여 창도(1860년)한 것이 동학이었다. 최제우의 창도 동기는 당시의 민중적 고뇌의 현세적(現世的) 해방이었으며, 자신을 메시아로 추앙하거나 신관(神觀), 내세관에 있어서 종교적 동기를 가진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사회적 또는 정치적 개혁 의지에 몰두한 것이었다. 그는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뿌리박고 있는 유 · 불 · 선 3교와 가톨릭적 요소를 혼합한 하나의 사상체제를 이루어 경전[동경대전 4편, 용담유사 9편, 부(附) 15편]을 완성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혹세무민의 죄로 1864년에 순교하였다.

② 제2기(1864~1893년) :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순교하자 그의 수제자요 족친이었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이 2세 교주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이 당시는 순교와 탄압의 시기였으므로 동학은 지하종교로 잠복하였고, 최시형의 믿음의 유형도 개혁의지적인 최제우와는 달리 수도사적이었으므로 제2기의 30년은 순수 신앙으로 일관하다가 가톨릭의 전교가 자유화됨에 암시를 받아 1893년부터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표면화되었다.

③ 제3기(1894~1898년) : 동학이 교조신원 운동을 기폭제로 하여 표면화될 무렵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민막을 견디지 못하여 항거했다가 장살(杖殺)된 전창혁(全彰赫)의 아들인 잔반(殘班) 출신의 전봉준(全琫準)이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민란을 일으켰다. 애당초 동학과 고부의 민란은 무관하였으나 양자가 공통되게 가지고 있던 개혁의지가 일체감을 이루게 되었고, 정부가 민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동학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종교 탄압의 차원에서 이를 수습하려는 실수를 저지름으로써 민란의 종교적 윤색(潤色)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1894년의 갑오 동학 농민봉기는 민란이 주맥(主脈)이었고 동학의 종교성은 종속변수였다.

④ 제4기(1898~1906년) : 동학 농민봉기가 진압되고 2세 교주 최시형이 순교하자 민란의 요소는 1895년의 민비 시해[을미사변]와 더불어 의병의 길을 가게 되고, 동학은 다시 종교에로 회귀하여 교정분리의 원칙에 따라 단체로서 이용구(李容九)가 이끄는 일진회(一進會)가 친일노선을 걷게 되자, 3세 교주인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는 1906년에 이르러 동학의 교명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꿈으로써 사실상의 동학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교리와 종교체제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3. 동학의 기본 사상 : 북위 33~43도에 이르는 온대 계절풍 기후권의 하천 문화가 가지고 있는 경천(敬天), 평화(平和), 호국(護國)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자연주의적 종교인 동학의 기본사상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로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동학의 인간 사랑의 동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는 역대의 교조들이 모두 사랑에 굶주린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1세 교주 최제우는 조실부모한 서출의 지식인으로서 좌절을 맛보았고, 2세 교주 최시형은 사고무친한 농업노동자 출신이었으며, 3세 교주 손병희 역시 적빈(赤貧)한 하층계급의 출신이었다. 다른 하나는 신도들의 입장인데, 당시의 민중들이 유교의 지배윤리에 희생된, 그리하여 애정기아심리(愛情饑餓心理)에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동학의 인간사랑은 교주마다 표현이 각기 다른데, 최제우는 “인간은 모두가 각기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侍天主] 인간은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고, 최시형은 “인간은 서로 하늘을 섬기듯이 사랑해야 한다”[事人如天]고 말하였고, 손병희는 “인간이 곧 하늘이기 때문에[人乃天]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동학의 두 번째는 기본사상은 이 사회가 모두 병들었다고 하는 이론[社會疾病說]인데 이는 모든 신앙이 표현하고 있는 종말론적 현실관과 같은 입장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동학이 말하는 사회의 질병이라 함은 인성(人性)의 타락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었지 세균성 질병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창도 초기에는 많은 신도들이 이를 치병(治病)의 술(術)로 생각하였다. 동학의 세 번째 기본사상은 내세관(來世觀)[理想鄕]이다. 미래의 복락을 약속하는 것은 모든 종교가 공통되게 가지는 속성이지만 동학의 내세관이 가지는 특성은 그것이 죽음 이후 또는 영혼의 평안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지복(至福)의 세계를 보리라는 견해[地上天國]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고뇌에 찬 민중들에게 일시적 효력은 있었지만 그 약속의 허구(虛構)가 동학을 몰락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동학의 네 번째 기본사상은 개혁의 의지이다. 동학에서는 이를 개벽(開闢)이라고 표현하였다. 동학의 개혁사상의 이론적인 기초는 주역(周易)에 포함되어 있는 우주 순환의 법칙이었다. 동학의 개벽 사상은 사회질병설에 대한 해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인간 개벽, 사회 개벽, 그리고 민족 개벽으로 나뉘는데, 이 중에도 민족 개벽은 그 후 동학사상의 민족주의화 과정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최제우와 최시형의 시대까지만 해도 이론에만 머물렀던 개벽사상은 손병희의 시대에 이르르면 삼전론(三戰論)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삼전이라 함은 도덕의 수립을 위한 싸움인 도전(道戰), 서구 문물의 수용을 통한 개명을 의미하는 재전(財戰), 그리고 문호 개방과 적극 외교를 주장하는 언전(言戰)으로 나뉘는데 이것이 세속 질서[정치 문제]와 대입될 때는 삼정론(三政論)으로 바뀌게 된다.

4. 서학과 동학의 관계 : 동학은 그 명칭 자체가 서세동점과 이에 따른 문화적 동질성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서학에 대한 적의(敵意)를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최제우는 당시에 유행하던 천주학으로부터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를테면 신의 개념을 서교적 용어인 ‘천주’라고 표현한 사실이라든가, 종교 의식에 있어서 일요일의 예배[侍日], 교단, 강론, 찬송[天德頌]을 부른다든가, 교조의 신비 체험이나 행적, 그리고 포교에 있어서 접(接)이나 포(包)와 같이 한국의 전통신앙에서 볼 수 없는 교구제(敎區制)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 들이 동학에 포함된 서교적 요소라고 볼 수 있다. (申福龍)

[참고문헌] 李敦化, 天道敎創建史, 天道敎中央宗院, 1933 / 吳知泳, 東學史, 永昌書館, 1940 / 金庠基, 東學과 東學亂, 大成出版社, 1947 / 申福龍, 東學黨硏究, 採求堂, 1977 / 申福龍, 東學思想과 韓國民族主義, 平民社,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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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평학교 [한] 東平學校 [관련] 대신리본당

평양교구 대신리본당에서 1936년 5월 14일 개교한 학교. 그 해 4월 25일 6년제 국민학교로 인가받고 교사가 준공되는 동안 성당 내 가(假)교실에서 수업하였다. 이듬해 부근의 동덕학교가 폐교됨에 따라 학생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동평학교는 적령기를 넘도록 취학하지 못한 빈민 아동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여 많은 학생들에게 취학의 기회를 주었다. 1948년 10월 폐교되었다. (⇒) 대신리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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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태복수법 [한] 同態復讐法 [라] lex talionis [관련] 율법

원시사회나 고대사회에 적용되던 형벌원칙으로 피해자에게 입힌 상해(傷害) · 손해(損害)를 가해자에게 정확히 그대로 보복한다는 것이다. 이는 신체 상해의 경우 가장 흔히 적용되었다. 즉 가해자가 피해자의 눈을 상하게 했다면, 가해자도 피해자가 당한 눈의 상처만큼의 형벌을 받는다. 동태복수법은 그 이전 사회에 적용되었던 ‘피의 보복원칙’(살인행위에 의해 희생된 자가 속한 가문이나 혈연이 살인행위를 한 사람이나 그 사람의 가문, 혈연에게 처벌을 가하는 것)이 발전된 형태이며, 그 뒤 더욱 사회가 복잡하게 됨에 따라 점차 ‘금전적 보상’이라는 형태로 전환된다. 구약에서 동태복수법적인 원칙은 출애 21:23-25, 레위 24:17-21, 신명 19:21 등에 나타나 있고, 고대 근동의 유명한 하무라비법전의 영향을 받는 듯하다. 그러나 하무라비법전이 결의론적(決疑論的) 형식인데 비해 구약은 필연적(必然的) 문체로 기록되어 있다. 동태복수법은 신체의 상해에만 적용된 것은 아닌 듯하다. 신명 19:25-21은 거짓고발 자에게도 동태복수법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의 원칙은 많은 모순과 갈등 속에서 점차 퇴색되어 갔다. 즉 랍비들은 모세의 법을 지키려는 결의와 동태복수법의 실행 상 어려움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다. 강력한 폐기론의 근거는 어떠한 두 사람도 동일한 신체조직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동태복수법의 적용은 결코 공정을 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결국 동태복수법은 금전적 보상제도로 대치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폐기되었다. 예수께서는 악행과 학대를 당할 때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대신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마태 5:38-48, 루가 6:27-30). (⇒)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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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수규 [한] 童貞修規

1894년 홍콩에서 간행된 동정생활에 대한 지침서. 저자 미상. 1744년 중국교회에서 제정된 동정생활의 법규를 소개 설명한 책으로 오늘날 관상수도회와 활동수도회의 동정생활 규칙 중 관상수도회의 동정생활 규칙에 해당되는 내용을 싣고 있다. 책의 앞부분에는 1744년 제정된 동정생활에 관한 25개 조목의 규칙이 그 주해(註解)와 함께 실려 있고, 뒷부분에는 동정생활에 관한 여러 기도문과 규칙, 그리고 1744년 이후 첨가된 25개항 동정생활규칙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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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성모회 [한] 童貞聖母會 [라] Institutum Beatae Mariae Virginis

1609년에 영국인 메리 위드(Mary Ward)에 의해 벨기에의 성 오메(St. Omer)에서 창설된 활동여자수도회. 1964년 6월 10일 한국 진출. 청소년교육과 그 밖의 모든 자선사업 활동을 전개하던 이 수도회는 초창기 교회로부터 반대와 오해를 받는 등 갖가지 고생을 하다가 1909년 300년만에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인준을 받았다. 예수회 박고영(朴稿英, 현 서강대학교 교수) 신부가 독일 유학 중 뮌헨(Munchen)의 님펜부르크(Nymphenburg) 관구에서의 한국 진출 요청이 계기가 되어 1956년 이후 8명의 한국 여성이 입회한 후 1964년 5명의 한국인 수녀와 2명의 독일인 수녀가 창립회원으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서울 오류동(梧柳洞)에 정착한 수도회는 1965년 대전으로 진출하여 대전 성모여자중학교를 개교하고, 1966년 대전 성모국민학교, 1968년 대전 성모여자고등학교의 설립 인가를 각각 받았다. 1967년에는 보은(報恩) 분원을 설치하는 한편 보은 성모의원을 개설하여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1972년에는 나환자를 위한 이리(裡里) 성모병원을 개설하였다. 1973년 10월 21일에는 한국분원이 님펜부르크 관구로부터 분할 독립되어 한국관구로 승격되어 그 본부를 대전에 두게 되었다. 현재 초대관구장 박기주(朴基珠) 수녀를 중심으로 서울, 대전, 충북, 보은, 전북, 이리, 경남 진해, 충무에서 112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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