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주 [한] 金孝珠 [관련] 김효임

김효주(1816~1839). 성녀(聖女). 동정녀(童貞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아녜스. 성녀 김효임(金孝任)의 동생. 서울 근교 밤섬의 부유한 가정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후 가족들과 함께 입교하여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고, 그 뒤 언니인 김효임, 동생 글라라와 함께 수정(守貞)을 결심하고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그 해 4월 이사해 살고 있던 경기도 고양(高陽) 땅 용머리[龍頭里]에서 언니 김효임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매우 잔인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형조에서도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언니보다 20여일 먼저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1984년 5월 6일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 김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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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임 [한] 金孝任

김효임(1814~1839). 성녀(聖女). 동정녀(童貞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골룸바. 성 김효주(金孝珠)의 언니. 서울 근교 밤섬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을 여읜 후 가족과 함께 입교하여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고, 그 뒤 두 여동생 글라라, 김효주와 함께 수정(守貞)을 결심하고 열심히 수계하였다. 매주 두 차례의 대재(大齋)를 지키는 외에 가난한 이들과 병약자를 돌봐 주어 그 덕행과 아름다운 모범에 교우들뿐 아니라 외교인들까지도 감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그 해 4월 이사해 살고 있던 경기도 고양(高陽)땅 용머리[龍頭里]에서 동생 김효주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남동생 김 안토니오의 피신처와 교회 서적을 감춘 곳을 알려는 관헌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동생과 함께 소위 학춤[鶴舞]이라는 혹형 이외에 달군 쇠꼬챙이로 몸의 열 세 곳을 지져대는 잔혹한 고문을 당했고, 또 옷을 벗긴 채 남자죄수의 방에 넣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든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김효임은 동생과 함께 형조로 이송되었다. 이어 형조판서의 신문에 겸손하고 영리하게 대답하여 형조판서를 감동시키고, 신문 후 포청에서의 불의한 고문과 능욕에 대해 항의, 결국 자신과 동생에게 능욕을 가한 포졸은 귀양가게 되었다. 그 뒤 5개월 동안 옥에서 병과 고통과 싸우며 순교를 예비하던 중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20여일 먼저 순교한 동생의 뒤를 따랐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200주년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성인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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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준 [한] 金~

김화준(?~1815). 순교자. 세례명 야고보, 충청도 청양 수단리(현 靑陽郡 斜陽面 新旺里) 출신. 그의 인적사항(人的事項)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성격이 온순하면서도 신앙심으로 누구보다도 굳건하여 모범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15년 청송(靑松)에서 체포되어 안동(安東)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무수한 혹형과 갖은 유혹으로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1815년 6월 19일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 해 12월 26일(음 11월 8일)에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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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섭 [한] 金洪燮

김홍섭(1915~1965). 법조인. 세례명 바오로. 전북 김제군 금사면 원평리(院平里)의 한 농가에서 부(父) 김재운(金在雲)과 모(母) 강재순(姜在順)의 독자로 태어났다. 1926년 원평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전주(全州)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던 중 링컨의 전기(傳記)를 읽고 감동하여 독학으로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뒤 1939년 닛뽕(日本)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했고,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자 이듬해 귀국, 김병로(金炳魯)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법조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1944년 김준연(金俊淵)의 3녀 김자선(金子善)과 결혼하고 이듬해 광복이 되자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되어 1946년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 위조지폐 사건을 담당하면서 명성을 떨쳤으나 이해 9월 검사직에 회의를 느껴 사임한 후 뚝섬에서 농사를 지으며 전원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법원장 김병로의 간청으로 3개월만에 법조계에 복귀,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는 한편 1948년부터는 중앙(中央)대학에서 법리학(法理學)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50년 서울고등법원 판사. 1953년 서울지방법원장을 역임하고 이때부터 최남선(崔南善)과 친교를 맺고 신앙문제를 토의한 끝에 천주교에 귀의하게 되어 1953년 9월 온 가족과 함께 영세 입교하였다. 그 뒤 1956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1959년 전주지방법원장. 1960년 대원판사, 대법관 직무대리, 1961년 광주지방법원장 등을 역임하고 1964년부터 서울고등법원장으로 재직하던 중 이듬해 3월 16일 간암으로 사망,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에 있는 전곡본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김홍섭은 평소 청렴강직한 구도자적 생활로 법조계와 종교계의 귀감으로 존경받았고, 많은 죄수들을 사랑과 연민으로 돌봐주며 신앙으로 인도하여 ‘수인(囚人)들의 아버지’, ‘법의(法衣)속에 성의(聖衣)를 걸친 사람’, ‘사도법관’(使徒法官), ‘남을 위해 산 사람’ 등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또한 인간에 대한 형벌의 궁극적 근거에 대해 깊이 고민한 끝에 자신의 독특한 실존적 법사상을 수립, 중국의 오경웅(吳經熊), 일본의 다나까 고오따로(田中耕太郞)와 함께 동양의 3대 가톨릭 법사상가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이뿐 아니라 김홍섭은 시, 그림, 등산 등을 즐기는 한편 교회사적(敎會史蹟)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전주지방법원장 시절 전주 치명자 산에 이순이(李順伊)의 순교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1972년 율곡법률 문화상이 추서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무명≫(無明, 1954), ≪창세기초≫(創世記抄, 1954), ≪무상≫(無常)을 넘어서≫(성바오로출판사, 1964)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법조인 11인, 新東亞, 1965. 1 / 崔鍾庫, 使徒法官 金洪燮, 育法社, 1975 / 韓龍煥 · 徐相堯, 福音의 證人,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2 / 金政壎,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성바오로출판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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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연 [한] 金~

김호연(1796~1831). 순교자. 세례명 바오로. 경상북도 안동(安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사색과 독서를 좋아하여 20세를 전후해서는 만여 권의 서적을 독파, 철학 · 윤리 · 종교 · 천문 · 역학 · 과학 등 다방면에 능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소문으로 사방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자 1830년 경 경상도 순흥(順興)에 은거, 학문 연구에 몰두하던 중 학식있는 선비로부터 천주교에 대해 알게 되어 세속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입교하였다. 입교 후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에게 천주교를 가르쳤으나 아버지가 제사문제로 천주교를 배척, 자신을 학대하고 매질하자 집을 나와 교우들 집에 숨어 살면서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 독서와 극기로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자신을 숨겨주고 있는 몇몇 교우들을 고발하려 하자 다시 집으로 들어가 집안의 학대를 인내와 극기로 이겨냈으나 아버지의 심한 매질로 인해 1831년 9월(음 8월) 어느 날 낮 삼종기도를 바친 후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은 이벽(李檗)과 이승훈(李承薰)이 집안의 박해로 배교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집안의 박해를 인내와 극기로 참아내면서 맞이한 순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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