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안본당 [한] 老安本堂

광주교구 관내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본당 중의 하나인 노안본당은 전남 나주군 노안면 양천리(良川里)에 소재한다. 복음의 씨앗은 병인(丙寅)박해 탓으로 1894년 서울에서 함평군 나산면으로 이주해온 정낙(鄭洛, 요한)이 이곳에 전교한 것을 효시로, 1903년 목포의 드뇌(Deneux, 全學俊) 신부가 1년간 왕래하면서 전교함으로써 차차 발전해 갔다. 1904년 투르뇌(Tourneux, 呂東宣) 신부가 대지 약 3,000평, 임야 약간 평을 매입하여 십자형 초가 성당(약 40여평)을 건축하여 비로소 양천본당(良川本堂)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오늘의 노안본당의 전신이다. 뒤를 이은 카다르(Cadars, 姜) 신부는 벽돌을 구워 사제관을 신축하는 도중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중단되어, 카다르 신부가 종군했다 개선하기까지의 3~4년간은 임자없는 본당으로, 목포의 임신부가 내왕 전교하며 사제관의 완공을 보았다. 이 당시 신자수는 300여명이었고, 장성, 영광, 함평, 나산, 나주, 봉황 등 6개의 공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1918년 이경만(李景滿, 요한) 신부가 본당 중흥에 힘을 기울이다가 선종, 1918~1925년 이필경(李弼景, 안드레아) 신부는 농촌계몽에 주력한 뒤, 1925~1934년 박재수(朴在秀, 요한) 신부 때 양천본당은 굳건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즉 1927년 사제관의 확장과 함께 성당을 신축하여 본당 주보를 성모 무염시태로 정하여 노안본당으로서 재출범하게 되었는데, 당시 신자수 650여명, 신설 공소로는 송정리, 광주 북동 등이 있었다. 1934~1935년 헨리(Harold Henry, 玄) 신부를 거쳐 1935~1944년 김창현(金昌鉉, 바오로) 신부 때는 금북중학교와 논밭 수천 평을 매수하여, 4년제 졸업생을 내게 하였다. 1944~1945년 올리버 (Kennedy Oliver, 尹) 신부가 2차 대전으로 인하여 귀국함으로써 본당신부 부재기간이 있었고, 1945~1952년 사이에도 전북 대리감목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를 거쳐 이민두(李敏斗, 다두) 신부 때인 6.25동란 중 약 1년간 본당신부 부재시기를 맞았다.

다시 전쟁 피해 복구기라고 볼 수 있는 1952~1955년 김정용(金正容, 안토니오) 신부 때를 거쳐 1955~1958년 리처즈(David, Richers 方) 신부 때는 사제관수리 신축과 금암, 평동, 삼도 등 공소도 신축하였다. 1958~1959년 디바인(Donald, Devine 文) 신부, 1959~1960년 라이언(Eugene Ryan, 成) 신부, 1960~1963년 히키(Gordan Hickey, 石) 신부, 1963~1965년 홀레첵(Francis Holecek, 許) 신부, 1965~1966년 배봉룡(裵鳳龍, 바오로) 신부, 1966~1968년 올레리(Andrew O’Leary, 吳) 신부, 1968~1972년 놀란(James Nolan, 盧) 신부, 1972~1977년 스위니(Robert Sweeney, 徐) 신부, 1977~1982년 모리시(Michael Morrissey, 毛) 신부, 1982~현재 강길웅(姜吉雄, 요한) 신부로 주임신부가 이어져 온다. 1984년 6월 현재 신자수는 2,50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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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관계 [한] 勞使關係 [영] industrial relations [관련] 노동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판매하는 노동자와 노동을 사서 고용하고 사용하는 사용자(자본가, 경영자)와의 관계를 말한다. 보통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이며 대립 · 항쟁의 모습을 띤다. 즉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가는 잉여가치(剩餘價値)의 생산을 높여 끊임없이 이윤을 내려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의 임금을 최소한의 수준으로 묶어 두고, 노동시간을 최대화하려 한다. 이로써 노동자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생활마저도 영위할 수 없는 비인간적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을 자각한 노동자가 스스로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노동조합을 결성, 정치 · 경제 · 문화적 지위향상을 꾀하게 된다. 이에 대한 자본가의 대응양태에 따라 노사관계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① 전투형 : 자본가와 경영자들이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거나 분쇄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탄압할 때 나타나는 형으로 극단적 대립 · 항쟁의 모습을 띤다. ② 무장평화형 : 가장 일반적인 형으로 노동조합의 역량이 축적되어 노동조합의 무력화(無力化)나 해체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자 노동조합 탄압의 근본적 의도는 은폐한 채 평화공세를 펴는 형이다. ③ 협의 · 협력형 : 1, 2차 세계대전을 경과하면서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서게 되자 자본가들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개재되어 있는 기본적인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노동조합원인 노동자를 개별적으로 경영에 참가시키려는 의도에서 나타나는 형이다. 종업원 지주제도(從業員持株制度, employee stock ownership, labour stock ownership), 이윤분배제도(profit-sharing system), 종업원대표제도, 경영협의회제도, 종업원파견제도 등을 통해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치열한 자본공세를 펴는 단계다. 그러나 이 셋째 유형은 선진 자본주의 제국에서 나타나는 형이고, 제3세계의 개발도상국에서는 전투형이나 무장평화형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제3세계의 국가들에서는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지만 하위 법에 의해 사실상 제약당하고, 이에 따라 노동3권은 공문화(空文化)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개정된 노동관계법을 통해 오히려 노동자의 권익이 감소되고 노동자는 무권리상태에 놓여지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교회는 “경제활동은 여러 사람의 협동으로 이뤄지는 것이므로 노동자에게 피해를 입히게끔 경제조직을 형성하거나 규제하는 것은 비인간적 처사”(사목헌장 67)라고 비난하였다. 노사관계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인 부(富)의 불공평한 분배를 은폐한 채 상호협력의 관계로 될 수 없다. 노사관계가 진정한 협력의 관계로 발전하여 하느님 안에서 형제애적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부의 공평한 분배가 이뤄져야 한다. (⇒) 노동권

[참고문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제2부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1965 / 레오 13세, 노동헌장, 1891 / 바오로 6세, 어머니와 교사, 1961; 민족들의 발전촉진에 관한 회칙, 1967 / J. 회프너, 그리스도교 사회론, 분도출판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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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빌리 [원] Nobili, Robert de

Nobili, Robert de(1577~1656). 이탈리아 태생의 예수회 선교사. 인도(印度)에서의 전교에 생애를 바쳤다(1604). 특히 바라문족을 회심(回心)시키기 위해, 계급제도에 엄격한 바라문 출신 회전자(悔悛者)의 생활양식을 따라 생활했으며, 하층민과의 교제를 피하였다. 그 때문에 다른 선교사들로부터 공격당했는데, 각 계급별로 담당 선교사를 두고, 상류계급의 경계심을 풀게 할 필요성을 역설하여 교황의 재가(裁可)를 얻었다. 그는 뛰어난 언어학자이기도 했으며, 범어(梵語) · 타밀어로 쓴 저서, 찬송가, 신앙문답서 등을 많이 저술하였다. 대표적 저서는 ≪Premiere Apologie≫(1610, 羅佛對譯版, 1931)이다.

[참고문헌] M. de Grisenoy, Robert de Nobili, apotre des Brahmes,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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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시아노주의 [한] ~主義 [영] Novatianism [독] Novatianismus

3세기 중기 이후 서방교회에서 일어난 이교(Schisma, 교회일치를 깨뜨리는 분리)의 원인이 된 노바시아노적 엄격주의를 가리킨다. 로마황제 데치우스(Decius)에 의한 대박해(249~250년)때 이교(異敎)에 타협한 그리스도 교도들(lapsi) 중에, 박해 종식 후 교회로의 복귀를 희망하는 자가 많이 나타났다. 이 때 교회가 이를 쉽사리 허락한 데 대한 반대운동으로서 발생한 것으로, 충분한 회개를 한 후가 아니면 복귀는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일단을 지도한 초기의 중심인물은 로마의 노바시아노(Novatianus)였다. 그는 기교자(棄敎者)의 복귀문제에 관해서, 처음에는 치프리아노(Cyprianus, 툴롱의~)와 마찬가지로 다소간 융통성 있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고르넬리오(Cornelius)가 로마 주교(교황)로 선출되어(251년) 완만한 태도로 이 문제를 처리한 것과 양자간의 개인적인 대립문제도 다소간 얽혀서, 고르넬리오의 견해와 처치에 반대하여 이와 대립하였다. 노바시아노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그를 지지하는 단체에 의해 대립 주교(대립교황)로 추대되었으며, 이에 대해 고르넬리오는 그의 추방을 선언함으로써 시스마가 발생하였다. 노바시아노주의는 안티오키아의 주교 파비아노(Fabianus)에 의해 지지되었으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Dionysius)는 이를 격렬히 반대했으며, 치프리아노도 로마 주교에 대한 충성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노바시아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순교했으나(257/258), 이 단체는 자기네야말로 참으로 ‘깨끗한 무리’ (Cathari)라고 주장, 특히 동방에 많은 지지자를 얻어, 사상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단이라 해서 가톨릭 교회의 배척을 받았다. 니체아공의회는 그들의 그리스도론에 관한 신앙을 정통이라고 인정했지만, 그 시스마활동을 비난하고, 교회와의 화해를 호소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로마제국내의 평화를 원하면서 이 파의 지도자 아체시우스(Acesius)를 견책했고(325년), 황제 호노리우스는 그 박해를 더욱 강화하였다(412년). 그러나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은 5세기 이후에도 근절되지 않았으며, 동방교회권에서는 7세기 말까지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A. d’Ales, S. J., Novatien, Etude sur la theologie romaine au milieu du troisieme, siecle, 1924 / F. Schiedeweijer, Novatian und die Engelchristologie, Z.K.G. 66, 1954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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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시아노 [라] Novatianus [관련] 노바시아노주의

⇒ 노바시아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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