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를리에(Curlier) 신부의 한국명. ⇒ 퀴를리에
남인 [한] 南人
조선시대 사색당파 중의 하나. 16세기 말인 선조(宣祖) 때, 중견 선비들 중에서도 조정에서 벼슬하는 선비들이 붕당(朋黨)을 지어 서로 싸웠는데 처음에는 동인 · 서인으로 분열되었으나 후에 동인이 다시 남인 · 북인으로 갈라졌다. 동인이 갈라지게 된 동기는 서인인 정철(鄭澈)을 배척하는 데 있어 강경파를 북인이라 하고, 온건파를 남인이라 한 데서 비롯된다. 남인은 우성전(禹性傳) · 유성룡(柳成龍) 등이었으며, 북인은 이발(李潑) · 정인홍(鄭仁弘) 등이었다. 남인 · 북인으로 부르게 된 유래는 우성권의 집이 서울의 남산 밑에 있었고, 이발의 집은 북악(北岳)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인은 선조 때 조정의 요직을 많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광해군 때에는 북인에게 밀려났으며 17세기 중엽인 효종(孝宗) · 현종(顯宗) 때에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숙종(肅宗) 때에는 한때 득세(得世)도 했지만, 그 후 서인의 분파인 노론(老論) · 소론(少論)에게 밀려, 숙종의 후대인 경종(景宗) 이후에는 거의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들은 오직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유명한 실학파(實學派) 학자 중에는 남인 출신이 많았다. 남인의 학풍도 영남(嶺南) 남인과 기호(畿湖) 남인으로 구분된다. 영남남인은 퇴계(退溪)의 학풍을 계승하는 전통적 주자학파요, 기호남인은 퇴계의 학풍을 존중하면서도 정치적 현실문제와 새로운 지식의 이해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조선후기에 중국으로부터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신앙에 관한 지식, 즉 서학(西學)이 들어왔을 때, 가장 진지한 관심과 적극적 수용태세를 보인 유교 지식층은 바로 기호남인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노론이 정권을 쥐고 보수적인 정치를 하던 시대에 청조 문물을 받아들이는 실학파 속에 북학파(北學派)도 있으나 천주교 신앙에는 접근하지 않았다. 서양과 천주교의 교리에 관한 지식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도 남인에 속하는 실학파의 선구자 이수광(李晬光)이었다. 기호남인이 서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실학파의 거장 이익(李瀷)에서 비롯된다. 이익은 서양과학의 합리성과 천주교 교리의 윤리적 요소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익의 서학에 관한 관심은 그의 문하에서 양극적(兩極的) 형태로 나타났다. 신후담(愼後聃) · 안정복(安鼎福)의 경우는 천주교의 교리를 비판하고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였고, 권철신(權哲身) · 이가환(李家煥) 등은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하였다. 정조(正祖)시대에 최초의 천주교 신앙운동을 일으켰던 이벽(李檗) · 이승훈(李承薰) · 정약종(丁若鍾) · 정약용(丁若鏞) 등은 바로 이익 문하의 이른바 신서파(信西派)에 속하는 기호남인들이었다. 이들 신서파 남인이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에 몰입하게 된 것은 그 시대의 사회에 대한 개혁정신이 그들에게 깊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분도출판사, 1980 / 黃嗣永帛書.
남이관 [한] 南履灌
남이관(1780~1839). 성인(聖人). 회장. 세례명 세바스티아노. 성녀 조증이(趙曾伊)의 남편. 축일 9월 20일. 서울의 양반 교우가정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18세 때 교우처녀인 조증이와 결혼하였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부친 남필용(南必容)이 체포되자 처가(妻家)로 피신했으나 자신도 곧 체포되어 부친은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자신은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각각 유배되었고, 부친은 유배지에서 곧 사망하였다. 그 후 유배생활 30년만인 1832년 대사령(大赦令)으로 유배지에서 풀려 나와 처가인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잠시 살다가 상경, 처가와 외척이 되는 정하상(丁夏祥)을 도와 성직자 영입운동에 참여했고, 1833년 의주(義州) 변문에서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맞아 들여 그에게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은 후 회장의 직무를 맡아 열심히 교회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이천으로 피신했으나 9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간단한 심문을 받고 형조를 거쳐 의금부로 이송되었고 그 곳에서 정하상, 유진길(劉進吉) 등과 함께 국문(鞠問)을 받은 후 다시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을 선고받아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남원본당 [한] 南原本堂
전북 남원시 쌍교동(雙橋洞) 4번지에 소재하는 남원본당은 전주교구의 관하 본당 중의 하나이다. 본당 설립 전 박해시대인 1885~1886년에 장수(長水), 진안(鎭安) 등지에서 피난해 온 신자들이 산재하여 살아오다가 1934년 처음으로 남원 공소가 설치되었다. 이듬해 1935년 6월 12일 이 공소는 일약 남원본당으로 승격 설치되어, 초대(1935~1938년) 석윤학(石允學, 바오로) 신부는 학원설립, 교리야학 개최를 통해 전교를 시도하여 당시 신자 230명, 공소 3개소를 거느렸다. 2대(1938~1941년) 김영구(金榮九, 베드로) 신부가 만 3년간 신설교회의 시설과 면목을 갖추기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3대(1941~1944년) 김기봉(金基奉, 비리버) 신부를 거쳐 4대(1944~1947년) 조상익(趙相益, 베드로) 신부 때에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광복 후인 5대(1947~1950년) 강윤식(姜允植, 분도) 신부 때 6.25동란을 만나 6대(1950~1955년) 이철연(李喆淵, 방지거) 신부, 7대(1955~1958년) 김재덕(金在德, 아우구스티노, 그 후 교구장) 신부 때는 점차 기반을 다져 오다가 8대(1958~1961년) 박성운(朴聖雲, 베네딕토) 신부가 주임신부로 부임하자 남원읍내 쌍교리(雙橋里)에 성당터를 매입하고 성당과 사제관을 착공, 9월 23일 예수 성심을 주보로 하여, 새 성당의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9대(1961~1963년) 드쉬테(De Schutter, 도광석) 신부, 10대(1963~1965년) 오기순(吳基順, 알벨도) 신부, 11대(1965~1966년) 김환철(金丸喆, 스테파노) 신부, 12대(1966~1968년) 이수현(李守鉉, 요셉) 신부, 13대(1968~1971년) 오현택(吳賢澤, 가시미로) 신부, 14대(1971~1973년) 이수현(李守鉉, 보나벤투라) 신부, 15대(1973~1976년) 김병엽(金炳燁, 베드로) 신부, 16대(1976~1980년) 이재후(李載厚, 토마) 신부, 17대(1980~현재) 서용복(徐龍福, 토마) 신부로 이어져 계속 공소설치 활동에 힘써 오고 있는 중이다. 1984년 현재 신자수는 총 2,29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한] 南~共和國 [영] Republic of South Africa
아프리카의 최남단에 위치한 공화국으로 줄여서 남아프리카라고도 부른다. 면적 122만1,037㎢에 인구 약 3,101만명(1982년 추계)인 이 나라는 1961년 이래 공화국이 되었다. 1910년부터 1961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영국의 자치 식민지였다. 인구의 약 6할이 아프리카인, 네덜란드인 후손, 위그노 후손, 독일 출신 정착자들이고, 아프리카아어(Afrikaans)를 쓰고, 나머지 약 4할은 영어를 사용한다. 15세기 말엽에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동방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들른 것을 계기로 하여 기독교가 들어오게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이 돌로 된 십자가(padroes)를 세우고, 곶, 만, 항구 등에 가톨릭식 이름을 붙였는데, 아직까지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1951년에 남아프리카 교계제도가 설정되었으며, 4개의 관구, 18개의 주교구, 3개의 지목구 등 27개의 교구로 이루어져 있다. 가톨릭 신자는 약 214만명(1982년 현재)에 이르고, 본당이 628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